그렛헨 비극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무려 6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이 웅대한 드라마는, 그 내용의 전개 부분들이 오히려 섬세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위에서 인용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 『파우스트(Faust)』제2부의 끝 장면이자, 『파우스트』전체의 끝부분이다 - 이 작품에는 인간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명제들이 모두 다루어지고 있는 바, 천상과 지상의 교통, 참회와 구원, 신의 섭리와 은총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 등이다.
얼핏 보아 그것들은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이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대체 『파우스트』의 어떤 부분이 우리를 매혹시키기에 2백년 가까운 세월 인류의 심금을 울리면서 고전중의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천상적 초월성 속에 잠복한 현재적 실감을 발견하는 일이 『파우스트』 이해의 관건이 될 것이다.
『파우스트』는 2개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그렛헨 비극」, 「헬레나 비극」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1부와 2부는 여러 가지로 대비될 수 있겠는데, 쉽게 말해서 제1부는 훨씬 현실적이며 제2부는 보다 상징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고 일단 말할 수 있다. 제1부의 내용은 노학자 파우스트가 현세적인 인간의 한계를 통절히 느끼고 관념적인 학문의 세계를 떠나 세상 속을 부유하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라든가 현실적인 장애를 제거해주는 일종의 마법사로서 메피스토펠레스가 개입하게 되며, 세상사의 대표적인 일로서 이성간의 사랑을 통해 쾌락과 죄, 처벌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제1부는 통속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 내용은 평이하며 재미있다. 진리탐구에만 열중하던 학자가, 삽살개가 변한 메피스토의 유혹을 받아 세상사의 한 복판으로 나왔다는 초장의 전개부터 재미있지 아니한가.
사실 『파우스트』의 재미는, 오늘의 문화 마당에서라면 동영상이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온갖 방법과 도구들이 동원되는, 그야말로 멀티미디어적 시설의 완전 구축이라는 면에서 벌써 예감된다. 「무대에서의 서연(序演)」이라는 첫머리에 이미 이렇게 나와 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 독일 무대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으니
오늘은 배경이건 소도구건
마음대로 사용해 보자고.
크고 작은 천상의 조명들을 모조리 동원하고
별들도 얼마든지 사용하게나.
물, 불, 암벽은 물론
동물과 새들도 빠져선 안 되네.
비록 비좁은 판잣집 안일망정
창조의 온 영역을 재현해놓고
알맞은 속도로 두루 거닐어보자고.
천국에서 현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파우스트』에는 모든 상징이 동원되며 현실과 꿈, 인간과 동물, 지상과 천상이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는 그야말로 신비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제1부는 제2부와 달리 단막극으로 되어 있으나 그 변화는 다양해서 「천상의 서곡」을 제외하더라도 「밤」, 「서재」, 「거리」, 「성당」, 「감옥」 등 25개의 장면에 이른다. 이 중 「천상의 서곡」은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강하게 암시한다. 우선 등장인물부터 주님, 천사의 무리, 메피스토펠레스다.
천사의 무리들은 다시 라파엘, 가브리엘, 미하엘로 나뉘어 나타나는데, 흥미로운 것은 파우스트에 앞서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먼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님과 독대하면서 이 작품의 전개를 예시한다. 예컨대 신을 조롱하면서 인간들을 경멸하는 그가 주님과의 대화하는 다음 부분에는 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님 내게 할 말이 그것뿐이란 말이야?
너는 항상 불평만 늘어놓으러 오느냐?
지상의 일이 네겐 영원히 못마땅하다는 게냐?
메피스토 물론이지요. 늘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아주 지독한
곳입니다. 인간들의 비참한 꼬라지가 하도 딱해서
나 같은 악마도 그 가련한 놈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니까요.
주님 자네 파우스트란 자를 아는가?
메피스토 박사 말인가요?
주님 나의 종이니라!
파우스트가 누구이고 그가 한 일이 무엇이며 그 의미가 또한 무엇인지 해석하려고 한다면, 파우스트를 그의 종이라고 결연히 선언한 주님의 발언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의 종으로 삼은 구약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 온전한 이해는 기독교적 문맥 속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든 파우스트든 주님의 선택을 받은, 그의 종임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아 그렇지 못한 일반인보다 더욱 심한 방황을 하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일반 사회적 통념으로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문맥 안에서 아브라함은 잘못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신앙의 조상이 된다. 파우스트의 경우도 방황과 잘못이 필경 회개와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둘 사이의 비교는 간단치 않은데, 바로 이 문제가 『파우스트』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즉,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 이 작품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결국 메피스토는 주님으로부터 파우스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는 말을 이끌어 내는데, 여기서 저 유명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기이한 명제가 탄생한다. 그것은 얼핏 메피스토에 대한 양보 같지만, 지상 생활의 과정과 종말 그리고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 된다. 이후 작품의 전개는 메피스토의 뜻대로 행해진다.
우선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로 하여금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데, 여기에는 지령(地靈)을 비롯한 갖가지 정령들 및 여러 가지 신비한 매개물이 등장한다. 양자 사이에는 쾌락을 위한 계약이 타결되고 마녀로부터 얻어 마신 약으로 젊어진 파우스트는 마르가레테(그렛헨)에게 반해버린다. 그렛헨은 임신을 하고 마을의 소문은 뒤숭숭해진다. 그러던 중 그렛헨의 오빠를 메피스토와 파우스트가 찔러 죽이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렛헨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죽여 감옥에 갇히게 된다.
게다가 그가 준 수면제를 먹은 그녀의 어머니까지 죽었다. 그렛헨 일가가 모두 죽는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와 함께 그렛헨을 구하려고 감옥으로 가지만 혼절한 그녀는 탈옥을 거부한 채 횡설수설하는데 '위로부터의 목소리'가 그녀는 이미 구원받았음을 선포한다. 여기서 '위'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천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신비주의를 넘어서
5막으로 되어 있는 제2부는 외견상 제1부보다 그 이해가 간단치 않다. 그렛헨을 버린 살인범 파우스트는 제1막에서 "내 주위가 온통 낙원이 된다"고 즐거워하면서 지난 비극을 완전히 잊어버린 주인공으로 다시 나온다. 제1부의 「발푸기스의 밤」 장면을 통해 마녀들의 축제를 그려놓음으로써 신비주의의 실상을 드러냈던 괴테는 제2부 도입부부터 다시 메피스토를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의 실체를 그려놓는다.
그러나 마녀들의 축제가 마법의 내용을 둘러싼 것이라면 제2부 제1막에서는 황실을 중심으로 한 현실 정치 내지 행정의 현장에 나타나는 마법의 위력이 펼쳐진다. 여기서도 메피스토는 나타나서 그의 역할을 과시한다. 그 가운데에 헬레나가 등장하는데, 다시 한 번 파우스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메피스토가 뚜쟁이 역할을 하지 않고, 오히려 파우스트의 접근을 저지한다. 그럴수록 파우스트의 태도는 전례 없이 단호하다.
파우스트 [...]
여기에 나는 굳건히 서 있다! 여기에 모든 현실이 존재한다.
여기서부터 정신이 정령들과 싸우고 위대한 이중 세계를 세울 수 있다.
그렇게 멀리 있던 여인이 어찌 더 가까워 질 수 있으랴!
내가 그녀를 구하겠다. 그러면 그녀는 이중으로 내 것이 되리라.
자, 용기를 내자! 어머니들이여! 어머니들이여! 용납해 주소서!
그녀를 알게 된 자, 그녀를 놓칠 수 없으리라.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비난하면서 학자들과 학문까지 비웃는다. 메피스토는 실험실에까지 출몰하여 바그너 박사와 더불어 제3의 인간형 창조에 대해서까지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호문쿨루스라는 인조인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괴테가 파라켈수스(Paracelsus)1) 학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즉, 남성의 정자를 밀폐된 증류기에 넣어두면 생기를 얻게 되는데, 거기에 사람 폐의 엑기스를 섞어 40주 동안 양육하면 인간이 된다는 설이다.
오늘날의 인간 복제와는 다르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창조를 꾀하는 아이디어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특히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것은 호문쿨루스가 메피스토를 가리켜 "당신이 아는 건 다만 낭만적인 유령일 뿐이며 진짜 유령은 고전적이야 한다"고 말한 내용이다. 이러한 전언 속에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어느 쪽에도 유령은 있다는 인식을 깔고 있는데, 그 배후에는 전통적인 게르만 신비주의2)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전적 발푸기스의 밤」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희랍 신비주의와 그 땅 그리고 그 문화를 말하는 것 같다. 실제로 여기서 파우스트는 "헬레나는 어디 있을까?" 하면서 두리번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헬레나3)는 희랍 신비주의 대표적 표상 아닌가.
「고전적 발푸기스의 밤」에는 『파우스트』의 중요한 메시지들이 사실상 모두 숨겨져 있다. 사이렌들의 입을 통하여 "한 신이 다른 신을/조롱하는 모양이지요./하지만 모든 은총을 공경해야지요./모든 재앙을 두려워하고요" 라고 한 말 그리고 다시 그들이 "신이 어디에 앉아 계시든/우리의 버릇은/해와 달을 향해 기도하는 것/그것은 보람 있는 일이랍니다"고 한 말 속에서 기독교의 신과 희랍 신화의 신들을 공존시키고자 하는 은밀한 의도가 노출된다. 이를 증명하는 대목들은 이 장면 앞뒤에 수두룩하다.
제3막은 헬레나로부터 시작된다. 제우스 신의 딸이며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비(妃)이기도 했던 그녀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트로이 왕 파리스에게 잡혀가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메넬라오스의 궁정 앞에서 찬양을 받던 그녀에게 파우스트가 나타나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둘은 마침내 열렬한 관계가 되었고 아들 오이포리온까지 얻는다. 그러나 오이포리온은 성격이 분방하고 거칠어서 무모하게 하늘로 날아오르다 죽고 헬레나도 뒤따라간다. 한편, 제4막의 서두에 나타난 파우스트는 지금까지의 개인적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관심을 나타내는 큰 변화를 보인다.
파우스트 지배권을 획득하는 거다, 소유권도!
행동이 전부다. 명성은 허무하다
그는 자신의 눈이 '아득한 바다'로 끌린다고 하면서, 바다를 해안에서 쫓아내 땅의 경계선을 좁히는, 말하자면 간척사업에 착수한다. 게다가 메피스토와 함께 황제를 모시면서 왕정에도 간여한 파우스트는 패색이 짙은 반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이 승리에는 메피스토의 마법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대주교의 불만이 터진다.
주님과 교황을 모독하는 악마와 결탁했으므로 황제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황제는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교회에 상당한 땅을 내놓는다. 뿐만 아니라 파우스트에게 하사한 해안지매의 수익금을 상당 부분 교회에 바칠 것을 대주교는 요구한다. 파우스트 또한 악마와 결탁했다는 이유다.
마지막 제5막에 오면 이제 늙은 파우스트의 본격적인 고민과 최후가 그려진다.
비록 낮은 우리에게 밝은 이성의 웃음을 던져주지만,
밤은 우리를 악몽의 그물 속에 옭아 넣는다.
싱싱한 초원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면,
새가 운다. 뭐라고 울지? 재앙이라고 운다.
밤낮 미신에 얽매어 살다 보니
허깨비가 보이고, 조짐이 나타나고 경고를 한다.
이렇게 우리는 겁에 질린 채 홀로 서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그러면서 그가 세상을 줄달음쳐 왔으며, 온갖 쾌락의 머리채를 붙잡아왔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도깨비들이 날뛰어도 자기의 갈 길만 가면 된다고 한껏 의연해 하는데, 그의 주위에 '결핍', '죄악', '근심', '곤궁'이라는 이름의 네 여인이 나타나서 그를 괴롭히듯 그의 현실은 악화된다. 마침내 '근심'이 파우스트를 저주하자 그는 눈이 먼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육신의 장님과 달리 그의 마음속에 밝은 빛이 빛나는 것이다. 생각했던 것을 완성해야겠다고 서두르는가 하면, 삽과 괭이를 들고 규칙대로 일할 것을 독려한다. 바다의 땅을 육지로 만들고 파도를 막으면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고 외치다가 그는 쓰러진다. 파우스트는 가고 천국과 지옥이 천사들과 메피스토의 합창 그리고 절규를 통해 엇갈린다. 파우스트의 구원은 속죄하는 여인을 통해 암시되며 실제로 '영원히 여성적'4)인 것의 힘이 나타난다.
파우스트의 실천적 의미
『파우스트』 는 여러 가지 시각에서 그 해석이 시도되었고 연구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는 주제는 이 작품이 헤브라이즘5)의 세계와 헬레니즘6)의 세계 그리고 게르만 신비주의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위대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괴테가 출생한 해는 1749년, 그가 죽은 해는 1832년이다. 84년을 살다간 그의 생애는 문학사적으로 질풍노도기와 고전주의, 낭만주의를 거치는 정열의 시기였으며, 정치사적으로 프랑스 혁명(1789)을 앞둔 시민 혁명의 기운으로부터 헤겔, 마르크스의 등장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였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이후 본격화된 이른바 휴머니즘의 수레가 굴러가면서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전통과, 다른 한편으로는 저 깊숙한 민족정서인 게르만 신비주의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던 때였다. 물론 이 세 흐름은 언제나 갈등 관계에 있었으나, 대체로 그 중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괴테 시대에는 이 세 요소들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병존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상 계몽주의 이후 희랍 신화를 원류로 하는 헬레니즘의 사조, 즉 인간 중심주의적 휴머니즘이 지배적이었으나 그 밑바탕을 이루는 범신론적 신비주의라는 전통 정서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의 시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독일 문학에서 그것은 그렇게 대립적이지 않다. 양자를 통합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괴테의 『파우스트』는 가장 전형적인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파우스트』에서 「발푸기스의 밤」이 게르만 신비주의 및 낭만주의의 현장이라면 「고전적 발푸기스의 밤」은 고전주의, 즉 희랍문화의 헬레니즘을 거기에 결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요소로 기독교 문화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작품의 구성 원리이자 주제가 된다. 16세기에 살았다는 떠돌이 학자 파우스트 전설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결국 파우스트의 '거듭남(重生)'이라는 기독교 원리를 바탕으로 천상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독일의 낭만주의라는 전통과 헬레니즘, 헤브라이즘이 어떻게 혼융·화합을 이루어 보다 높은 단계의 문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감명 깊게 표현해낸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 바라 본 『파우스트』의 실천적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갈등으로 혼재하고 있는 샤머니즘이라는 전통적 신비주의와 유·불교 그리고 기독교 정신은 보다 높은 단계의 문화를 위한 문학적인 승화가 모색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추구하는 문학 작품이 기대되는 것이다. 정신적 정체성이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문학 작품의 출현은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독일 역사에서 괴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바라보는 관점까지 나타났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중대하다. 그것은 독일인이 대립과 갈등, 혼란을 극복하고 통합과 자신감의 역사로 올라섰다는 뜻이리라.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인간의 욕망과 죄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시오. 지식과 문명은 여기서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할까요. 파우스트와 나의 경우를 비교해 보시오.
2. 구원은 인류에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나아가 구원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오.
3. 이성과의 사랑에서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파우스트는 그토록 이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했을까요. 나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추천할 만한 텍스트
『파우스트』1·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민음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