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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중심적 금욕주의
작성자 철** 작성일 2019-02-22 조회수 399

에픽테토스에서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기까지

 

에픽테토스는 서기 1~2세기에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아무런 책도 내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 아리아누스가 스승의 말을 충실히 기록한 <어록>과 이 책에서 발췌한 <도덕 교본>을 남겨 놓았다. <도덕 교본>은 기독교의 금욕주의와 맞아떨어져 기독교 신자들에게 대중적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의 윤리학은 데카르트와 칸트 같은 근대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에픽테토스: 소크라테스처럼 살아라

그는 <어록>에서 본받아야 할 인물로 디오게네스, 제논, 소크라테스를 꼽았는데 이들 중에서 소크라테스를 가장 중시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이성을 통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바라고 소크라테스처럼 살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그의 철학적 목적은 스토아학파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의 웅장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어떻게 개인이 이 험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여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가에 있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이러한 삶을 누리기 위해 자연과 인생의 필연적 법칙을 인식하고 이성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에픽테토스 역시 이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성에 따른 삶의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절름발이 철학자 에픽테토스. 소아시아에서 노예로 출생하였으며 나중에 자유민이 되어 철학을 가르쳤다.

인간의 본성(nature)은 자연처럼 전체적으로 볼 때 이성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하고 때때로 좌절의 낭패를 보며 불행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일과 달려 있지 않은 일을 우선 구분하고,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일은 아예 제쳐두고 달려 있는 일에만 전념하라고 권고한다.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일은 부와 명예, 권력, 사회적 지위, 출생 등이다. 이런 일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 그 제어를 시도한다면 우리는 좌절과 비탄의 쓴 맛을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일은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는 일은 욕망, 생각, 싫고 좋음 등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내적인 생활의 내용으로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일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함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유덕함,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욕망이 특히 마음을 어지럽혀 평정을 깨뜨리고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주요인이라고 보았다. 욕망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변덕스러운 군주로서 힘이 아주 세다. 더군다나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실망하고 원치 않는 것을 얻을 때 고통에 빠지므로 욕망은 우리의 행, 불행을 좌지우지한다. 그러므로 불행과 비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그런데 욕망은 강력하긴 하지만 습관에 불과하다. 그리고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과 의지(prohairesis)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성과 의지를 발휘한다면 습관을 고치고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

스토아(stoa)는 기둥과 벽으로 둘러싸인 고대 그리스의 공공건축을 의미한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이 아테네의 한 스토아에서 강의를 한 데서 학파의 이름이 유래했다. <출처: (cc) DerHexer at wikipedia>

이성을 통해 욕망을 제어해야 하고, 또 제어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일치한다. 또한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몸을 돌보는 일에 신경을 쓰는 대신 혼을 돌보라고 권고하였다. 에픽테토스도 역시 몸을 돌보는 데 과도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이성을 계발하고 보살피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도 그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생각의 궤를 같이 한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만을 거론했다. 즉, 우리가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그 일을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우리는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일을 종종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일을 하곤 한다. 바로 의지의 부족 때문이다. 그는 이성적 욕망을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지(prohairesis)를 이성에 추가했다. 이런 점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다른 점이다.

데카르트: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너 자신을 바꾸어라

근대 철학의 아버지이자 해석기하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

<정념론>의 서두에서 데카르트는 정념을 무시하거나 영혼의 병으로 규정하는 고대 철학자들의 태도를 거부했다. 그는 정념을 긍정적으로 보아 사랑과 미움, 용기와 비겁함, 기쁨과 슬픔, 질투와 욕망 등의 정념들을 이성과는 별도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게다가 영혼은 정념을 통해 삶의 감미로움을 얻거나 쓴 맛을 보기도 하기 때문에 정념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정념론>의 말미에서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게 고대 철학자를 비판하고 정념을 상세하게 탐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에 관한 그의 생각은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세 번째 격률은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격률은 욕망에 맞서는 그의 생각의 핵심을 보여주기에, 좀 긴 문장이지만 인용해 보겠다.

“내 세 번째 격률은 언제나 운명보다도 나를 아끼며, 세계의 질서보다는 오히려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또 일반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밖에 없으므로, 우리의 외부의 것들에 관해서 최선을 다한 후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모든 일은 우리에게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믿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얻을 수 없는 것을 조금도 바라지 않게 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게 하는 데는 이 격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 그러나 모든 사물을 이러한 각도에서 보는 버릇을 가지게 되는 데는 오랜 훈련과 명상을 되풀이하는 것이 필요함을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옛날에 운명의 지배를 벗어나 여러가지 고통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신들과 더불어 행복을 겨룰 수 있었던 철학자들의 비밀도 주로 여기에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1)

프랑스의 투렌(Touraine)에 있는 데카르트의 생가

<정념론>에 나오는 욕망에 관한 그의 생각도 에픽테토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정념론>에서 그는 욕망이 다른 어떤 정념보다도 더 격렬하게 심장을 동요시키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더 많은 정기를 뇌에 공급한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욕망은 쾌락을 수반하는 가장 자극적인 정념이므로 영혼을 가장 크게 혼란에 빠뜨린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여러 정념들 중에 가장 강렬한 정념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1649년 출간된 데카르트의 마지막 작품 <정념론>. 보헤미아의 공주가 던진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집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욕망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도 했다. 그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결핍으로 해석했지만 플라톤보다 좀 더 면밀하게 정의했다. 즉, 욕망이란 우리가 현재 소유하지 않은 좋은 것과 현존하는 좋은 것의 보존을 바랄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진 나쁜 것과 미래에 닥칠 나쁜 것을 피하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욕망이란 시간적으로 미래를 향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고대 철학자들과는 달리 욕망을 무조건 나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욕망이 이성의 참된 인식에서 유래하고,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그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는 자유의지에 의존하는 욕망과 자유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욕망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자유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욕망을 신의 섭리나 운에 맡겨야 한다. 그 다음에 자유의지에 의존하는 욕망 중 선한 것을 인식하고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영혼의 고유한 무기인 이성과 의지를 통해 욕망을 제어하는 습관을 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욕망은 쉽사리 제어할 수 있는 정념도 아니고 육체의 정념에 의해 제어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이성과 의지로 욕망과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영혼의 힘이 강해서 이성과 의지로 욕망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이성과 의지로 욕망을 부단히 지도하고 훈련한다면 우리는 결국 욕망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욕망에 관한 데카르트의 생각은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를 충실히 계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칸트: 정언명령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욕망은 쾌를 추구하는 활력으로서 명예욕, 지배욕, 소유욕이나 성적 쾌락과 오락의 추구, 건강과 안락한 삶의 추구 등을 두루 포괄한다. 그런데 욕망은 성벽()이나 바람 등의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특히 경향(Neigung)의 형태로 나타날 때 도덕적 의무와 각을 세우게 된다. 경향이란 습관화된 감성적 욕망이지만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2)

독일 관념철학의 기초를 세운 프로이센의 철학자 칸트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는 도덕적 의무와 경향의 대립이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으므로 이 책을 중심으로 그의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를 살펴보자.

이 책에서 그는 서양의 고대 철학자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이성을 통한 욕망의 제어와 냉정한 숙고도 선의지의 원칙이 결여되면 냉혈한의 사악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체로 선하고 추상화된 도덕법칙인 이성의 명령(정언명령)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추상화되고 형식화된 정언명령이 최고의 도덕법칙이 된다면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는 칸트철학에서 정점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선의지를 도덕적 행위의 준거로 삼을 때 든 예를 살펴보자. 어떤 상인이 손님들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가격으로 상품을 제공한다면, 그는 정직한 거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거래가 정직의 원칙이 아닌, 단지 영업 전략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것은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성격이 좋거나 인정이 많아서 남에게 친절을 베푼다 하더라도 그 행위는 도덕적 의무에 적합하긴 하지만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다 자신의 경향에 따라 행동했고 그들의 행위에 선의지나 도덕적 의무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욕망이나 경향을 벗어나서 도덕적으로 선하게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여러 기준들이 뒤죽박죽된 대중의 실천철학에서 벗어나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도덕법칙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 도덕법칙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선하게 되는 가언명령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정언명령이다. 여러가지 꼴로 표현되는 이 정언명령은 간명하게 표현해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는 형식으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칸트

그는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한 사람의 예에 이 정언명령을 적용했다. 이 사람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서도 빌리기로 한다. 이때 그의 행위의 준칙은 ‘내가 갚을 능력이 없더라도 돈이 궁하니까 빌리고 갚겠다는 약속을 해도 좋다’이다. 그러나 이 준칙은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된다면, 약속은 실없는 짓이 될 것이고 헛된 것으로서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어 자가당착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정언명령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며 어떻게 절대적으로 필연적인가?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의 한계 때문에 물자체(thing-in-itself)를 인식할 수는 없고 물자체가 우리를 촉발하는 모습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이성이란 현상의 인식에 국한되어, 현상의 피안에 있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고 사유하거나 상정할 수만 있을 뿐이다. 인식의 영역에서 현상과 물자체가 구별되듯이, 도덕의 영역에서는 감성계(욕망과 경향의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경험적 세계)와 예지계(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이성의 세계)가 구별된다. 인간은 감성계에 속하는 한 자연법칙(타율)에 따르는 반면에, 예지계에 속하는 이성적 존재자로서는 욕망과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필연적인 도덕 법칙을 세울 수 있다. 따라서 도덕법칙이란 경험적인 것에 근거를 두어서는 절대적인 필연성을 가질 수 없으므로 예지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덕법칙은 경험적 근거를 초월해 있으므로 도덕법칙의 절대적 필연성은 불가해하다. 하지만 그것은 물자체처럼 사유하고 상정할 수는 있다.

이와 같이 칸트는 우리가 감성계와 예지계라는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지만 예지계에 속하는 이성의 도덕법칙을 이성적 존재자로서 존경하고 이 법칙에 복종할 것을 권고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권고를 바꾸어 말해 본다면, 이 권고는 우리가 도덕법칙에 완전히 합치해 살 수는 없지만 ‘욕망과 경향’(감성계)을 도덕법칙에 대한 의무로써 이겨내고, ‘이성의 명령’(예지계)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라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를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통해 충실히 계승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의 의의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 후설의 현상학을 정신과학과 윤리학 등에 적용시켰다. ‘철학적 인간학’을 창시했다.

금욕이나 절제가 때때로 필요하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꼼짝 못하게 하려는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실천하기에는 버거운 면이 있다. 20세기 초엽에 철학적 인간학을 창시한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1928)도 <우주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에서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를 포함해서 금욕주의는 인간에게 무리한 요구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성과 욕망의 대립구조를 세우면서 욕망이라는 타자를 억누르고 이성에게 우월적 지위를 부여한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를 향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던지고 싶다. 이성에 과도한 비중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이성은 욕망과 싸우지 않고 사귀어나갈 수는 없는가? 이성과 욕망은 뿌리가 같은 형제가 아닐까?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감성이나 영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를 아예 내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는 오늘날에도 의의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는 우리가 욕망에 휘둘려 살아서는 안 되고 욕망에 휘둘려 살지 않기 위해서는 이성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 - 에픽테토스에서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기까지 (철학, 욕망을 마주하다, 조홍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