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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상상력의 확장
작성자 철** 작성일 2019-01-02 조회수 313

21세기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가 가야 할 길

 

과학기술 연구의 낯선 진실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기술 연구가 사람들의 상식에 비추어 의외의 모습이 많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의외의 모습’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과학기술 ‘연구’를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던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지식’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지식’이 과학기술 ‘연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연구’는 ‘지식’보다 훨씬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고 더 역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답과 표준적 풀이가 분명히 있는 문제가 아니라 문제 설정 자체가 제대로 되었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 ‘연구’입니다.

개별 학문 분야마다 연구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강의 규칙과 여러 유용한 지침이 있지만 누구나 기계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연구 결과물의 참이 보장되는 그런 의미의 과학 방법론은 없습니다.

좌충우돌하며 연구를 열심히 진행하고도 여전히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 과정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역사에 남을 ‘천재적’ 연구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과학기술 혁신이란 객관적 과학 방법론의 알고리즘적 적용이 아니라 개별 연구자의 ‘창의성’과 ‘개성’의 산물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과학기술 연구가 ‘너무도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수많은 검증과 정련을 거쳐 과학 교과서에 실린 과학지식은 ‘인간적’ 매력이 전혀 없는 추상적이며 객관적인 진리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과학기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구 과정은 개별 연구자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결정적으로 영향받는 실천적 활동입니다.

과학기술 연구는 개별 연구자의 선택과 판단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과학기술 연구는 개별 연구자의 선택과 판단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출처: 셔터스톡>

‘상상력’과 ‘창의성’의 복잡한 진실

우리는 또한 과학기술과 관련된 상상력과 창의성이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얼마나 복잡한 조건 아래서 발휘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실제 과학기술 연구에서 필요한 상상력이나 창의성은 결코 ‘기존의 틀을 깨는 자유로운 생각’만으로는 규정짓기 어렵다는 점을 보았지요.

게다가 우리는 이 점이 자유로운 상상력이 결정적으로 발휘되는 사례로 이해되는 예술 활동에서도, 비록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시나리오는 단지 천재적 상상력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나리오를 영화로 완성시키기까지 수많은 요인을 고려해야 합니다.

관객의 만족도와 작품의 예술성, 대중매체의 평가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 각각이 요구하는 방향이 대부분의 경우 일치하지 않기에 그것들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시나리오 쓰기에도 쿤이 말한 ‘수렴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술 창작에서도 과학 및 기술 연구와 마찬가지로 제한적 조건을 만족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수렴적 상상력)이 참신하고 혁신적인 생각(발산적 상상력)과 결합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 결합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당연히 해당 분야가 무엇인지, 풀고자 하는 문제의 성격은 또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창의성이란 결국 여러 영역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요소를 잘 묶어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종합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능력 등에 결정적으로 의존합니다.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에만 창의성이 숨어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런 종합과 해석의 능력에도 어마어마한 창의성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창의성과 상상력을 논의할 때 이 점을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종합과 해석의 능력에도 어마어마한 창의성이 숨어 있다.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종합과 해석의 능력에도 어마어마한 창의성이 숨어 있다.<출처: 셔터스톡>

탈추격형 과학기술 혁신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과학기술 연구의 진실’이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활용한 과학기술 연구 방식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 수준이 선진국보다 많이 뒤떨어져 있던 상황에서 우리는 답이 분명한 수학 문제를 다른 사람보다 정확히 빨리 풀어야 하는 수험생처럼 기술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즉 선진국이 이미 개발한 과학기술 결과물을 신속히 효율적으로 재개발하는 것이 그때는 중요했지요.

이런 ‘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을 추진한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그 일을 잘 수행한 나라도 흔치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추격형’ 과학기술 연구에서는 최고의 우등생이었습니다.

반도체 개발의 역사가 좋은 사례입니다. 국가가 주도하고 산업체가 호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반도체 개발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3년 동안 개발했던 D램을 단 6개월 만에 개발해내는 놀라운 성취를 끊임없이 이뤄냈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선진국이 3년 동안 개발했던 D램을 단 6개월 만에 만들어냈을까?

한국은 어떻게 선진국이 3년 동안 개발했던 D램을 단 6개월 만에 만들어냈을까?<출처: 셔터스톡>

물론 그렇게 개발한 D램은 글로벌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큼 성능도 뛰어났습니다. 이미 개발된 D램이라는, ‘정답’이 있는 문제를 더 빠른 속도로 정확히 푼 덕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교육 수준이 높은 우수한 인재들이 엄청나게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가 정말 성실했거든요.

하지만 성실함만으로 이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빨리 ‘압축적으로’ 해낸 근본적 이유는 다른 나라의 성공 사례, 즉 정답이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제조기법이야 영업 비밀이니 배울 수 없었겠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반도체 관련 과학기술 원리를 이미 출시된 ‘정답’에 역으로 적용해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찾아나가는 일은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 답을 ‘처음’ 찾아내는 것보다는 쉽고 빠르겠지요. 똑똑한 중학생이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해서 문제를 푸는 일이 그 학생이 성실하기만 하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풀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를 먼저 ‘설정’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실 ‘답’을 찾아낸다는 말 자체가 너무도 단순한 생각입니다. 과학기술 연구라는 건 많은 경우 누군가가 ‘답’을 찾아내면 모든 사람이 ‘와!’ 하면서 금방 그게 답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과학 연구라면 ‘답’을 찾아낸 과학자가 여러 증거를 동원해 다른 과학자를 설득하며 집단지성의 동의를 획득해야 합니다. 기술 연구라면 와트의 증기기관이나 마르코니의 무선전신이 그랬듯 기술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결합해 다른 기술자들이 모방하는 기술표준을 획득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답을 ‘발견’한다기보다는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답이 관련된 모든 과학기술자에 의해 ‘답’이라고 인정되면 그다음부터는 교과서에 수록되며 ‘자명한 답’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에 익숙했던 우리나라 정부나 기업은 이렇게 답을 ‘만들어가는’ 혹은 ‘구성해가는’ 과정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1등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죠.

1등은 어렵습니다. 1등은 뭐가 1등인지를 스스로 규정해야 하고 그 규정이 왜 올바른 규정인지를 다른 경쟁자에게 납득시켜야 합니다. 미국에서 나노 기술이 유행이라고 하면 나노를 연구하고, 빅데이터 이야기가 나오면 빅데이터를 따라 연구하는 방식으로는 1등을 할 수도, 1등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연구 동향에 주목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하죠. 하지만 우리 스스로 고민해서 진짜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 다음 세대에는 어떤 기술이 중요한지, 그 기술에서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를 앞서서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제는 좀 달라졌겠지만 한때는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계획서에 경쟁 국가 비고란이 반드시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기술을 개발하고자 할 때 미국이나 일본에서 그 기술에 얼마나 투자해 연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 그것이 좋은 근거로 작용해 지원을 얻기가 쉬웠다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시도하고 있지 않지만 아주 중요한 기술이어서 연구하겠다” 하는 식의 논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 된 데는 나름 합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실패비용 때문이죠. 과학기술 선진국에서도 시도하지 않는 연구를 하려면 초기 실패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에서 반도체메모리칩 256MD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패비용이 얼마였을까요? 당연히 단번에 성공한 것은 아닐 테니 실패비용이 꽤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개발 시도 자체를 포기할 만큼 큰 비용은 아니었을 겁니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죠.

그에 비해 1등을 유지하기 위한 실패비용은 어마어마합니다. 뭘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들어야 하니까요. 만약 ‘차세대 선도 기술’이라 생각하고 개발했는데 시장 반응이 싸늘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개발비용은 그냥 날리는 겁니다.

중요한 점은 과학기술 연구의 속성상 이런 실패비용을 피할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흔히 애플을 창의성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애플이 내놓았던 제품 중에는 요즘 말로 ‘폭망’했던 제품이나 ‘혁신 자체’에 그친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애플은 왠지 계속 성공만 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수많은 실패가 있었고 그 실패를 성공적으로 ‘관리’해나간 결과가 애플 창의성의 배경입니다. 1등의 대가는 상당한 실패비용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탈추격형’ 과학기술 개발, 즉 주어진 정답을 쫓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와 답을 동시에 제시하는 방식으로 과학기술을 개발하려면,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성공적으로 실패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방법은 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무척 낯설고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는 여러 분야에서 이런 방향 전환에 성공한 연구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탈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을 위한 융 · 복합 연구

탈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에서 실패비용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이 실패 비용을 줄이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 맥락에서 사람들은 융 · 복합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왜 그럴까요?

아직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차세대 휴대전화’를 개발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연히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수많은 부품을 제작하는 기술, 그 부품을 배치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 휴대전화를 작동시키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기술 등 여러 종류의 기술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무엇이 ‘차세대’ 휴대전화의 특징일까요? 그저 지금의 휴대전화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잠시라도 휴대전화를 안 들여다보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생활필수품이 되었으니, 이제 휴대전화의 미래는 곧 우리 사회의 미래이고 그 기술은 미래에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과도 연관될 것입니다.

이 정도로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술의 미래를 규정하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설득해내려면 휴대전화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개별 기술의 결합을 뛰어넘는 좀 더 복합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합니다.

실제로 세계적인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모두 이런 융 · 복합적 연구를 수행합니다. 그런 연구 없이 기술적으로만 우수한 제품을 만들다가는 어마어마한 실패비용을 지불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실제로 관련된 쟁점에 대한 충분한 융 · 복합적 고려 없이 첨단 기술 자체만 연구하다 실패한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국내에서 시도되었던 ‘노인돌보미로봇’이 대표적 실패 사례죠.

노인돌보미로봇을 개발한 사람들은 분명 노인에게 도움이 되는 로봇을 개발하려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노인돌보미로봇을 필요로 하는 노인들이 처한 주거 상황이나 사회적 · 정서적 조건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고 공학적 시각만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노인들은 몸이 불편하니 이동이나 섭식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니 노인이 의지해서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거나 노인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음식을 떠서 입에 넣어주는 로봇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공학자들이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을 국가예산을 지원받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현재 사용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일단, 이 노인돌보미로봇은 도움을 줄 사람을 스스로 구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우선 보급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취약계층 노인들은 많은 경우 큰 몸집의 로봇이 움직이기에 적절하지 않은 주거 환경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주거지에는 문턱 있는 좁은 방이 많은데 그 문턱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노인을 번쩍 안아 이동하는 로봇을 만들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장소에 머물면서 ‘돌보미’ 활동을 하는 로봇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 로봇의 조작 방식이 매우 복잡했다고 합니다.

노인돌보미로봇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용자를 여러 각도에서 고려한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노인돌보미로봇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용자를 여러 각도에서 고려한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출처: 셔터스톡>

기계에 서툰 노인 분들은 이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버튼이 많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이 기계를 시범사업으로 집에 들여놓은 노인 분들은 비싼 기계를 고장 낼까 겁이 나서 그냥 잘 ‘모셔두게’ 된 겁니다.

이처럼 사용자를 여러 각도에서 고려하지 않고 기술적 요인에만 초점을 맞춘 제품 개발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반면에 융 · 복합 연구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인지과학을 들 수 있는데요, 이 사례는 다양한 시각을 문제 해결 중심으로 결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지과학이란 인지심리학을 중심으로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철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이 종합된 학문 분야입니다. 그렇지만 개별 인지과학자는 이들 분야에서 많아야 2개 분야 정도에서 전문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지과학자가 인지에 대해 ‘만물박사’는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과학자는 좁은 분야 전문가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풀고자 할 때, 예를 들어 인지과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조지 밀러가 ‘생각의 속도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고민할 때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다른 분야의 이론 틀이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선택적으로 개방적이었다는 점이죠.

융 · 복합 연구를 위해 무조건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막연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풀려는 문제와 관련된 여러 전문 분야의 시각과 연구 결과를 창의적으로 결합해 성공적인 ‘정답’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을 벗어나 종합적 사고를 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쿤의 수렴적-발산적 상상력의 결합을 넘어서는 상상력의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쿤이 말한 ‘본질적 긴장’은 기본적으로 물리학이나 심리학처럼 특정 전문 분야 ‘안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관리되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융 · 복합 연구를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넘어’ 상상력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상상력의 확장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는다는 말 자체가 그 분야의 기준과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규정하며 그 문제에 대한 독특한 해결책을 찾는다는 의미이니까요.

즉 물리학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답을 찾아내는 방식은 생물학자의 그것과 매우 다르고 마찬가지로 기계공학자의 그것과도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과학기술 개발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일반적 어려움에 더해 상상력의 확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몇 가지 더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학기술 연구가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적 상상력의 범위가 더 좁게 규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앞서 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우리나라가 추격형 과학기술 연구의 성과를 통해 눈부신 경제개발을 이룩한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똑똑하고 성실한 과학기술자들이 정부와 기업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결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 특히 1990년대 경제위기 이전의 과학기술 개발 환경을 기억하는 세대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이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예전에는 과학기술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 결과를 사회가 향유하고 과학기술자들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현재는 과학기술 연구가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고 나서야 이뤄져야 한다는 ‘낯선’ 요구 조건에 직면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과학기술 개발 역사를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방식으로 회귀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런 방식으로는 1등을 달성하고 유지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 연구에서 사회적 고려나 법률적 고려, 윤리적 타당성을 따지는 일이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런 사항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제품은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도 글로벌 시장에서 복잡한 규제 장벽이나 문화적 저항을 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여러 분야에서 1등을 하는 기업들이 많은데 이들 기업은 이미 누가 시키지 않아도 융 · 복합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미시파 기술광이 주는 교훈

이제 우리도 과학기술 연구에서 더 확장된 상상력이 발휘되는 상황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과학기술의 학문적 경계를 벗어난 여러 고려 사항이나 개념, 이론적 시각을 ‘선택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겁니다.

이는 탈추격형 과학기술 연구 조건에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업입니다.

공학자들 중에는 어차피 기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일단은 개발된 기술을 사회적으로 널리 활용해보고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때 대응책을 세우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기술은 기술개발자의 의도대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니 기술의 개발 단계에서 그 기술의 파급 효과까지 정확히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내용을 갖는 기술일지라도 그 기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디자인하고 개발 과정에서 어떤 점에 유의하느냐에 따라 기술이 갖는 사회적 영향에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점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만들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온라인 세계로만 빠져들게 하는 휴대전화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통제하면서 대신 먼 거리 사람들과의 사회적 소통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최근의 북아프리카 민주화 운동에서 보았듯 휴대전화가 사회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도록 디자인에 더 신경 쓸 수 있다는 거죠.

최근 공학 교육 및 연구에서 개별 기술을 종합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기능을 실현하는 설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기술 발전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기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치를 기준으로 고려할 때 그 선택지가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더 바람직한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하려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프레온 가스 대체제 개발을 통한 남극 오존층 복원처럼 어떤 노력은 종종 기대한 효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단순히 기술적 세부사항에 갇히지 않는 사고를 통해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사회적으로 판단한 어떤 가치를 기술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아미시파 사람들입니다.

아미시파는 자동차를 타지 않고 마차를 타고 다닙니다. 중앙집중화된 현대 기술에 반대해 자기들끼리 고립되어 살고 있으며 전기도 쓰지 않습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아미시파 가족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아미시파 가족<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런데 기술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기술개발에 열광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거든요. 이들은 기술개발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는 기술을 사용하거나 개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기술적 보수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술적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어 그 변화가 바람직한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시간을 갖자는 것이니까요.

아미시파 사람들은 대체로 19세기 기술을 사용하는 데는 별 저항이 없습니다. 19세기 이전에 개발된 기술은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는 개발이 중단된 19세기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자기들끼리 19세기 기술의 경진대회도 벌입니다. 그렇게 개발한 결과물을 외부 세계에 팔아 돈을 벌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기술은 적극적으로 개발합니다.

반면 버튼을 누르면 바로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통화할 수 있는 전화기 같은 현대 기술은 자신들의 삶과 가치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 거부합니다.

당연히 아미시파 공동체가 공유하는 그 가치를 우리 모두가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기술을 대하는 방식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기술을 우리 삶을 파괴하는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나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만병통치약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택적으로’ 기술개발을 수행하고 기술개발의 방향성에 자신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반영하고자 노력합니다.

아미시파 기술광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기술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효율적인 기술은 항상 좋은 기술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효율성이 우리 사회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일치될 때에만 좋은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판단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관련 함수를 규정해 미분해서 얻을 수 있는 최적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관련된 여러 전문성이 합쳐져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만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사회문제 해결형 과학기술 개발이나 인간중심적 과학기술 개발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노력을 벌이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과학기술 연구가 이런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과학기술 연구가 여전히 분과학문의 전문지식과 해당 분야의 수렴적 · 발산적 상상력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상적이고 단일한 문제, 즉 수학의 정리를 증명하는 일보다는 구체적이고 복잡한 측면이 많은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 한 마을의 농업용수 문제 같은 것은 특정 분야의 ‘지식’을 적용하면 해결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럴 때는 여러 분야 연구자가 모여 문제를 ‘규정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해당 지역에 일정 기간 상주하면서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고 여러 제한조건을 만족시키는 방식은 무엇인지 살펴 상당 기간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답을 찾아야 하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얻은 답을 연구자들이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제시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해당 지역 주민들이 그 답을 납득하고 꾸준히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이런 리빙랩(living lab) 연구 활동이 현재 유럽에서 널리 시행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리빙랩이 시범적으로 수행 중인데 성공률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다학문적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며 연구를 수행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지요.

그러나 21세기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가 추격형 과학기술 개발의 성과를 뛰어넘으려면 이런 연구 경험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 연구자 및 그들과 함께 일하는 다른 분야 전문가들이 과학기술 연구에 필요한 상상력이 ‘선택적’ 방식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과학기술 상상력의 확장 - 21세기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가 가야 할 길 (상상력과 과학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