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상상력’의 원천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8-27 | 조회수 | 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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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 예술 · 인문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는 어떻게 가능한가?
목차‘뛰어난 상상력’을 만드는 네 가지 핵심지난 회까지 우리는 실제 과학기술 연구에서 상상력이 활용되는 방식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저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롭고 신기한 방식으로 과감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천재적’ 연구일수록 해당 연구를 수행한 과학자와 기술자는 수많은 제한조건, 어떤 경우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가지 제한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면서 문제를 풀어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실린더가 차가운 동시에 뜨거워야 한다는 제한조건을 실린더와 콘덴서의 분리로 해결한 와트는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쿤이 말한 ‘수렴적 상상력’의 달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니의 경우처럼 문제 자체를 잘 푸는 능력만이 아니라 자신의 해결책이 정말 좋은 해결책이라는 점을 사회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도, 과학기술 연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라는 심리학자는 과학 · 예술 · 인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들을 오랜 기간 인터뷰해 그들이 발휘한 창의성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연구했습니다. 당연히 분야마다 창의성 혹은 그 분야에 고유한 ‘뛰어난 상상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분야를 가로지르는 전형적 특징은 있었지요. 이제, 칙센트미하이의 그 연구 결과를 지난 회까지 우리가 다룬 이야기와 결합해 창의적 과학기술 연구의 핵심적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핵심 1 비판적으로 읽고 이해한다뉴턴과 아인슈타인을 위대한 성취로 이끌어낸 데는 ‘비판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여기서 ‘비판적’으로 읽고 이해하라는 말은 ‘치밀하게 평가’한다는 말임을 강조해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연구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어떤 면에서 장단점이 있는지, 다른 개념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어떻게 활용할지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것을 ‘비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상의 대화에서는 종종 ‘비판’이 ‘비난’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에 학생들에게 책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라고 하면 대개 이런저런 점이 ‘문제’라는 말을 잔뜩 늘어놓습니다. 물론 책의 단점을 찾는 일도 비판의 일종임은 분명하지만, 비판은 기본적으로 ‘분석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판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 내포된 두 번째 중요한 측면은 ‘다른 내용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그 학자들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용과 연결 지어 따져보는 겁니다. 뉴턴은 대학 시절 선배 학자였던 데카르트의 역학이나 수학 책을 아주 꼼꼼히,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가며 읽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뉴턴은 당대 최고의 자연철학자를 넘어설 수 있었죠. 처음에는 데카르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러고 나서는 데카르트를 넘어선 겁니다.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흔히 아인슈타인은 공부는 못했지만 천재적인 과학자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굉장한 오해라는 점은 이전에 이미 설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실험에 몰두하는 등 다른 일을 하느라 시험공부를 안 했던 것이지, 물리학 이론을 제대로 모르고서야 결코 천재적인 물리학자가 될 수 없죠.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줄 안다는 장점이 있었고, 그래서 자기 연구에 필요한 실험과 이론이 지닌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했습니다. 로런츠라든가 푸앵카레 같은 사람은 기존의 물리학 체계를 어떡하든 그대로 둔 채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죠. 반면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의 구조를 바꿔 재설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좀 더 근본적으로 기여했던 것이죠.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그런 생각을 어느 날 갑자기 해낸 것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은 노트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오랜 기간 이 생각 저 생각을 노트에 정리하면서 시행착오와 오류를 거친 끝에 거기 도달했습니다. 결국 여러 단계를 거치며 기존 이론을 비판적으로 읽는 과정에서 그것에 입각해 새로운 이론을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핵심 2 집요하게 문제에 도전한다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은 분명 대다수 사람들보다는 수학적 능력이나 물리학적 통찰력이 ‘천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진짜 어렵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나 기술자 가운데 문제를 받자마자 손쉽게 척척 그 자리에서 해결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정해진 시간 내에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설정이지요. 뉴턴의 광학 연구가 좋은 예입니다. 뉴턴은 1662년에 케플러의 《광학》을 아주 꼼꼼히 비판적으로 읽고는 장단점을 분석하고 꼼꼼히 주석도 달아가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40여 년 뒤인 1704년에야 자신의 광학 책을 출판합니다. 물론 그사이 뉴턴이 광학 연구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뉴턴 정도 되는 지적 스케일을 지닌 사람조차 실제로 어떤 체계를 바꾸는 혁신적 연구를 수행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인슈타인도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 아이디어를 착안합니다. 스스로 ‘운 좋은 생각’이라고 부른 멋진 아이디어였죠.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대중적 설명을 보면 이 멋진 아이디어에서 (아인슈타인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일반상대성이론을 술술 도출해낼 수 있을 것처럼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 멋진 아이디어에서 완성된 일반상대성이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10년 이상 고통스러운 이론적 탐색 작업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적잖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틀린’ 이론을 자신만만하게 발표하고는 스스로 그 오류를 발견해 다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식으로요. 아인슈타인의 위대함은 이런 뼈아픈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 카드로 17층 탑을 쌓던 사람이잖아요. 실제로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던 마지막 단계에서는 3개월 동안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답니다. 당시 두 번째 부인 에바에게 절대로 연구를 방해하지 말아달라 당부하고, 3개월 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합니다. 그러고는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지요. 일반상대성이론은 우주의 거시적 구조를 경험적으로 잘 설명하는 동시에 수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구조를 지닌 이론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천재라고 해서 그런 이론을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기술 연구에서 정말 뭔가 해내는 능력은 결국 끈기 있게 집중해 얼마만큼 그 연구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창의적 과학기술 연구를 해내려면 머리만큼이나 체력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 오류로 판명이 날 때 그 좌절감을 이기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멘탈’도 정말로 중요합니다. 역시 연관된 이야기인데, 경쟁의 압박감에 짓눌리지 않고 이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능력도 중요하죠.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최종적 형식을 얻는 과정에서 자신보다 수학적으로 훨씬 뛰어난 당대 최고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과 경쟁했습니다. 몇 달 간격으로 상대방을 뛰어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할 정도로 두 사람의 경쟁은 치열했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은 경쟁에서 밀리지 모른다는 조바심과 초조감으로 정작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뛰어난 과학기술적 창의성을 발휘한 과학자나 기술자는 바로 이런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경쟁자보다 조금 먼저 최종 결과에 도달합니다. 마르코니도 상용 무선통신 개발을 두고 벌어진 경쟁에서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해 앞서 나갈 수 있었잖아요. 핵심 3 주의 깊게 관찰한다일반적으로 창의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창의적인 사람도 당대 동료 과학자가 전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창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상과 이론에 대한 지식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측면에 주목할 줄 알았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도 빛의 속도가 일정하게 측정된다는 사실은 20세기 초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맥스웰 방정식과 뉴턴 역학이 서로 모순이라는 사실도 알려졌고요. 아인슈타인만 특별히 아는 실험 결과나 이론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아인슈타인만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는가? 다른 학자들과 달리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재규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새로운 관점을 통해 이전까지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던 사실들 사이의 ‘숨겨진’ 연관 관계를 파악해내는 일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여기서 ‘숨겨진’ 연관 관계란 누가 일부러 숨겨놓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개별 사실만 보는 데 비해 아인슈타인처럼 뛰어난 ‘과학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연관 관계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숨겨진’ 연관 관계를 본다는 것은 굳이 어려운 과학 내용을 소개하지 않더라도 뛰어난 추리소설 한 편만 읽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미리 치밀한 구성에 따라 펼쳐놓은 것이긴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소설 앞부분에서 혼란스럽게 제시된 여러 단서나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들이 홈스 같은 창의적 상상력이 넘치는 탐정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되면서 ‘숨겨진’ 연관 관계가 설명되잖아요. 이 과정을 읽어나가다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탁월한 과학적 상상력이 발휘된 창의적 과학 연구 결과도 정확히 이런 느낌을 줍니다. 핵심 4 다양한 자원을 종합한다우리는 이공계 출신은 글을 못 쓰고 인문사회계 출신은 과학을 싫어한다는 전형적 이미지에 익숙합니다. 한편 융합 연구를 강조하는 사람 중에는 공대생이 인문 고전을 한 편 더 읽으면 연구 실적이 곧바로 올라갈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두 생각 모두 사실과 맞지 않는 과장입니다. 과학기술 연구를 포함해 모든 전문적 학술 연구를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골고루 공부하는 것은 본인의 즐거운 지적 생활에 좋을 수는 있어도 창의적 과학기술 연구에는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주제나 지식을 빠른 속도로 학습하고 그 상황이 제공하는 기회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공대를 졸업해 관련 기술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상품 판매 쪽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면 그 기회에 자신의 기술 개발에 마케팅 쪽 시각을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은 긴요한 작업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경험을 생산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물리학 연구를 수행했듯 의외의 지점에서 자신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시각이나 방법을 터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위대한 업적을 낸 과학기술자의 생애를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연구 이전에 그 업적을 쌓는 데 필요한 능력 · 지식 · 관점을 익힐 기회가 있었고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니만 해도 어렸을 때 화학 및 전기 실험을 마음껏 해볼 기회가 있었고 부모님을 통해 사업 경험도 쌓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자원을 다 동원해야 ‘천재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성적 좋은 것만으로는 성공적인 과학기술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 근무할 때 꾸린 소규모 공부모임이 있었습니다.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거창한 이름의 모임이었죠. 아인슈타인은 이 모임을 좋아했습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음 날 올림피아 회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누가 틀린 점을 지적해주면 다시 고민하고 또 검증받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인슈타인 스스로도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정합적으로 정리되는데 올림피아 아카데미 동료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회고할 정도입니다. 그럼 올림피아 회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을까요?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드는 데 건설적 비판을 할 정도였으니 상당히 뛰어난 물리학자이거나 최소한 물리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 자연과학자나 공학자일 것이라 짐작되지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론 수학자가 한 사람 있기는 했는데 정말 순수 수학을 하는 사람이라 물리학에 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철학 · 문학 · 경영학 등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아인슈타인에게 물리학이라는 측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올림피아 아카데미가 아인슈타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대체로 ‘연구자’들은 자기 전공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 다른 전공 분야의 견해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공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할 때면 자신의 전공 내용에 입각해 틀린 점만 찾으려 들죠. (자기 전공 기준으로) 상대방이 틀린 이야기를 하면 그다음부터는 아예 귀를 닫아버립니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도 모르면서 무슨 의견을 내겠다고 해!” 하는 식이죠. 하지만 다양한 자원을 종합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는 그 분야 사람들로부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외려 자기 손해인 겁니다. 다른 분야 사람들이 내 분야 지식에 무지한 건 사실 당연한 일이잖아요. 아인슈타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점이 훌륭한 거죠. 아인슈타인은 복잡한 수학적 내용이 담긴 어떤 수식을 만든 다음, 철학자나 다른 분야 연구자들에게 말해줍니다. 듣고 있던 이들이 잘 모르는 분야니까 좀 더 설명을 해보라고 해요. 그럼 아인슈타인은 “아, 이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하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시간이랑 공간이 이렇게 되는 것이고 하는 식으로 대강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면 철학자가 거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물론 물리학적으로는 틀린 이야기죠. “시간이 꼬여 있다는 거야? 시간이 어떻게 꼬여 있어? 대체 어떻게 시간이 다른 시간하고 접촉을 해?”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성미 급한 사람이면 대개 짜증부터 낼 겁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런 경우를 다른 분야 전공자들이 자신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파악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모르면서 뭔가를 지적하면 그 입장에서 거꾸로 생각해봄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전공 안에서 볼 때는 못 보던 것들이 그때 보이는 거죠.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의견을 헛소리로 흘려듣지 않고 ‘자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상황을 검토할 기회를 가진 덕분에 개념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형태의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융 · 복합 연구가 잘 안 되는 건 바로 이런 태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문가주의’에 지나치게 갇혀 있다고 할까요. 다른 분야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거나 뭔가를 언급할 때 그들이 개념조차 부정확하게 쓴다며 답답해하는데, 그러기보다는 다른 분야에서는 이 개념을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하며 그 이면을 통찰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성장할 수 있어요. 다양한 지적 배경에서 열린 마음으로 여러 자원을 활용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종국에 가서는 마르코니처럼 거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칙센트미하이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창의적 인물은 활력과 조용한 휴식, 명석한 면과 천진난만한 구석, 장난기와 극기 혹은 책임과 무책임이 혼합된 모순된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도 여러 번 강조하게 되는데, 저는 지금 모든 분야에 두루 박식한 사람이어야만 창의적일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다양한 분야와 교류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하지만,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장난도 치고 재밌게 놀기도 해야 하는 겁니다. 책임과 무책임, 상상 및 공상과 현실에 뿌리박은 의식 사이를 오갈 줄 아는 것이 정말로 중요해요. ‘재능에 안주하지 않는’ 천재 피아니스트 키신예브게니 키신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소위 말하는 전형적 천재입니다. 키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보면 천재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가 다 나타납니다. 두세 살 때 누가 피아노곡을 흥얼거리면 그걸 외워서 따라했다든지 네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보통 몇 년에 걸쳐 배우는 연주를 두세 달 만에 끝냈다는, 아주 전형적인 이야기죠. 그런데 키신은 천재적 재능을 가진 음악가인 동시에 천재적 업적을 쌓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키신이 언젠가 내한 공연을 하러 왔을 때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를 읽고 꽤 놀랐습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다른 나라 연주 여행을 갈 때는 대개 이틀 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도착한 첫날은 피곤하니까 쉬고, 그다음 날 하루 종일 연습하고, 셋째 날 연주를 하고, 그다음 날 바로 떠나거나 하루쯤 관광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 보통 일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키신은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사흘 전에 도착한다더군요. 자신이 최상의 연주를 할 수 있을 때의 감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 연주 횟수를 제한할 뿐 아니라 다른 피아니스트보다 하루나 이틀 전에 미리 간다고 합니다.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연습을 충분히 하는 겁니다. ‘천재’ 소리를 듣는 키신이지만, 자기 스스로 어마어마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인터뷰에서 키신은 한국에 온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호텔로 왔고 연습하느라 호텔 바깥으로는 거의 나가본 적이 없어 한국에 대해 아직 잘 모르니 연주회가 끝난 뒤 하루 이틀 머물면서 한국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대답합니다. 보통은 “아, 한국 사람들 활기차고 다이내믹하게 느껴진다. 거리가 아름답다.” 정도로 적당히 둘러대기 십상인데, 그 순간에도 진솔히 이야기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키신이 연습과 노력으로 ‘훌륭한 연주’를 선보이듯, 과학기술 연구자들도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앞서 설명한 여러 능력과 상상력을 가꾸고 활용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쏟아야만 ‘훌륭한 연구’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뛰어난 상상력’의 원천 혹은 비결은 바로 그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뛰어난 상상력’의 원천 - 과학 · 예술 · 인문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는 어떻게 가능한가? (상상력과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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