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영혼론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8-24 | 조회수 | 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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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신체는 분리될 수 있는가
목차56개의 천구들형이상학에 이어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영혼론에 대해 알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천계론(On theHeavens)〉과 〈생멸론(On Generation and Corruption)〉 등의 저서를 통해 자신의 우주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한다. 당대의 다른 많은 철학자들처럼 그 역시 우주를 거대한 구체(球體)로 생각했다. 우주의 중심에는 지구(地球)가 있고, 그 주위를 해 · 달 · 별 등 여러 천체가 박힌 다수의 투명한 천구가 회전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구는 자전도 하지 않고 공전도 하지 않는다. 즉, 지구가 붙박이라는 전제 하에 천체들의 움직임을 이론화한 셈인데, 이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가 등장하기 전까지 서구에서 우주론의 지배적 이론으로 군림하게 된다. 여러 겹의 투명한 천구들로 이루어진 우주를 그는 달 위(superlunary)와 아래(sublunary)의 두 영역으로 나눈다. 이 중 〈천계론〉이 달 위의 천체들을 다룬 책이라면1), 〈생멸론〉은 달 아래 지상의 사물들을 다룬 것이라 할 수 있다.2)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두 세계는 애초에 이루어진 재료부터 다르다. 먼저 달 아래 세계에 있는 사물들의 재료는 물 · 불 · 공기 · 흙이다. 달 아래 사물들은 이 네 원소의 결합을 통해 생성되고 그 결합의 해체로 소멸한다. 반면, 달 위쪽의 천체들은 제5의 원소, 즉 순수하고 신성한 재료인 ‘에테르’로 이루어진다. 그 덕분에 천체들은 아득한 태고로부터 까마득한 미래까지 생성하거나 소멸함 없이 늘 같은 모습으로 같은 운동을 계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5원소<출처: https://pics-about-space.com/> 아리스토텔레스는 달 아래 지상의 사물들을 이루는 4원소의 성질을 온도와 습도의 조합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물’은 차갑고 습하고, ‘불’은 뜨겁고 건조하며, ‘공기’는 뜨겁고 습하고, ‘흙’은 차갑고 건조하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이 중에서 차가운 원소인 물과 흙은 무겁고, 뜨거운 원소인 불과 공기는 가볍다. 그리하여 흙과 물은 아래를 향하고, 공기와 불은 위를 향한다. 이 때문에 달 아래 지상의 사물들은 위아래의 직선운동을 하게 된다. 바위가 비탈에서 굴러 떨어지고, 하천이 낮은 곳을 찾아서 흐르며, 불길은 위로 치솟고, 수포는 허공으로 증발한다. 그렇게 증발한 공기는 새벽에 다시 차가워지면 나뭇잎 위에 내려앉아 이슬이 된다. 4원소가 위아래의 직선으로 움직이므로 이상적인 경우 지구는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중심에 흙이 있고, 그것을 물이 감싸며, 그 주위를 대기가 감싸고, 그 바깥을 불이 감싼 모습이다. 하지만 달 아래 세계에서 4원소는 서로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고 매우 복잡한 방식과 비율로 서로 뒤섞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달 아래 세계에는 두 부류의 운동이 존재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돌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따른 ‘자연적’ 운동이지만, 돌을 집어 하늘 높이 던지는 것은 낮은 곳을 향하려는 사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강제적’ 운동이다. 달 아래 지상에는 이 두 운동이 모두 있어서 사물들의 외형과 운동이 불규칙하다. 한편, 달의 위쪽으로는 태양과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들이 박힌 55개의 투명한 천구들이 겹겹이 펼쳐진다. 이 천체들은 가장 완전한 존재들로, 그 움직임이 달 아래 있는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첫째, 천체들의 운동은 영원하다. 즉, 움직였다 멈추었다 하는 지상의 사물과 달리 끝없이 움직인다. 둘째, 천체들의 운동은 완전하다.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지상의 사물들과 달리 늘 규칙적이고 주기적인 회전운동을 한다. 셋째, 천체들은 외형도 완전하다. 불규칙하게 생긴 지상의 사물들과 달리 완전한 형태인 구형(球形)을 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들이 가멸적인 지상의 사물과 달리 순수하고 신성한 재료로 이루어졌으리라 추론했다. 그 재료가 바로 에테르다. 한편, 하늘을 돌아다니는 여러 행성이 박힌 55중의 투명한 천구들의 바깥쪽에는 수많은 항성들, 즉 붙박이별들이 박힌 쉰여섯 번째의 천구가 또 존재한다. 이 천구는 비교적 느린 속도로 하루에 한 번 천천히 회전한다. 우리는 이를 지구의 자전으로 설명하지만, 고대인들의 눈에는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 전체가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 눈에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쓸데없이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당시 그의 우주론은 관념적 스케치 수준을 넘는 기능적 모델로, 실제 별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존재자는 (다른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지거나 스스로 움직인다. 움직여지는 것의 원인은 (그것을) 움직이는 것일 테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대체 ‘왜’ 움직일까? 여기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자의 존재를 상정한다. 원동자는 다른 것들을 움직이되 그 자체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왜? 만약 그것마저 움직인다고 할 경우 다시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를 찾아 무한소급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를 그는 ‘신과 같은’ 존재라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하늘을 회전하는 56개의 천구들은 (최초의 원동자 외에도) 같은 수의 개별적 원동자들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는 종종 ‘신’과 동일시되곤 했다.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최초의 원동자를 유일신으로, 56개의 천구를 움직이는 개별적 원동자들을 천사로 해석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퀴나스처럼 원동자를 신이나 천사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여긴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원동자는 모종의 비물질적 정신으로, 훗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말하는 ‘절대정신’에 가깝다. 예를 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면서도 원동자가 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물이 움직이는 것은 제 안에 내재한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원동자는 이미 자신의 잠재성(dynamis)을 완전히 실현한 상태(energeia)라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 원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움직인다면 아직 뭔가 실현이 덜 되었거나 아직 뭔가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원동자는 완전무결한 존재라 부족한 뭔가를 채우려고 자신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여기서 자연스레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그럼 원동자는 ‘무엇’을 하는가?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동자가 오로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완전무결한 존재인 자기 자신뿐이다. 그리하여 원동자는 그 영겁의 시간을 자기 자신을 관조하면서 보낸다. 그의 말대로라면 원동자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다. 원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달 위에서는 천체들을 움직이고, 달 아래에서는 지상의 모든 것을 움직인다. 그런데 움직이지도 않는 원동자가 어떻게 다른 것들을 움직일 수 있을까? 즉, 어떻게 다른 것들이 하는 운동의 ‘원인’이 될 수가 있을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원인을 형상인 · 질료인 · 작용인 · 목적인의 네 가지로 구분한 것을 안다. 원동자가 다른 사물이 하는 운동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태엽을 감아 시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그 운동의 ‘작용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원동자는 행동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고 오로지 생각만 하는 존재가 크랭크축을 움직여 하늘에 있는 56개의 천구들을 회전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원동자가 다른 사물이 하는 운동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것이 그 운동의 ‘목적인’이 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제 안에 내재된 어떤 목표 혹은 목적의 실현을 위해 움직인다. 그것들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여 완성에 도달하려는 욕망이다. 예를 들어, 동식물은 되도록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하려 한다. 인간 역시 인간으로서 잠재적 소질을 최대한 발현하며 살아가려 한다. 가령 군인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군인이 되려 하고, 학자라면 누구나 최고의 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달 위의 천체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가장 완전한 도형인 구형의 모습으로 가장 완전한 운동인 회전을 하려 한다. 목적론적 세계관<출처: https://form.daareyn.org>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잠재성을 완전히 실현하고 싶어 한다. 도토리가 제 안에 내재된 상수리나무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싶어 하듯이, 인간은 사유 · 언어 · 제작 능력 등 ‘인간’의 유적(類的) 본질을 완전히 발현하고자 한다. 모든 사물이 가진 이 욕망의 근원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다. 원동자는 자신의 잠재성을 완전히 실현한 존재로서 세상 모든 것에게 닮아야 할 모범이 되어준다. 모든 사물은 원동자처럼 제 잠재성을 완전히 실현하고 싶어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끝없이 움직인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게 원동자는 도달해야 할 ‘목적’이다. 이렇게 그것을 향해 움직여야 할 목적을 제시함으로써 원동자는 세계의 모든 것을 움직이게 된다.3) 여기서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최초의 원동자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 역시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원동자는 개념상 ‘비물질적인 정신’, 즉 그 어떤 질료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형상이다. 결국 이 세상에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는 얘기인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세운 원칙인 ‘형상과 질료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에 위배된다. 과연 형상이 질료에서 떨어져 혼자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명확한 답변을 남기지 않았다. 영혼론비슷한 문제가 〈영혼론(On the Soul)〉에서도 제기된다.4) 그리스어로 ‘영혼(psyche)’은 ‘숨 쉬다(psycho)’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낱말로,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기준이자 생물을 살아 있게 해주는 원리다. 플라톤은 영혼이 신체에서 분리된다고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신체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형상과 질료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밀랍과 그 위에 새겨진 각인의 관계에 비유한다. 그 둘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듯이 ‘영혼과 신체가 하나인가?’ 하는 질문은 애초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그 자체가 신체인 것도 아니다(414a19-215)). 굳이 말하자면 영혼은 신체의 형식 혹은 형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다.”(415b10) 영혼은 삼중의 의미에서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 된다. 첫째, 영혼은 신체의 작용인이다. 그것은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이다. 둘째, 영혼은 신체의 형상인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신체에 형태를 부여한다. 셋째, 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목적인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연적 신체들은 영혼의 도구”다. 여기에는 4원인 중 하나인 질료인이 빠져 있다. 영혼의 원인으로서 질료인이 빠진 것은 “영혼은 형식 또는 형상이지 질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질료는 자연적 신체의 원인일 뿐, 생명의 원인인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실체의 제1현실태”로 정의한다(412a29-30). 일반적으로 생명체는 섭생 · 감각 · 욕구 · 이동 · 사유 능력을 갖고 있다. 어떤 존재가 이 능력들 중 최소한 하나를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다고, 즉 영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위의 정의에서 ‘제1현실태’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말을 안 하는 상태처럼) 당장은 섭생이나 감각이나 이동에 관련된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잠재적으로’ 그것을 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다고, 즉 영혼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영혼의 가장 기초적 기능은 섭생이다. 영양을 섭취하고 번식을 하는 일은 식물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섭생 활동이란 “할 수 있는 한에서 영속적이며 신적인 것에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생물의 수명은 유한하기에 “영속적이고 신적인 것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15b1-8) 식물이 섭생 능력만을 갖는다면 동물은 그 위에 감각 능력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물은 무엇보다도 감각 때문에 생명을 갖는다.”(413b3) 이동 능력이 없어 붙박이 생활을 하는 동물일지라도, 감각을 가진 한 우리는 그들을 동물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근본적인 감각”은 촉각이다(413b5). 다른 감각들은 촉각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촉각은 다른 감각들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들은 시각이나 청각 혹은 후각이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이 동물이라 불리려면 최소한 “가장 필수적 감각”인 촉각은 갖고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감각 능력을 가진 생물은 동시에 상상력과 욕구를 갖는다. “왜냐하면 감각이 있는 곳에는 고통과 즐거움이 있으며, 이것들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갈망도 있기 때문이다.”(413b23-25) 한편, 인간과 그 이상의 존재들(신들)은 그에 더해 “지성과 숙고의 능력”을 갖는다. 섭생 · 감각 · 욕구 · 이동 · 사유 능력 등 영혼의 여러 기능을 나열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에서 “앞선 것은 뒤따르는 것에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한다.”(414b32)라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사유를 하는 존재는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동 능력을 가진 존재는 감각 능력과 욕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능력을 가진 존재는 필연적으로 섭생 능력도 가진다는 것이다. 이를 집합기호로는 ‘사유 능력⊂이동 능력⊂감각 능력과 욕구 능력⊂섭생 능력’으로 표시할 수 있다. 즉, 섭생 능력을 가진 존재의 집합이 상위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을 차례차례 부분집합으로 포함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불멸의 영혼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 구절이다. 영혼의 여러 기능 중 사유 능력을 논하는 대목에서 그는 선뜻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한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영혼과 신체도 분리될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어디선가 영혼과 신체는 밀랍과 각인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사유 능력을 “다른 종류의 영혼”이라 부르며 그것이 예외적으로 사멸하는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혼과 신체의 분리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은 〈영혼론〉 곳곳에 존재한다. “만약 영혼에만 고유한 어떤 기능이 …… 있다면, 그것은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403a11)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혼론〉 III권에서 그는 정신을 ‘수동적 이성(nous pathetikos)’과 ‘능동적 이성(nous poietikos)’으로 나눈다(430a10?14).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사유는 불가능하다(430a25). 둘의 관계를 그는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로 설명한다. 수동적 이성이 외부 대상의 형상이 새겨질 가능성을 가진 빈 서판(tabula rasa)이라면(430a1-2), 능동적 이성은 그 위에 형상이 실제로 나타나게 하는 힘이다. 능동적 이성은 ‘빛’과 같아서, 사물에 잠재된 색이 빛을 받아야 나타나듯이 잠재태로서 수동적 이성은 능동적 이성의 빛을 받아야 비로소 현실태로서 ‘사유’가 된다.(430a16?17) 사유와 감각은 특성이 서로 다르다. 가령 감각은 수동적이다. 우리는 자극이 오면 감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사유는 능동적이다. 생각은 스스로 원할 때에만 할 수 있다(417b23-24). 감각이 우리에게 강제되는 것은 그것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사유를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체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사유란 언제나 외부 세계에 관한 것이기에 외부와 관계를 맺어야 하나, 능동적인 것이기에 동시에 외부 세계와 분리되어야 한다. 이 딜레마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두 부분으로 나눔으로써 해결한다. 사유의 잠재태로서 수동적 이성은 신체와 결부되는 반면, 사유의 현실태로서 능동적 이성은 신체와 분리된다. 즉, 사유의 잠재적 가능성은 우리 신체에 뿌리를 두는 반면, 실제로 사유를 하는 것은 신체와 분리된 어떤 능동적 활동이다. 그 때문에 그는 능동적 이성이 영원불멸하는 반면(430a23?24), 수동적 이성은 가멸적이라고(430a24?25)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생각이 ‘영혼과 신체는 형상과 질료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과 모순된다는 데에 있다. 플라톤의 ‘코라’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동적 이성’의 개념은 그의 형이상학 체계를 위협한다. 영혼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상반되는 두 견해가 존재했다. 가령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병사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그가 영혼을 잃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육신에서 그의 영혼이 분리되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즉, 호메로스 당시에는 영혼이 사멸한다는 견해와 불멸한다는 견해가 공존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이 중 앞의 것을 취하여 죽음과 더불어 영혼도 사멸한다고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뒤의 것을 취하여 영혼이 죽음과 더불어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세계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 두 견해를 종합하여 영혼을 가멸적인 부분과 불멸하는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중에서 플라톤이 불멸한다고 본 것은 바로 ‘정신(nous)’이었다. 영혼에서 감각이나 욕망과 관련된 부분은 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나, 정신만은 신체에서 분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다시 둘로 나누어, 그중 능동적 부분만 불멸한다고 말한다.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의 것에 비하면 영혼에 대한 관념이 훨씬 더 세속화한 셈이다. 하지만 비록 일부라 하더라도 영혼이 신체에서 떨어져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영혼과 신체가 형상과 질료처럼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그 자신이 세운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런데 그는 왜 굳이 자신의 형이상학을 위험에 빠뜨려가면서까지 이성의 일부를 가멸적 신체에서 분리시키려 했을까?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는 그가 플라톤의 초월적 철학과 대결하면서도 여전히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6) [네이버 지식백과] 우주와 영혼론 - 영혼과 신체는 분리될 수 있는가 (철학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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