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기억 공간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9-14 | 조회수 | 127 |
---|---|---|---|---|---|
신사 참배보다 경제원조에 더 신경 쓰던 시절1978년 8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우경화의 계절”이라는 제목 아래 당시 일본 수상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다룬 기사를 3면에 싣고 있다. 후쿠다 수상은 공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관용차를 타고 가서 방명록에 수상이라는 직함을 써넣어 공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등 일본의 우경화가 우려된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머리기사의 중요성을 지닌 1면이 아니라 여타 국제면 기사들과 더불어 3면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더구나 3면 바로 옆에는 ‘대일 무역역조’를 다룬 더 긴 기사가 실려 있어,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 기사는 중요도에서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 정작 1면에는 한국에 대한 경제 지원이 필요하다는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주한 일본 대사의 교도통신사(共同通信社) 회견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런 배치만으로도 당시 어떤 기사를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다.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보다는 ‘대일 무역역조’나 일본의 ‘대한 경제원조’ 등 한일간의 경제 관계가 더 중요한 현안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디지털화된 《경향신문》이나 《매일경제》에는 신사 참배가 아예 언급조차 없다. 1980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일본 수상이 제주(祭酒)를 받아들고 있는 사진을 간단한 설명과 함께 싣고 있다. 《경향신문》과 《매일경제》는 마찬가지로 관심이 없다. 신군부의 계엄 통치라는 급박한 국내 정세를 감안한다고 해도, 일본 수상의 신사 참배에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당시 한국 언론의 태도는 놀랍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주변국의 비판적 여론을 의식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대신 공물료를 보낸 것조차 비판적으로 기사화된 2018년 8월 15일자 언론 기사들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82년,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이 탄생하다동아시아에서 이웃 국가가 어떠한 기억 문화를 만들고 있고, 어떠한 역사 교과서로 과거를 배우는가 등에 관심이 높아진 데는 1982년이 분수령이었다. 이 해에는 일본의 침략 사실을 축소하고 과거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교과서 검정 원칙이 수정되고, 군국주의적 과거를 미화하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 같은 영화가 나오고, 평화헌법 개정 논의가 공공연히 이야기되고, 스즈키 수상이 16명의 각료를 데리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특히 난징대학살을 우발적 사건으로 주변화하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수정주의 역사 교과서와 일본의 우경화를 추동하는 신우익의 대두 등은 파장이 커서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타이완, 타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홍콩 등에서도 강력한 항의와 격렬한 반일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이후 해마다 8월이면 동아시아의 공론장에서 일본의 수정주의 교과서 문제나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가 불거졌고, 이 소식은 한국 신문들의 1면을 장식했다. 이웃의 첨예한 비판과 우려에 대해 일본 우익 역시 격렬하게 반응했다. 역사 교과서는 일본의 주권 문제이므로 교과서 비판은 내정간섭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1986년 일본의 우익 의원 모임인 ‘국가기본문제동지회(?家基本問題同志?)’의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는 당시 이규호 주일 대사를 예방한 자리에서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의 역사 교과서나 신사 참배 문제 등에 대한 내정간섭을 중단하지 않으면 언젠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가메이 의원은 일본 역사 교과서에 대한 이웃 나라들의 비판과 수정 요청을 ‘내정간섭’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한 · 중 · 일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각국의 기억이 서로 참조하고 간섭하며 얽히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일본 사회의 공식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국내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일본의 내부 문제였을 뿐이다. 수정주의적 역사관이 일본 교과서에 도입된 것은 이미 1955~1956년의 교과서 검인정 지침을 통해서였다. 이 지침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대해 나쁜 점은 쓰지 말고, 태평양전쟁으로 아시아 각국이 서양 식민주의자들에게서 독립했다는 점을 강조하라고 유도했다. 그 결과 난징대학살에 대한 서술이 사라지고, 천황의 종전 결단이 강조되는 등 보수주의 권력 집단의 입김이 교과서 서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55년판 중등학교 교과서 《새 사회》에서 사용된 ‘침략’이라는 용어가 1962년에는 ‘진출’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된 것 등이 대표적 예이다. 1982년에 개정된 역사 교과서 검정 지침에서 특히 문제가 된 것이 난징대학살, 731부대, 강제징용, 3·1운동, 오키나와에서 강제된 집단 자살 등이었는데, 이 문제들은 실상 그해에 처음 불거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교과서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데 유독 1982년 들어 그리 시끄러웠던 이유는 아시아 이웃들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이 나빠진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감수성이 더 예민해진 것이다.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의 검인정 교과서 재판에서 보듯이 어떤 교과서로 어떤 역사를 가르치든 일본의 국내 문제였지만, 1982년 이후에는 동아시아의 문제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아시아 ·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공식 기억이 일본의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에 배치되자, 과거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예민하고 절실한 동아시아적 기억의 회로를 통과해야 했다. 그것은 일본 국내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억의 트랜스내셔널한 감수성이었다.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실제로 수정주의 사관의 정수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조차도 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지워버린 1960년대 역사 교과서들에 비하면 반드시 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왜곡은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언급을 전제하기 때문에 완전한 부정이나 침묵보다 나쁘다고 볼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이전 교과서들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더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유는 동아시아 기억 공간의 형성과 더불어 아시아 전체에서 과거에 대한 망각이나 왜곡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는 감수성이 훨씬 예민해졌기 때문이다. 시끄러움이 침묵보다 낫다시끄러운 게 침묵보다는 낫다. 침묵 속의 망각보다는 기억의 불협화음이 더 바람직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역사 교과서 논쟁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과거사 논쟁이 더 첨예하고 시끄러울수록 더 희망적이라는 역설은 그 소란이야말로 기억이 망각을 넘어서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의 불일치나 차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차이와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2016년 6월 교토 도시샤 대학에서 나는 강요된 침묵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낀 바 있다. 당시 나는 캐럴 글루크(Carol Gluck)의 초청으로 2016년 아시아학회 연례대회(AAS-in-Asia)의 특별 토론회 “아시아에서 희망의 지평(Horizons of Hope in Asia)”에 토론자로 참석한 참이었다. 미국에서 온 아시아학회 회장, 총무 등과 일본 현지의 주최 측은 개막에 앞서 토론자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으면서 환담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희망의 지평’이라는 회의 주제가 조금 이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기억과 책임의 문제가 한창 뜨거운 현안인데 뜬금없이 ‘희망’을 이야기하자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주최 측에 단도직입적으로 주제 선정 배경과 과정에 대해 물었다. 그들 역시 ‘희망’이라는 주제에 만족하지 않았다. 원래는 ‘기억과 책임’이라는 주제로 대회를 준비했다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제동이 걸렸단다. 대회의 주된 후원자인 일본 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에서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해 난색을 보인 것이다. 일본의 전쟁 책임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질 게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재단의 지도부가 노심초사했던 모양이다. 결국 국제교류기금의 책임자가 기억이라는 주제를 고집하는 한 재정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던 모양이다. 주요 후원자인 국제교류기금이 지원을 철회하면 대회는 무산될 것이었다. 난감해진 주최 측은 타협안으로 후쿠시마의 재앙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희망의 지평’을 제시했고, 이에 국제교류기금이 동의해 대회는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기억’이 반드시 ‘희망’보다 좋은 주제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어쩐지……” 하고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일본 국제교류기금은 권력에게서 자유로운 동아시아의 예외적 학술 지원 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아쉬움을 떨구기 어려웠다. 함께 도시락을 먹었던 일본통 몇몇은 이구동성으로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래 국제교류기금뿐 아니라 학술 지원과 관련한 정부의 통제가 점점 심해졌다고 했다. 학문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일단 심각한 문제지만, 힘이나 돈으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아베 정권의 생각이 더 큰 문제였다. 과거사에 대한 책임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방관자든 그 시공간에 살았던 사람들, 그 사건을 일으키고 개입한 사람들의 몫이다. 엄밀히 말하면 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의 잔혹사에 대해 아베와 같은 전후 세대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일본의 식민주의적 잔학 행위는 그들 대부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거나 너무 어릴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대한 아베 세대의 책임이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후 세대에게도 과거의 잔혹사를 기억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기억은 과거에 개입하는 현재의 행위이므로 기억에 대한 책임은 현재 여기에서 사는 동시대인들의 몫이다. 기억을 회피하는 아베 정권의 방침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특히 식민주의의 결과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의 책임이 더 막중하다고 하겠다. 식민지인들을 강제로 동원해 자본을 축적한 미쓰비시나 미쓰이 등 재벌 기업의 경제적 혜택을 받는 그들은 피 묻은 과거와 연루된 셈이다. 아시아의 이웃들에게 머리 조아려 사죄하는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들보다는 자신들의 역사적 위치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연루된 주체’라는 점을 비판적으로 자각하는 전후 세대가 더 소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가해자를 대신해 용서를 구하는 것도 적절치 않거니와, 이미 죽은 희생자를 대신해 누군가 나서서 용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학에서 볼 때,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민족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용서를 비는 행위는 선대와 후대를 잇는 기억공동체의 기반 위에 전후 민족주의를 재구축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렇게 보면 기억만이 능사는 아니다. 어떤 맥락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따라 그 기억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국제정치의 맥락에서는 일본 지배 엘리트들의 침묵도 문제지만, 사과도 문제인 경우가 많다. 그들이 사과에 미온적인 이유는 일본의 식민주의를 자꾸 서양의 식민주의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 밑에는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당시 주일 미국 대사였던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가 그랬듯이, 일본에게 사과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사과하는 데 인색한 서양 식민주의의 위선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홀로코스트가 아니더라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벌어진 서양 식민주의의 잔혹사와 비교해보면 일본 식민주의는 양반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전향한 하야시 후사오(林房雄)는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의 강제 개항 이래 일본의 근현대사를 ‘백년전쟁’이라고 범주화한다. 이 틀에서는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시베리아 간섭전쟁, 아시아 · 태평양전쟁 등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선 일본의 저항 민족주의 운동으로 해석된다. 후사오류의 해석은 일본 대표단이 인종차별 폐지를 담은 15개 항목을 넣으려고 했던 1919년 파리강화회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 대표단의 시도는 아프리카와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이나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물론 일본 대표단의 의도는 서양 식민주의와 일본 식민주의가 인종의 구분 없이 평등하게 나눠 먹자는 것이었지만,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에게 인종적 평등은 수사만으로도 복음처럼 다가왔다. 1920년대에는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들이 일본 이민자들을 ‘태평양의 니그로’라고 부르며 인종의 경계를 넘는 아프리카-일본계 미국인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도쿄의 인도 4인방” 편 참조) 메이지 시대의 판화들은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건장한 일본인과 피부가 노랗고 바보처럼 움츠리고 있는 중국인을 대비시켜 일본인을 서양인처럼 그리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선전 만화에서 일본군은 밀림에서 밧줄을 타는 철모 쓴 원숭이나 야만인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양과 닮고자 하면 할수록 서양과의 거리를 실감하고 좌절하는, 그래서 상상의 서양과 자기 사회 사이의 간격을 늘 의식하면서 그 거리를 좁히고자 했던 주변부 민족주의의 논리는 근대 일본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서양 식민주의와 어깨를 겨루면서 나름대로 제국을 일구었지만, 주변에 머무르는 ‘서벌턴 제국’이었을 뿐이다. 일본은 가까스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자’는 슬로건에서 보듯이 서양도 아시아도 아닌 어정쩡한 열강이었다. ‘서벌턴 제국’ 일본의 이중성은 1995년 일본 의회가 채택한 종전 50주년 기념 결의안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세계사에서 수많은 식민주의 지배와 침략 행위를 엄숙하게 반성하면서”라는 결의안의 전제에서 보듯이, 일본의 잔학 행위는 식민주의 잔혹사의 일부로 자리매김이 되고, 그나마도 서양의 제국주의와 비교하면 사소한 에피소드에 그쳐 버린다. 제국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진주만 공습은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의 시작이었다. 아시아 ·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 사회의 자기 인식이 ‘포스트 제국’이 아닌 ‘포스트 식민’적 기억으로 구축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기억 전쟁은 ‘포스트 제국’의 기억을 ‘포스트 식민’적 기억으로 뒤바꿔버린 일본의 기억 문화에 1차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 이웃을 침략한 제국의 기억은 사라지고 미국 제국주의의 희생자라는 기억만 남아 있는데, 제국의 과거를 반성하라는 요청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는 비단 ‘서벌턴 제국’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제국의 힘을 욕망한 것은 피식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탈식민주의의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식민주의에 대한 피해의식과 그들과 닮고자 하는 욕망은 실제로 동전의 양면이었다. 어떻게 하면 또다시 식민주의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피식민자들 역시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성찰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의 ‘서벌턴 제국’이 그랬듯이 식민지에서 제국으로 옮겨가려는 꿈을 꾸는 대신 내재화된 식민주의의 가치 체계를 뒤엎는 기억 문화이기도 하다. 국가 권력이 개발의 이름으로 선주민 소수 부족에게 폭력을 행사한 전후 제노사이드의 대부분은 근대적이고 문명화된 식민주의적 욕망의 기억 코드를 내장하고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와 근대 국가를 향한 과정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민주 정부 미얀마군의 로힝야족 학살이 그 좋은 증거이다.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이 제국과 식민지, 가해자와 희생자, 독재와 민주주의의 이분법적 코드를 넘어 21세기의 연대를 위한 기억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몫이다. ‘기억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지난 6개월 동안 30번에 걸친 이 연재 에세이가 기억의 연대를 향한 작은 디딤돌로 기억된다면 그 이상 다행은 없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 - 기억의 연대를 향하여 (기억 전쟁) |
-
이전글
- ‘뛰어난 상상력’의 원천
-
다음글
- 과학기술 상상력의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