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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과학방법론을 바꿔버린 천재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8 조회수 132

뉴턴을 진짜 천재로 만든 두 가지 힘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출처: Wikimedia Commons>

'재능적 천재성'과 '결과적 천재성'

과학 분야와 예술 분야는 모두 '전설적 천재'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 영역입니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수학적 능력을 보여준 천재 과학자라든지 누구나 분명히 인정할 만한 예술성을 발산했던 천재 예술가의 존재를 당연시하죠.

그렇게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들이니 이들 과학자나 예술가는 해당 분야에서 혁신적 상상력을 발휘해 창의적 성과를 낼 테고 그러다 보면 유명해져 결국 현재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과학자와 예술가가 된 것이겠죠?

정말 그런지 한번 따져볼까요? 이 문제를 따져보려면 일단 '천재성'에 대한 개념 분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재적'이라는 형용사를 쓸 때 두 가지 의미가 혼용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천재적'이라는 표현은 개인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천재성은 '타고난 능력'으로 여겨집니다. "머리가 좋다", "타고난 천재다!" 같은 평가가 여기 해당하지요.

이런 의미로 천재적인 사람이, 비록 소수이긴 해도 분명 존재한다는 점을 우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자리 곱셈을 순식간에 해내는 사람이나 처음 배우는 외국어를 단기간에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정말 있거든요. 그들에게 '천재적'이라는 형용사를 쓰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의미의 천재성을 '재능적 천재성'이라 부르기로 하죠.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를, 특히 과학 연구의 맥락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도 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보편 중력의 법칙에서 '천재성'이 번뜩인다고 말하거나 보편 중력으로 우주 만물의 운동을 설명해낸 뉴턴의 과학적 탁월함이 '천재적'이라고 평가할 때가 그렇습니다.

이때 '천재성'이나 '천재적'이라는 말은 특정 과학 연구의 결과물이 후대에 끼친 영향이 굉장히 크고 위대하다는 뜻이지요. 과학자들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천재적이다"라고 말할 때는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적 천재성'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자, 이제 이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우리의 질문을 좀 더 정교한 형태로 제시해보죠.

실제 과학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재능적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결과적 천재성'을 발휘해 더 뛰어난 연구 결과를 산출했을까요?

간단히 대답하자면 답은 "아니요"입니다. 재능적 천재성을 보였던 사람들이 과학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보다 두각을 나타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재능적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과학적 업적을 항상 산출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역은 어떨까요? 결과적 천재성이 번뜩이는 연구를 수행한 과학자들은 모두 재능적 의미에서도 천재였을까요? 그 대답 역시 "아니요"입니다. 과학사에서 우리가 혁명적 연구를 수행한 과학자로 평가하는 과학자들은 당연히 상당히 '똑똑한' 사람들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다수는 재능적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이 점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볼 텐데, 그 전에 천재와 창의성에 대한 수많은 경험적 연구를 통해 잘 알려진 통계적 사실 하나를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흔히 재능적 천재성은 높은 IQ로 측정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가정 자체, 즉 우리의 지적 능력이 단일한 '일반 지능'에 의해 일차원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그 가정 자체가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 가정을 전제하고 각 분야마다 결과적으로 천재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IQ를 살펴보면, 대략 IQ 125를 전후해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IQ 125 정도까지는 머리가 좋을수록 결과적으로도 천재적 업적을 남길 확률이 높아지지만(앞서 지적했듯이 평균 이하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천재적 업적을 남길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습니다), 그 이상이 되면 특정 분야에서 혁신적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여부와 IQ로 측정된 지적 능력 사이에 통계적 관련성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IQ가 125인 사람과 140인 사람을 100명씩 모아놓고 각 집단에서 해당 분야를 혁신적으로 뒤바꿀 연구를 한 사람의 비율을 살펴보니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통계적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이러한 통계는 '재능'이 천재적 성과를 내는 것과 무관하다거나 결국 결정적인 것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노력이라는 말이 아니거든요.

재능과 결과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다만 그 상관관계가 125 근처에서 끝난다는 거죠. 이 사실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재능은 과학적으로 혁명적 기여를 할 수 있느냐 여부와 인과적으로 무관하며, 일단 그 정도로 똑똑하다면 그다음부터는 또 다른 요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또 다른 요인이란 무엇일까요? 천재성과 창의성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이 요인에는 각자가 연구하는 분야에서 어떤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통찰력,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동료 연구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그 중요성을 설득할 수 있는 소통력 등입니다.

《아웃라이어》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IQ를 보유했던 남자 랭건과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오펜하이머를 비교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재능적 천재성의 보유자였지만, 랭건은 그 똑똑한 머리로 퀴즈쇼에 나가 벌어들인 상금으로 먹고살았던 반면, 오펜하이머는 원자물리학의 원리를 끔찍한 무기로 구체화하는 어려운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요.

현존하는 최고 IQ 보유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크리스토퍼 랭건

현존하는 최고 IQ 보유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크리스토퍼 랭건<출처: Wikimedia Commons>

어쩌면 랭건이 '재능' 면에서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가정환경 때문에 과학자가 되기 위한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없었죠. 아무리 어려운 과학 논문도 독학으로 이해할 수 있고 관련 주제에 대해 '혁명적' 연구를 수행했다고 스스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과학 연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연구 결과를 제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과학자로서 암묵지나 통찰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거죠.

뉴턴은 거짓말쟁이?

뉴턴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과학적 창의성'이 논의될 때마다 빠짐없이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뉴턴의 천재성은 그 유명한 '사과 일화'로 요약되죠.

사과나무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래 수많은 사과가 땅에 떨어졌을 텐데 오직 뉴턴만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좀 더 드라마틱한 버전에서는 떨어지는 사과에 맞고!)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법칙을 순식간에 간파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천재적인 모습입니까! 뉴턴의 천재성에 근접하기 어려운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뉴턴의 '사과 일화'는 대략 98퍼센트 거짓입니다. 왜 2퍼센트를 남겨놓았느냐 하면, 뉴턴이 죽기 얼마 전 이 얘기를 조카사위 콘듀이트에게 직접 했기 때문입니다.

뉴턴은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조카딸을 굉장히 예뻐했는데 이 조카딸이 직업도 변변찮은 콘듀이트라는 한량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뉴턴은 조카사위에게 자신의 전기를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합니다. 당시 뉴턴은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자신의 전기를 쓰면 조카사위가 돈을 좀 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카딸에 대한 뉴턴의 사랑은 이처럼 대단했습니다. 자신이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영국 조폐국장 자리까지 콘듀이트에게 물려줄 정도였지요. 평소 성격이 괴팍해 핼리나 로크 말고는 학자들과도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던 뉴턴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뉴턴은 콘듀이트에게 자신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흑사병이 돌아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고향 울소프로 내려가 우주의 신비에 대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지구가 끌어당겨서 사과가 떨어졌음을 깨닫고 이 영감을 바탕으로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천재의 영감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그 후 널리 퍼져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뉴턴의 고향 울소프에 가면 '뉴턴의 사과나무'로 알려진 나무가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뉴턴이 재직한 트리니티 칼리지에도 뉴턴의 사과나무가 있어 역시 일 년 사시사철 뉴턴의 역사적 경험을 후체험하려는 사람들의 사진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뉴턴의 고향 울소프의 관광 명물이 된 사과나무

뉴턴의 고향 울소프의 관광 명물이 된 사과나무<출처: Wikimedia Commons>

뉴턴이 직접 한 이야기는 맞지만 뉴턴의 이 '사과 일화'가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뉴턴이 직접 남긴 모든 기록의 내용과 이 일화가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뉴턴은 요즘 말로 하자면 비판적 책읽기와 연구 노트 작성에 탁월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책이건 그 내용을 그대로 흡수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러저러한 결과가 도출되어야 하는데 책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그와 반대되는 주장이 나오므로 정합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판적으로 책을 읽었죠.

뉴턴이 남긴 저서를 보면 예외 없이 그가 쓴 비판적 메모가 여백에 빽빽하게 적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뉴턴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생각이나 연구 과정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아주 꼼꼼히 기록해두었습니다.

당시는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으니 요즘 우리처럼 하얀 백지에 기록을 남긴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다른 용도로 이미 썼던 종이, 예컨대 영수증 뒷면 등을 알뜰히 재활용했어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뉴턴 아카이브에는 뉴턴이 남긴 평생의 연구 기록이 방 안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뉴턴을 연구하는 학자 중 그 기록을 모두 읽어본 사람은 극소수인데, 그중 뉴턴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한 웨스트폴(Richard Westfall)은 뉴턴이 20대에 만유인력 법칙이나 역학 법칙을 발견했다는 어떤 증거도 그의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증거가 단순히 '없기만' 한 게 아니라 기록에 드러난 청년 시기의 뉴턴은 그 어떤 매개도 없이 '힘'이 서로 떨어진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생각 자체를 하리라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운 지적 성향을 보였다는 겁니다. 웨스트폴은 어째서 이런 결론을 내게 되었을까요?

젊은 시절 뉴턴은 '데카르트주의자'였다

젊은 시절 뉴턴은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뉴턴 당대에는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그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자연철학'이라 칭했습니다. 과학(science)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오늘날과는 달리 개별적 지식의 총합인 '분과학문'을 뜻했죠. 사실 과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이언스(science)의 원뜻을 번역한 말, 즉 분과학문을 줄인 말입니다.

현재의 학문 기준으로 보면 뉴턴은 과학자이고 데카르트는 철학자인데 뉴턴이 데카르트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당대 최고의 자연철학자였습니다. 데카르트가 저술한 역학과 기하학 책은 뉴턴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 그 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연구서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런 데카르트의 책을 뉴턴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꼼꼼히 자신의 생각을 적어가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흔히 기계철학(mechanical philosophy)으로 알려진 방식으로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연구했습니다.

데카르트 기계철학의 핵심은 인간의 정신만 빼놓고 세계의 모든 현상을 물질의 운동과 충돌로만 설명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세상은 아주 작은, 여러 종류의 입자로 가득 차 있어요. 그 작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서로 부딪치면서 세상의 모든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거죠.

이런 데카르트적 세계에서는 뉴턴의 만류인력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르면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에 비례하는 힘으로 서로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물체들은 왜 서로를 끌어당길까요? 뉴턴 역학은 그에 대한 답은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런 힘이 있다고 가정했을 뿐이죠.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에서 이런 설명은 제대로 된 과학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자연철학은 모름지기 자연현상의 원인을 설명해야 하며,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질 현상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아주 작은 입자의 운동과 충돌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비한 힘'을 끌어들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자연철학적으로 제대로 된 설명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런 생각은 데카르트의 입자철학에 동의하지 않았던 자연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공유되던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와 여러 면에서 다른 생각을 가졌던 라이프니츠조차 뉴턴의 '힘' 개념은 초자연적 신비주의에 해당한다며 비판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젊은 시절 뉴턴의 연구 노트에는 원격작용(action-at-a-distance)에 관한 어떤 언급도 담길 수 없었습니다. 대신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생각은 뉴턴이 오랜 기간에 걸쳐 데카르트의 입자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물로서 서서히 등장합니다.

뉴턴은 분명 지적 능력과 열정, 끈기 등 다양한 차원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만유인력 법칙이 결과적으로 '천재적' 작업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뉴턴조차 다른 모든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10여 년간 다양한 착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만유인력 개념과 그 규칙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의 천재적 업적은 결코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천재적 영감'이 떠오른 덕분에 나온 게 아닙니다. 물론 젊은 시절 울소프에서가 아니더라도 분명 뉴턴은 특정 시점에 특정 공간에서 만유인력에 관한 영감을 떠올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 영감을 개념적으로 정교하게 가다듬고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관련 증거를 수집해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뉴턴은 더 많은 시간 동안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과학 연구에서 상상력이나 영감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그 영감이 과학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려면, 엄밀하게 정돈된 개념과 논문으로 동료 과학자들의 비판적 검토를 통과해 궁극적으로는 후속 세대를 교육하는 교과서에 실려야 합니다.

이 과정을 완수하려면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도 시간과 노력이 투여되어야 합니다. 과학 연구가 노동집약적 활동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뉴턴은 콘듀이트에게 도대체 왜 사과 얘기를 했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데요. 유력한 추측은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의 우선권 논쟁을 의식해서 그랬다는 설명입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사이의 미적분 우선권 논쟁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을 두고 용수철의 복원력 법칙으로 유명한 로버트 후크(Robert Hooke)와 우선권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습니다.

후크가 만유인력과 유사한 아이디어를 뉴턴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생각해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수학적 능력 면에서 뉴턴만 못했던 후크는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할 수 없었죠. 그러던 중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통해 만유인력 법칙을 제안하자 후크는 뉴턴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주장하죠.

이후 둘 사이는 몹시 나빠졌고, 그래서 뉴턴은 만유인력에 대한 우선권을 확실히 해두고자 케임브리지대 재학 시절 후크보다 먼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공식화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뉴턴이 이런 생각으로 '사과 일화'를 말한 것이라면 뉴턴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상적인 이 일화는 콘듀이트가 쓴 뉴턴 전기 외에도 18세기 계몽사상 시기에 수많은 뉴턴 관련 글에 실리면서 천재적 영감의 대표 사례로 여겨지게 되었으니까요.

아래 그림은 19세기 일본에서 그려진 것인데, 당대 복장을 한 뉴턴이 사과나무 앞에서 골똘히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뉴턴 '사과 일화'의 국제화가 완벽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9세기 일본 삽화에 등장하는 뉴턴과 사과나무

19세기 일본 삽화에 등장하는 뉴턴과 사과나무

과학과 과학방법론을 한꺼번에 바꾸다!

그렇다면 뉴턴은 어떻게 데카르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이 익숙한 과학 연구 방법론에서 벗어나는 일은 대부분의 과학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뉴턴의 천재성은 바로 이 과정에서 돋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뉴턴은 단순히 하나의 과학 이론을 제시하는 데 머물지 않고 과학방법론 그 자체를 바꿨습니다. 그 유명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라는 선언을 통해서죠.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뉴턴 시대에 통용되던 '가설'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요.

뉴턴의 《프린키피아》 사본. 2판을 위한 뉴턴 자신의 수정 사항이 친필로 쓰여 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 사본. 2판을 위한 뉴턴 자신의 수정 사항이 친필로 쓰여 있다.<출처: Wikimedia Commons>

현대적 의미의 '가설'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론 중 아직 검증되기 전 단계의 이론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라면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나 역학 3법칙은, 적어도 뉴턴이 제안할 당시에는 모두 당연히 '가설'입니다. 하지만 뉴턴 시대에 가설은 데카르트적 가설, 즉 눈에 보이는 현상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의 운동과 충돌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것처럼 현상의 원인에 대한 제대로 된 자연철학적 설명이 되려면 데카르트 방식의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해야 했던 겁니다.

만유인력에 대해 뉴턴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설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뉴턴은 물체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가정해 데카르트식으로 만유인력을 설명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했죠. 그래서 뉴턴은 자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힘을 가정해 현상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뿐 그 힘의 미시적 메커니즘은 설명하지 않겠다고, 즉 그 힘에 대한 '가설'은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간단히 말해 당시 자연철학의 표준적 설명 방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뉴턴이 대안으로 제시한 자연철학의 설명 방식은 무엇이었을까요? 경험적 적합성 혹은 당시 용어로는 '현상의 구제(saving the phenomena)'입니다. 즉 어차피 경험적으로도 검증이 불가능한 미시적 가설을 만들어 현상에 대해 무리하게 인과적 설명을 하기보다는 현상의 경험적 패턴을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히 훌륭한 과학적 설명이 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 설명 방식이 결국 데카르트의 입자철학적 설명을 대체해 근대과학의 표준적 설명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렇게 된 데는 뉴턴 역학의 이론적 뛰어남만큼이나 인상적인 경험적 정확성이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비록 과정상 많은 논쟁을 거쳤지만 뉴턴이 임종할 즈음에는 뉴턴이 제시한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철학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유럽 전역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뉴턴 이후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과학적 설명에서 경험적 적합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자명한 것이 되었죠.

그러므로 뉴턴이 진정으로 위대한 이유는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천재적으로 우주 지배 법칙을 떠올린 데 있지 않고, 천재적 과학 이론을 제시하는 동시에 과학 '하는' 방법까지 바꾸는 큰 변화를 이끌었다는 데 있습니다.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를 훌륭한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데서 멈춘 것이 아니라, '과학적 설명'이라는 것이 꼭 데카르트 방식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도 가능함을, 뉴턴은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뉴턴의 업적은 진정으로 '천재적'입니다. 하지만 그가 순전히 '재능적 천재성'의 측면에서 압도적 천재였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뉴턴은 뛰어난 통찰력과 최고 수준의 과학적 상상력으로 창의적 연구를 수행한 위대한 과학자였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뉴턴, 과학방법론을 바꿔버린 천재 - 뉴턴을 진짜 천재로 만든 두 가지 힘 (상상력과 과학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