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운동의 선봉장에서 제국의 주체로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8 | 조회수 | 177 |
---|---|---|---|---|---|
시기에 따른 유학생 사회의 변화
목차연합학우회에서 제국대학동창회로우리는 ‘일제 36년’이라는 표현에 익숙하다. 이러한 표현은 식민지가 변화 없는 균질적인 시간이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경영에는 부침이 있었고, 식민지인들의 인식도 시기에 따라 변했다.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인식도 1920년대와 1930년대 중후반 이후가 크게 다르다. 두 시기의 차이를 설명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40년도 교토제대동창회 재학생위원장인 현영익은 〈동창회사론〉에서 1920년대 만들어진 ‘재교토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교토학우회)’에서 1933년 ‘교토제국대학조선인유학생동창회(이하 교토제대동창회)’가 분리되는 과정을 정리했다. 현영익은 교토제대 유학생을 지도 세력으로, 교토의 조선인 남녀 학생과 졸업생 전체를 망라한 ‘순수 친목 기관’인 교토학우회가 조직되어 만주사변 전까지 지속되었다고 설명한다. 교토제대 동창회가 따로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사회 풍조였던 학생의 이상주의에 의해서 한 학교 내의 동창회의 필요성이 간과”되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현영익은 만주사변 이후 “교토조선유학생회(교토학우회)도 점점 인원이 증가하여 통제가 곤란해지고 학생의 질적 저하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불순분자의 악이용의 위험성이 가중”1)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태규의 주장으로 1933년 10월 교토제대동창회가 조직된다. 현영익은 교토제대동창회 발생의 이유를 다음 5가지로 꼽는다. “첫째, 교토제대 내에서 자기 친목 기관도 갖지 못하고 직접 학외 친목 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본말전도의 모순이다. 둘째, 학외 운동에 의한 교토제대 학생의 희생을 줄여야만 한다. 셋째, 지식이 균등한 제대생 사이의 학문적 연계 계발을 위해, 즉 진리 탐구의 욕구 때문이다. 넷째, 사회 시국의 중대성에 의한 압력 때문이다. 다섯째, 동서(東西) 각 대학에서 동창회 성립 속출에 의한 자극 때문이다.”2)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군부 주도의 파시즘 국가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치안유지법 등이 강화되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기운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런 시국의 변화와 함께 교토학우회의 운동성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에 따라 제대생들이 학우회로부터 거리를 두려던 분위기가 전해진다. 잘 살펴보면 논리적인 어조를 취했지만, 결국 ‘수준 떨어지는’(!) 여타 학교들과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급이 같은’ 자신들만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민족의식에 눌려 있던 제국대학생의 특권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정식 학부생이 아닌 교토제대 내의 ‘선과생 및 의학부의 전수과생’을 포함시킨 것을 동창회의 “자유평등의 색채가 드러난 것”으로 자화자찬하는 대목은 그래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교토제대 유학생들은 자기들끼리의 자유평등은 용납해도, 학력 차이가 나는 여타의 조선인 학생과는 구별 짓고자 하는 전형적인 학벌 의식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현영익은 1938년부터는 교토제대동창회의 위원장이 전체 교토학우회의 위원으로 가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것은 교토제대동창회를 학우회의 산하 조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비유하자면, 1980~90년대 서울대 총학이 다른 대학과 수준 차이가 난다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에서 탈퇴한 셈이다. 관동대지진과 1920년대의 교토학우회현영익이 ‘순수 친목 기관’이라고 규정한 교토학우회의 실제 성격은 어떠했을까? 교토학우회는 교토제대, 도시샤대, 리츠메이칸대, 도시샤여자대 뿐만 아니라 제3고등학교와 전문학교 및 중학교 등의 유학생들이 망라된 조직이었다. 1926년 당시 교토학우회 회원은 500여 명이었다. 1926년 교토학우회는 집행부 간사로 김철진, 김원규(경제학부), 김말봉, 곽종렬, 도재기(중퇴), 이강호(경제학부), 이종원, 이태규(이학부), 이처옥, 문원주(공학부), 박제환, 임상오 등을 선출했다. 괄호 속에 학부를 표시한 이들이 교토제대 학생들인데 선출직 간사 중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교토학우회가 교토제대 유학생들을 지도 세력으로 했다는 현영익의 주장은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 교토제대 학생들은 도시샤대 유학생들과 함께 교토학우회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제대생이라는 특권 의식은 없었다. 제국대학에 대한 자부심이야 있었겠지만 당대 분위기가 그것을 억눌렀다. 1920년대 유학생 사회는 학력 · 출신 · 계급 등을 뛰어넘는 평등 의식이 강했고, 무엇보다 반일의식이 넘쳤던 시기이다. 그 이유로 우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에는 일본 사회 전체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등의 사상 열풍이 불었다. 그렇지만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한 원인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아니었을까? 관동대지진 당시 약 6,000여명의 조선인 희생자가 있었고, 그중 약 1,000여명이 유학생들로 추산된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식민지 경영을 실패하게 한 근원적 사건으로 보인다. 관동대지진 학살은 조선인의 ‘르상티망’을 형성했다. 1930년대 후반 이래 일본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의무교육, 참정권 등 국민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해줄 것을 약속하며 구애했다. 이러한 제안이 일부 조선인들로부터 동의를 획득한 듯했지만, 신체에 각인된 살해 공포는 무의식에 잔존해 있었다. 이를테면 시인 이상은 수필 〈도쿄(東京)〉(1936)에서 “에드벌룬이 착륙한 뒤의 긴자(銀座) 하늘에는 신의 사려에 의하여 별도 반짝이련만, 이미 이 ‘카인의 말예(末裔)’는 별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라고 썼다. 밤에 번화가 긴자를 둘러보던 이상은 학살자 일본인들을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예로 비판했다. 경험하지 않은 이상도 13년이 지난 관동대지진을 아프게 자각하고 있는데, 직접 학살을 목격하거나 그 직후에 도착한 유학생들의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랴. ‘광주’ 학살을 겪은 1980년대 한국 학생운동이 급진화했듯이 관동대지진의 살육을 겪은 조선유학생 사회는 반일 운동의 첨병이 되었다. 교토학우회의 기관지였던 《학조》 창간호(1926)에 실린 기사에서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의 트라우마가 유학생 사회에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교토학우회에서는 1925년 미야(三重)현 도로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조선인 살해 사건에 간부를 보내 조사하고 아래처럼 보고회를 개최한다. 미야현 혼마치(本町)에서 생긴 동포 살해 사건 비판 연설회를 산조(三條)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오후 7시부터 개최하다. 몰려오는 청중 5백여 명 회장을 철통같이 에워싼 수백 명 경관의 경계리에서 한길수군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본회(학우회), 노동총동맹, 평의회 및 기타 일본인 각 단체의 변사(辯士)들의 열렬한 사자후가 있었으나 거개 중지를 당하고 오후 10시경 무사 폐회하다.3) ‘미야현 동포 살해 사건’이란 1925년 미야현의 도로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조선인 인부 60여 명을 마을의 일본인, 경찰, 소방조, 청년단, 자경대 등 2,000여 명이 공격해서 조선인 2명이 살해되고 2명이 행방불명된 사건이다. 일본인의 공격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다이너마이트 등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인 14명, 일본인 17명이 유죄를 받았지만 사법부는 조선인 측에 보다 가혹한 장기 형벌을 언도했다. 이에 대해 교토학우회는 대표인 곽종렬 등을 조사 위원으로 파견해 미야현 경찰서에 항의했으며 조선인노동총연맹 및 평의회, 일본인 사회주의 단체 들과 함께 규탄 연설회를 개최했다. 《학조》 2호의 학우회 활동 보고에서도 “이태규 군의 긴급동의가 체결되어 만장 회원 일동은 과거 관동대진재 당시에 무참히도 ××된 동포를 위하여 수 분간 일제 기립 묵도를 결행하다.”4)라고 적고 있다. 이후 교토학우회에서 교토제대동창회를 분리하는 데 앞장선 이태규도 1920년대에는 학우회 운동의 핵심 지도부였다. 관동대지진 학살에 대한 분노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학조》와 1920년대 제국대학 유학생의 인식교토학우회의 기관지 《학조》는 1926년 6월 27일 창간호가 간행된 이래 1927년 2호까지만 간행되었다. 창간호에 실려 있는 정지용의 시 〈카페프란스〉 정도만 한국 문학사에서 주목받았을 뿐,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잡지이다. 1, 2호는 공통적으로 권두언, 학술 논문, 창작란 그리고 학우회 활동 기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문은 대부분 도시샤대학과 교토제대 학생들이 각자 전공 학문에 관련해서 쓴 글이었다. 창간호는 부록을 두어 교토제대에서 강의하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야마모토 겐지(山本宣治)가 식민지 통치에 비판적 견해를 밝힌 〈惑畵の話〉 등의 글도 실었다. 《학조》의 필진들은 1920년대 교토학우회가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지닌 유학생들의 연합체였음을 일러준다. 이를테면, 창간호의 첫 논문은 교토제대 문학부 최현배의 〈기질론〉이다. 그 외에 교토제대 농학부 송을수의 〈생물학상으로 본 인류의 장래〉도 실렸다. 송을수는 1927년도 교토학우회 대표였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사상을 지니고 있었고 이후 걸어간 삶의 경로도 달랐다. 한글학자 최현배의 경력을 말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송을수는 교토제대 농학부의 첫 졸업생으로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 신간회 교토지회 간사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위원을 역임했고,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학조》 2호의 필진들도 이렇게 상반되는 이들이 뒤섞여 있다.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를 추앙하며 사회주의 경제학을 추구한 교토제대 경제학부 노동규의 〈역사학파와 심리학파〉와 함께 화학과 이태규와 수학과 신영묵 등의 과학 논문, 나중에 총독부 보안과장이 되는 법학부 한종건의 논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글이 게재되었다.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협동전선을 형성했던 식민지 조선의 신간회 활동처럼, 1920년대 교토에서도 서로 다른 사상을 추구했던 제국대학 유학생들이 교토학우회에서 연대하여 활동한 것을 《학조》 지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을 연대시킨 것은 차별과 직접적인 학살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다. 《학조》에는 정지용의 시를 비롯해 윤심덕과의 정사로 유명한 김우진의 희곡, 카프 작가 권환의 소설, 요절한 작가 유인탁의 희곡과 소설 등 값진 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을 세밀하게 살필 겨를은 없지만 당대 유학생들의 식민지 인식과 울분이 잘 드러난 시 한 편만은 함께 읽고 싶다. 북촌 ‘구영(拘影)’이라는 필명의 시인이 《학조》 창간호에 쓴 시이다. 시인은 초가와 움집으로 가득 찬 서울 북촌을 태양도 뜨지 않는 슬픔과 한숨의 땅으로 그린다. “폭풍과 지진으로 이 동리를 전멸”하라는 저주에 가까운 격정을 쏟아낸다. 그가 바라는 “폭풍”과 “힘세인 바람”은 어쩌면 이 답답한 현실을 뒤집어엎을 ‘혁명’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 혁명이 민족 혁명인지 무산자 혁명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분노는 시대의 감수성이었다. 《동창회보》와 1930~40년대 제국대학생의 인식민족운동, 사회운동과 연관되어 있던 교토학우회의 성격은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급격하게 변한다. 제국대학생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후 식민지인이라는 자각과 운동성은 약해졌고 팽창하는 제국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이 점점 강화되었다. 앞서 현영익이 설명한 교토제대동창회 설립의 과정은 이 상황을 요약한 것이다. 1933년 교토학우회에서 교토제대동창회가 분리되었지만 아직 별도의 잡지는 없었다.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1936년 11월 10일 교토제대동창회가 《경도(교토)제국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회보》(이하 《동창회보》) 창간호가 발행된다. 발간을 주도한 것은 재학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당시 경제학부에 재학 중이던 박병교가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화신 사장 박흥식의 조카다. 잡지 속 광고는 《동창회보》 간행의 돈줄이 어디였나를 보여준다. 첫 페이지의 화신백화점 경성점 · 평양점의 전면광고에 이어서 다음 페이지에는 화신 계열사들인 선일지물주식회사 · 대동흥업주식회사 · 화신연쇄점주식회사 등의 2단 광고가 자리하고 있다. 연이어 동문인 이정래가 운영한 동광당서점과 김연수가 취체역으로 있었던 해동은행 광고가 실려 있다. 잡지의 전체적인 편집은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동창회보》의 특성을 살리면서 학술과 문예를 아우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서두에는 그 해 졸업생과 입학생 사진이 들어가고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 등의 교수 취임 · 박사논문 취득 · 구미유학 기념환송회 사진, 김연수의 교토방문 행사 등 사회적으로 출세한 선배들의 동정과 관련한 사진이 실렸다. 이러한 사진들에 뒤이은 본문 첫 부분은 학술 논문들이 실리는 ‘논원/논설’란이 차지했다. 주로 재학생의 자기 전공 학문과 관련한 글이 실렸지만 간혹 이태규 · 이승기 등의 이공계 논문, 보성전문 상과 교수로 있던 윤행중과 박극채의 경제학 논문, 임헌평 등 법학부 출신 판검사들의 법률 관련 논문 등 학부별 출신 동문들의 전문적인 학술 논문도 실렸다. 논원/논설란 뒤에는 수필 · 기행 · 단상 등의 에세이류와 시, 소설의 창작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 이어서 2호부터는 ‘회원소식’란과 ‘학부소식’란을 만들어서 재학생 및 졸업생 동문과 교토제대 교수 및 학부 근황을 알렸다. 끝에는 회원 명부를 첨부하여 매년 거주지 및 직업의 변화와 생몰을 정리하여 동문 네트워크를 갱신했다. 《동창회보》에 실린 글의 성격이 다양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일괄하기는 어렵다. 지난 번 연재에서 옥사한 사회주의자 선배 박영출을 추모한 유형식의 시와 “채귀의 여행”을 기록한 에세이도 바로 여기에 실렸던 글이다. 이렇게 식민지 현실에 비판적인 글도 있었지만 《동창회보》의 보다 많은 글들은 점점 비정치적인 학술 논문 혹은 제국의 가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1930년대 후반기, 일본이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은 제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환각을 체험했다. 《동창회보》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창간호에 실린 박병교의 〈만주 시찰기〉는 재편되는 대륙의 질서를 체험하며 제국대학의 식민지 유학생이 제국의 주체로 신생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만주 시찰의 출발점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식민지 청년의 일본화된 시선이다. 박병교는 기차를 타고 만주로 향하면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조선의 풍경을 일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에게 조선의 농촌 풍경은 “마치 일본 내지의 산요센(山陽線) 일대와 흡사한” 것으로 포착되며, 압록강을 넘어 도착한 만주 길림은 “조선의 평양, 일본의 교토”로 비유된다. 경제학도인 그는 다양한 통계를 사용하여 만주를 개발한 제국의 비전과 능력을 찬양한다. 그는 조선을 만주국과 분리 불가한 부분이자 무한한 경제적 발전 가능성을 지닌 특수한 곳에 위치시킨다. 만주국 수도였던 신경(현재의 장춘)에서 만난 한웅길, 진양근, 김정수 등 만주의 관료로 옮겨간 교토제대 선배들은 제국의 비전과 “동포를 위해” 투신한 선각자로 호명된다. 여행의 종착지인 하얼빈에 도착한 박병교가 백인 거지를 만나 남긴 다음의 소회는 인상적이다. “내 마음의 한 모퉁이에서 일종의 우월감이 나섬을 어찌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허리 굽히는 백인의 모양을 향락하려는 잠재욕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백인의 걸인만 보면 자진해서 돈을 주다시피 하였다.”5) 식민지의 청년은 제국대학 유학을 통해 일본의 시선을 내면화했고, 다시 그 일본의 콤플렉스인 백인을 경멸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식민지성을 탈피한 보편적 주체의 위치를 획득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항일 독립군과 홍군 등을 고량밭에 숨어 있는 ‘홍비(紅匪)’로 부르며 합리적 제국을 어지럽히는 야만의 적으로 타자화했다. 그의 만주 시찰은 한마디로 제국의 주체로 신생하는 여행이었다. 식민지 유학생회에서 제국의 지방향우회로1939년 제4호부터 《동창회보》는 당국에 의해 그 제호가 “京都帝大朝鮮人留學生同窓會報”로부터 “京都帝大朝鮮學生同窓會報”로 변경된다. ‘留’자를 삭제한 것이다. ‘유학생(留學生)’이라는 개념은 국가 혹은 이질적인 공동체 간의 경계를 상정한다. 과거의 명칭은 ‘조선’이라는 일종의 내셔널리티를 환기시킨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을 균질적인 일본 제국의 한 지방으로 통합하고자 한 당국에서는 ‘留’를 제거하여 무언가 이질적인 조선인 동창회의 성격을 균질적인 제국 내부의 ‘동향회’로 변경시키고자 했다. 새로운 명칭에는 일본의 50여 개 부현들 중 하나인 조선 지방에서 중심(京)으로 유학을 온 학생이라는 뜻이 담겼다. 이름을 바꾸고 한 해 뒤인 1940년 제5호부터 《동창회보》는 일본어로 간행된다. 편집자는 “동창회는 동향 학생의 친목 단체여서 정치 단체는 아니다. 친목이 목적이라면 언어는 일수단(一手段)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로 말해도 좋은 것이다. 언문으로 할 수 없어서 미련이 남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동창회의 지속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일어로 내겠다고 밝히고 있다. 편집 후기를 통해 일본어 간행이 당국의 명령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후기에서 조선어를 빼앗긴 울분은 느끼기 어렵다. 검열을 의식한 때문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조가 지나치게 담담하다. 애초부터 그들에게 조선어는 반드시 지켜야 할 숭고한 무엇이 아니었다. 1920년대 제국대학 유학생들과 달리 그들은 일본어로 자아와 학문을 형성한 세대이다. 심지어 시와 소설 등 가장 예민한 정서도 일본어 글쓰기를 통해 표현하기 시작한 세대들이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라 제국의 동등한 한 지방이라고 선전했다. 제국대학 조선 유학생은 ‘식민지 출신의 유학생’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수재’가 되었다. 식민지인이라는 자의식은 사라졌고, 시골 출신의 수재로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교토제대 법학부 재학생 배영호가 ‘회원소식’란에 남긴 글을 읽어보자. 법과에서 사회 돌입의 가장 현명한 길이 오로지 고문(高文) 통과라고 주위 사방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권설(勸說)을 당하니 고문 자체의 평가는 논외로 하고 법과 출신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고문의 관문을 지나야 될 것 같아서 요사이는 종종 도서관의 손님이 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년의 고문 성적이(우리 동창회 관계로서) 너무나 불량한 것을 보아 설욕의 의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노둔(魯鈍)한 생활자의 일상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도리를 오득(悟得)한 것은 아니지만 여일(如一) 단순한 생활에서 별달리 말씀드릴 신변의 변화는 없는 듯!6) 배영호의 글에서는 식민지 출신의 그늘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자기 지방 출신들의 저조한 성적을 “설욕할 의분”을 느끼며 도서관에서 육법전서를 뒤적이는 시골 수재의 평온한 일상이 느껴질 뿐이다. 그는 1942년 고문 사법과에 합격하고 총독부 판사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 그는 한국의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이제부터 제국대학 출신들의 해방 이후 행적을 따져볼 차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일 운동의 선봉장에서 제국의 주체로 - 시기에 따른 유학생 사회의 변화 (제국대학의 유학생들) |
-
다음글
- 온실효과와 지구 온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