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네 얼굴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8 | 조회수 | 1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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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천재적 과학 연구의 배경
천재소년 아인슈타인?지난번에 살펴보았듯 뉴턴의 천재성은 '떨어지는 사과'보다는 남다른 통찰력과 오랜 과학 연구에서 비롯했습니다. 이번에는 뉴턴만큼이나 과학천재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죠.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알베르트(혹은 나중에 미국인이 되었으니 앨버트) 아인슈타인에 대해, 많은 사람이 그가 상대성이론이라는 과학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꾼 사람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한 사람이니까 이 사람은 보나마나 엄청난 천재였겠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고요. 물론 아인슈타인의 어릴 적 학교 성적이 나빴다는 일화도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 이 일화조차 아인슈타인의 남다른 천재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죠. 워낙 엄청난 천재여서 기존의 교육 과정이나 수준 미달의 교사들은 그 천재성에 걸맞은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식입니다. 이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의 어린 시절이 지극히 평범하기만 하진 않았습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천재적 연구 작업을 해낸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 하나 있죠. 능청스럽고 재치 있는 말을 잘하는 겁니다. 남들을 잘 웃긴다기보다 세상을 약간 비틀어서 보고 그렇게 비틀어서 본 세상과 실재 사이의 차이점을 활용해 재치 있는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동생 마야가 태어날 무렵 아인슈타인은 자기와 놀아줄 새로운 '장난감'이 생길 거라고 잔뜩 기대했다가 정작 작고 힘없어 보이는 아기를 보고는 실망해 "그런데 바퀴는 어디에 달린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인슈타인은 이런 능청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온 가족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거죠. 어쩌면 이 능력이 훗날 동일한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통찰력'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은 다른 아이들을 압도할 정도로 계산을 빨리 잘했다거나 초등학교 시절에 고등학교 수학을 푸는 그런 꼬마신동은 아니었습니다. 수학 문제 풀이법을 기계적으로 외우게 하는 당시의 교육 방식을 싫어하고 계산 실수가 잦아 종종 지적을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학이나 과학을 못했던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고등학교 성적표를 보면 대부분의 과목에서 좋은 점수(5점 혹은 6점)를 받았고 특히 수학과 과학은 최고점(6점)을 받았지요. 다만 규칙성 없이 암기할 것만 많았던 프랑스어나 그리스어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3점)을 받았을 뿐입니다. 재미있게도 같은 외국어 과목이라도 규칙성이 있는 라틴어 과목은 잘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 사이의 성적 편차가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죠. 아인슈타인은 대체로 '평범하게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평범하지 않았던 부분은 '집중력'이었습니다. 여동생 마야의 회고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집중력은 어린아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죠.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예로 '카드 쌓기' 일화가 있습니다. 카드를 잘 세워 여러 층의 탑 모양을 만드는 건데, 저 같은 경우 이런 일에 영 재주가 없어서 아무리 해도 3층 이상 쌓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야에 따르면 어린 아인슈타인은 카드를 13층까지 쌓곤 했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인슈타인이 '카드 쌓기'에 특별한 재주가 있는 '거미손'을 타고났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처럼 아인슈타인도 쌓다가 무너지고 쌓다가 무너지고……. 그러다가 13층까지 간 거겠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겪어야 했을까요? 거듭 실패했을 겁니다. 자, 그럼 어린 아인슈타인이 수많은 실패 끝에 10층까지 카드탑을 쌓아올린 상황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10층까지 올린 아인슈타인은 조심스레 카드를 한 장 더 맨 꼭대기에 세워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져버립니다. 우리 같으면 이때 어떤 기분일까요? 수없이 실패하면서 10층까지 쌓았는데 애써 균형을 잡아 올려놓은 카드가 그간의 노력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했으니 그 좌절감이 말도 못할 겁니다. 조금만 감정이입을 해보면 충분히 그 쓰라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대부분 1층부터 다시 탑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지겠죠. 언제 저기까지 또 가나 하는 생각부터 날 테니까요. 그런데 어린 아인슈타인은 집중해서 다시 카드를 세워 조심스럽게 탑을 세워나간 겁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집중력'은 실제로 훗날 아인슈타인의 과학 연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과학 연구 과정에서는 정말로 노력해서 겨우겨우 뭔가가 될 것 같았는데 결정적 오류가 발견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10층까지 쌓았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 같은 거죠. 이런 상황에서 실망하지 말고 다시 도전해보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여태까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였는데 처음부터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또다시 찾아봐야 한다면 누구나 실망감에 무기력해지죠. 그럼에도 다시금 힘을 모아 연구에 몰두하는 일은 어마어마한 끈기와 집중력을 요합니다. 이 끈기와 집중력이야말로 '천재적' 과학 연구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요인이지요. 특히 아인슈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 능력에서 굉장한 탁월함을 보였습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문제가 안 풀리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서 풀이법을 이해해놓고도 그 문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풀 수는 없을지 계속 고민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항상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막힌 풀이법을 개발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런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죠. 이미 어떻게 답을 내면 되는지 알았는데도 그 문제 자체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면서 이런저런 노력을 더 기울이는 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수학 문제를 푸는 대다수 사람에게선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과 마찬가지로 책을 '비판적'으로 읽었습니다. 책 내용을 '비난'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책이 말하려는 바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분석하고 대안을 찾아가면서 읽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태도가 몸에 배어 있던 아인슈타인은 당시 독일의 군대식 교육 방식과 잘 안 맞았습니다. 독일에서 학교 다닐 때 그다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건 그 탓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19세기 말 독일의 교육은 군대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선생님이 문제를 내고 학생을 지목하면 곧바로 일어나 대답하는 식이었죠.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런 군국주의 교육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교육 자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스위스 아르가우 고등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의 생각을 북돋고 토론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교육을 받게 되자 아인슈타인도 무척 즐겼습니다. 문제아 아인슈타인?아인슈타인의 집안은 독일에서 전기 사업을 했는데, 아인슈타인이 김나지움(고등학교) 1학년 때 사업이 잘되지 않아 가족 전체가 이탈리아로 이주를 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만은 독일에 남아 김나지움을 마치도록 했죠. 하지만 군국주의 교육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니기가 싫었던 아인슈타인은 부모님의 허락도 받기 전에, 아는 의사를 통해 가짜 진단서를 마련해 학교에 제출하면서 김나지움을 자퇴해버립니다. 그러고는 이탈리아의 부모님 집으로 가서 당시 유럽에 널리 알려진 명문 스위스연방공과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칩니다. 수학이나 과학 성적은 꽤 좋았기에 나름 자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다음 해에 친 입학시험에서 여지없이 떨어집니다. 수학 성적은 아주 뛰어났지만 다른 과목은 성적이 좋지 않았거든요. 연방공과대학교 입학시험이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를 못 알아볼 정도로 평범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고등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인슈타인이 좋은 성적을 받기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을 뿐입니다. 다행히도 스위스연방공과대학 학장은 스위스의 고등학교에서 1년간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고 오면 그다음 해에는 시험을 다시 보지 않더라도 입학을 시켜주겠다며 특별허가를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아르가우 칸톤 학교를 다니게 된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아르가우 칸톤 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위 그림은 그 당시 졸업사진입니다. 사진에 선생님과 학생이 섞여 있는데 누가 선생님이고 누가 학생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학교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격식을 따지거나 위계적이지 않았으며 자유로운 토론을 지향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색했죠. 당시의 새로운 교육철학에 입각해 만든, 오늘날로 말하자면 혁신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곳을 정말 좋아했어요. 인생의 가장 행복한 1년은 여기서 보냈다고 자서전에서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그러니까 천재는 기존 학교에 안 맞고 하니 이 사람들은 따로 모아 교육시켜야 한다는 말은 적어도 아인슈타인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다녔던 아르가우 칸톤 학교가 일종의 '영재 학교' 같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동급생들이 다들 천재였던 것도 아니고요. 그저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던 스위스의 한 고등학교였을 뿐이죠. 좋은 교육이란 결국 학생들의 잠재성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느냐, 그것으로 결정됩니다. 천재를 위한 교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험하는 아인슈타인!아인슈타인의 성적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었다는 건데요. 물론 아인슈타인이 스위스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할 때 성적이 동급생 중 꼴찌였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 꼴찌가 1등이 99점이라면 한 85점쯤 받은 꼴찌입니다. 즉 전 과목을 모두 F를 받은 낙제생은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랬다면 아예 졸업을 못했겠죠. 어쨌거나 아인슈타인은 동급생들보다 성적이 좀 낮았다는 건데, 왜 그랬을까요? 이 지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가 드러나는데요. 흔히 아인슈타인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아름다운 방정식으로 기술하려 한 지극히 이론적인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대학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주로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실험에 그토록 몰두한 덕분인지 아인슈타인은 냉장고 특허를 비롯해 상업적 가치를 지닌 특허도 여럿 가지고 있었죠. 나중에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후 자녀양육비 등으로 돈이 필요할 때 이 특허가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대학 시절 아인슈타인은 강의실에는 잘 안 갔습니다. 강의를 꾸준히 듣지 않으면 아무리 아인슈타인이라도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옵니다. 왠지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는 예외일 것 같죠? 강의를 듣지 않고도 무슨 문제가 나올지 뻔히 알 것 같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문제를 척척 풀어낼 것만 같잖아요? 하지만 천재에게도 공짜는 없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시험을 잘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실험에 빠져 강의에는 소홀했던 아인슈타인은 당연히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인슈타인이 매번 빼먹던 강의 중에는 저명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의 수업이 있었습니다.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굉장히 유명해진 후 그 아인슈타인이 내가 알던 아인슈타인이 맞느냐고 사람들에게 묻곤 했습니다. 자기 기억으로는 아인슈타인이 그런 엄청난 연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던 거죠. 그런데 이 대목에서 민코프스키의 위대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학생 시절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이 어떤 면에서 자신보다 유명해졌다면 스승이자 동료 학자로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서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무시하고 다른 주제를 연구하는 게 더 자연스럽죠. 하지만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진가를 알아봤고, 그래서 이를 수학적으로 보다 명쾌한 형식인 4차원 시공간을 통해 새롭게 정식화합니다. 아인슈타인 하면 우리는 바로 4차원을 떠올리지만 정작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4차원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가 어떻게 시간을 동기화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지금도 물리학과 교과서에서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4차원 시공간은 민코프스키가 1907년에 만든 개념입니다. 처음에는 우습게 봤던 제자의 아이디어가 훌륭하다는 판단이 들자 더 명쾌한 방식으로 정리해준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민코프스키와 다른 관점에서 출발했던 아인슈타인이 처음에는 민코프스키의 4차원 정식화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다른 물리학자들이 이를 널리 사용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민코프스키의 이야기는 과학 연구의 본성을 여러 면에서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첫째는 연구 과정에서 처음에 내린 판단에 구애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반영해 연구 방향을 수정해나가는 것이 과학 연구의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천재적인 과학 연구도 단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의 주창자인 것은 맞지만 그의 이론은 민코프스키 같은 동료 학자들의 관련 연구가 뒷받침되면서 발전한 것입니다. 과학 연구가 협동 작업이라는 점은 '천재적' 과학 업적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특허청의 아인슈타인!대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좋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은 학계에서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친구의 도움으로 베른 특허청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낮에는 근무를 하고 평일 밤이나 주말에 연구를 했지요. 그러고도 1905년에 기념비적인 세 편의 논문(특수상대성이론, 광전효과, 브라운운동)을 써냅니다. 그래서 1905년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라고 부릅니다. 이 점을 들어, 당시 누군가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온종일 학술 연구에 몰두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훨씬 많은 업적을 냈을 것이라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이 추측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특허청 경력이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특허를 얻으려고 제출된 기술이 기존 특허보다 더 참신한지 혹은 더 유용한지 등을 판정하는 특허심사관 일을 했습니다. 당시 아인슈타인이 심사하던 특허 중에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시계를 어떻게 동기화(synchronization)하는지에 대한 특허 신청이 많았습니다. 시계를 동기화한다는 것은 범죄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서로 다른 시계를 같은 시각에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시간은 시계를 서로 견주어 쉽게 맞출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장소, 예컨대 취리히의 시계와 베른의 시계를 동기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구상의 서로 다른 장소의 시간은 규약에 의해 모두 다르기 때문이지요. 하루를 24시간으로 규정한 것은 같지만 해가 뜨는 시간과 지는 시간이 다르기에,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아침 9시는 유럽 시간으로는 한밤중에 해당합니다. 지금은 대체로 한 시간 단위로 시간대를 나눕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요한 도시마다 시간이 제각각이었습니다. 사실 이게 더 자연스러운 겁니다. 지구가 한 시간 단위로 15도씩 찰칵찰칵 도는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회전하고 있으니까 원칙적으로는 경도상 차이가 나는 모든 위치에서 각기 조금씩 다른 시간을 규정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생깁니다. 취리히와 베른의 시간이 다르니, 당시에도 정확하기로 유명한 스위스 기차가 각 도시의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운행되도록 하려면, 도시마다 정확히 몇 분씩 시간 차이가 나는지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이를 각 도시의 시계에 반영해야 했으니까요. 취리히 시간으로 1시에 출발한 기차가 베른 시간으로 2시에 도착해야 하는데 두 도시 사이의 시간 차이가 7분이라면 기차는 한 시간이 아니라 53분 만에 베른에 도착해야 하는 거죠. 당시 아인슈타인이 베른 특허청에서 심사하던 내용 중에는 이 동기화 작업을 전신을 사용해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기계장치에 대한 특허 신청이 많았습니다. 이들 기계장치는 세부 내용은 달랐지만 작동 원리는 같았습니다. 취리히에서 베른으로 전기신호를 보내면 이 신호가 베른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취리히로 보내지도록 하는 방식이었죠. 만약 취리히 시간으로 신호가 발신되고 수신되는 데 2분이 걸렸다면 베른 시계는 1분 차이로 취리히 시계와 동기화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실제 베른 시간은 여기에 경도 차이로 인한 시간 차이도 함께 고려해서 결정해야겠죠. 혹시 아인슈타인의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과정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가 각자가 가진 시계를 동기화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베른 특허청 시절을 꼼꼼히 연구한 과학사학자 피터 갤리슨은 이런 점을 들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연구가 특허청 근무 경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이 주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갤리슨의 주장은 아인슈타인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시계 동기화 특허를 보고는 불현듯이 영감을 얻어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련 기록을 통해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근무 이전부터 특수상대성이론의 핵심적 물음, 예를 들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에게 빛은 정지한 것처럼 보일까'라는 물음을 여러 각도에서 탐구해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물리학자들을 난처하게 했던 고전역학과 전자기학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도 굉장히 깊이 고민하고 있었고요. 중요한 점은 이렇게 물리학의 난제 해결에 몰두하던 아인슈타인이 그 해결책의 일부를 자신이 생계를 위해 근무하던 곳에서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실제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는 이런 식으로 다양한 분야의 자원을 한데 모아 결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다른 분야의 개념을 그대로 가져다가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을 적절히 '변형'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심사했던 기계장치는 유선 통신으로 시계를 기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서로 다른 관측자가 빛을 주고받음으로써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규정합니다. 거기에 더해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공준'이 절대적 역할을 담당합니다. 즉 아인슈타인은 시계 동기화 특허를 단순히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고 자신의 물리학적 사고와 결합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분야에서 자신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평소 그 문제를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똑같은 것을 봐도 거기서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죠.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이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의 시간이 느리게 가고 공간이 수축하는 방식에 대한 수학적 식, 로렌츠-피츠제랄드 수축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과 달리 이들 물리학자는 이 식의 의미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으로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아인슈타인만이 (그리고 푸앵카레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 식이 함축하는 바는 새로운 물리학을 요구하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접근 방식을 검토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자신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면 이를 적절하게 '변형'해서 가져다 쓰는 연구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의 연구가 이런 연구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즉 생계를 위해 다니던 특허청에서 자신이 심사하던 기술의 특징에 주목하고 이를 자신의 물리학 연구와 연결 지을 수 있는 탁월한 융합적 통찰력이 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렸을 때부터 다른 분야는 무시하고 수학이나 과학만 공부시키는(물론 그것만 하고 싶어하는 학생에게 억지로 다른 분야의 공부를 강요해도 안 되겠지만) 영재 교육이 바람직한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과학 연구는 '꼬마신동'의 압도적 지적 능력의 산물이거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매우 뛰어난 지적 능력이 다양한 분야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연결점을 찾아내는 통찰력과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혁신적 이론을 제안한 것은 맞지만, 그 이론의 모든 귀결을 아인슈타인 혼자 다 파악해냈던 것도 아니고 이론 형성 과정에서 모든 요소를 자신이 다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 연구가 천재적인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그 천재적 연구의 배경에는 수많은 동료 과학자의 연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앞서 살펴본 뉴턴의 사례를 포함해 중요한 과학 연구에서 매우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다음 회부터는 기술 및 공학 연구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인슈타인의 네 얼굴 -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과학 연구의 배경 (상상력과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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