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요, 네 탓이요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6 | 조회수 | 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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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부여한 면죄부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다. 그의 책 《전쟁과 죄책(戰爭と罪責)》은 ‘애도할 줄 모르는’ 독일인의 집단 심성을 비판한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미처리히(Alexander and Margarete Mitscherlich) 부부의 책 《애도할 수 없음(Die Unfahigkeit zu trauern)》에 대한 일본 정신분석학자의 답변이기도 하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전후 일본의 집단 심리는 “전쟁은 본래 비참한 것”이라는 대전제 아래 일본 군부 지도자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으며, 전쟁에 동조한 평범한 일본인 모두에게도 면죄부를 발부한다. 전쟁의 일반화는 실상 자신들의 고유한 과거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 지점에서 전후 일본의 면죄 논리는 ‘애도할 줄 모르는’ 독일의 집단 심성과 만난다. 민족적 호소에 응해 전후 경제 부흥에 매진함으로써 ‘라인강의 기적’을 낳은 독일인의 집단 심성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총력전 체제의 돌격 정신을 전후 고도성장의 메커니즘으로 바꾼 일본인의 집단 심성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부인하고, 경제성장에 몰입하여 패전의 충격을 물질적으로 과잉 보상하려는 집단 심리에서 자기 성찰적 기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건국’과 ‘재건’이라는 만주국의 모토 아래 ‘산업 전사’를 동원해 조국 근대화와 고도성장을 지향한 박정희 시대 남한의 집단 심성도 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는 경제성장과 주민 통제, 동원체제의 구축 등 여러 면에서 만주국의 경로를 답습한 것이었다.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해 그럴듯한 경제적 자급자족체제를 세우려던 만주국의 정신은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익찬체제(翼贊體制)’라고 불렀던 일본제국주의의 ‘자발적 총동원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찾은 동아시아의 구 식민지 · 반식민지 국가의 발전 전략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후 동아시아 각국이 겉으로는 ‘반제 투쟁’과 ‘식민지 유산의 극복’이라는 정치 구호를 내세우면서도 일본 식민주의의 과거를 근원적으로 비판하지 못한 것도 결국은 일본 제국의 발전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온당하지 못한 기억과 죄책감의 실종201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Bandung)에서 열린 비동맹운동 6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악수하는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가운데 어느 진영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며 탈식민지 개발도상국들끼리 연대하고 협력하자고 다짐했던 비동맹운동 회의체의 속살이 어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남한과 타이완은 정작 1955년 반둥회의의 준비 과정에서 소외되고 제국 일본이 비동맹체제의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국제적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역사의 아이러니는 동아시아에서 식민주의의 과거를 온당하게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이기도 했다. 일본제국의 자발적 동원체제가 전후 동아시아 이웃국가들의 발전 전략 속에서 증식되고 있을 때, 정작 일본의 반전 평화운동은 일본이야말로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는 의식 위에 서 있었다. 전쟁 상황에서는 적도 아군도, 승자도 패자도 모두 희생자라는,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이 논리 앞에서 과거에 대한 성찰적 기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들은 ‘승자의 정의’가 희생자인 자신들을 죄인으로 모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승자가 패자에게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반성을 강요한다고 느끼는 상황이다. 나치 독일과 제국 일본의 국가적 범죄에 가담한 평범한 독일인이나 일본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책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중국 전선에서 복무했던 유아사 켄(湯淺謙)의 사례는 사안의 복잡성을 잘 말해준다. 그는 오키나와 출신이라 받는 차별에 분노하기보다는 더 결사적으로 차별하는 측에 끼려고 노력했다. 사지가 멀쩡한 중국 민간인이나 팔로군(八路軍) 포로에게 생체 실험과 해부, 수술 연습을 거리낌 없이 했지만, 중국군에게 사로잡혀 허베이성의 포로수용소로 간 후에도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명령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쟁이었다, 이런 일이 흔했다”는 변명을 되뇌었다고 말했다. 논리적 반성에서 양심의 가책으로한편 중국은 일본군 포로에게 관대정책을 취했다. 누군가 잘못을 추궁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잘못을 느끼고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과거가 청산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입장은 완강했다. “일본인 전범을 처리할 때 한 명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인 전범이 중국 전선에서 저지른 자신의 잔학행위를 샅샅이 기억해서 고백하고 죄를 뉘우치게 한 후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그 결과 1956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법정에 기소된 일본군 전범 1,062명 가운데 사형과 종신형은 한 명도 없고, 45명이 유죄판결을 받아 형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1,017명은 기소 면죄로 석방되어 곧바로 귀국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탄바이(?白)’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포로마다 개인적인 차이도 컸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희생자인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고 죄의식을 느끼며 자신의 악행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 포로수용소 관리요원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에 맞추어 논리적으로 자신의 악행을 기억해내는 것이었다. 중국 포로수용소에서 탄바이의 기준에 합격하고 사상 개조를 거쳐 마침내 일본으로 돌아온 일본군 중대장 출신 고지마의 기억은 이 지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노다 마사아키는 고지마를 집중 인터뷰하면서 그의 기억과 반성이 언제나 ‘설명적’이라고 느낀다. 고지마는 전쟁 중에 저지른 자신의 잔행행위에 대해 이러저러한 근거를 대고 “그러니까 나는 몹쓸 짓을 했다”고 말한다. 죄책감이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일상의 의식에 침투하는 것인데, 그걸 느끼기에는 고지마의 기억이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논리적이다. 예컨대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찔러 죽이는 총검훈련을 회상하면서 살해당한 중국인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과 병사들의 손에 묻은 피를 떠올린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손을 생각하는 것이다. 고지마의 논리적 반성은 자신이 살해한 사람을 추상화해버린다. 살해당한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냐는 질문에 얼굴은 기억나지 않고 ‘그냥 찌른 부분만’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답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에 대한 노다의 반응은 매몰차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살해당한 상대방을 물체로밖에 인식하지 않은 거네요.” 노다의 말에 고지마는 그만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노다가 자신의 질문이 너무 가혹하지 않았나 반성하는 순간 고지마가 뜻밖의 고백을 하면서 반전이 찾아왔다. 고지마는 중국의 포로수용소에서 탄바이를 하면서도 정말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진짜 죄책감은 오히려 귀국한 이후에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귀국한 후 직장도 다니고 재혼하여 아들도 얻고 평범하게 살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밤중에 깨어나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자기 부하들에게 희생된 중국 아이의 얼굴이 아들의 얼굴과 겹쳐지더라는 것이다. 큰 눈을 똑바로 뜨고 죽어가면서 자신을 노려보던 중국 아이의 얼굴, 자기 아들을 똑 닮은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정말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지마의 기억 속에서 추상으로만 존재하던 피살자가 얼굴을 가진 구체적 개인으로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 논리적 반성은 양심의 가책에 자리를 양보한다. 정신과 의사인 노다의 관심은 고지마의 행위가 실제로 어떠했는가 하는 역사적 실증이 아니라, 그가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하는 도덕적 감정에 있었다. 이미 70대 노인이 된 고지마에게 잔인할 만큼 집요하게 죄책감에 대해 묻고 또 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다는 자신의 아들과 중국의 어린아이에 대한 고지마의 고백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일본의 근대는 사람들을 극심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끊임없이 공격성을 강화하여 도덕과 양심을 경직시켰다. 고지마가 그런 시절을 혹독하게 겪었으면서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죄의식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힘은 도덕적 힘이기도 하다. 성찰의 기회를 놓치다1990년 제1차 걸프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의 이스라엘 대사관에는 독일 사람들의 전화가 밤낮없이 이어졌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화한 그들 중에는 만에 하나라도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경우 이스라엘 아이들을 맡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돌려보내도 되겠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사담 후세인과 아돌프 히틀러가 종종 유비되는 상황에서 당시 독일인들이 이스라엘에 보낸 우려는 충분히 이해된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독일 민족의 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전화한 평범한 독일인들의 격한 반응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깃들어 있지만 일종의 도덕적 위선도 느껴진다. 양심의 가책은 공개적으로 속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덕성을 인정받으려는 몸짓과는 분명 다르다. 남에게서 자신의 도덕성을 인정받으려는 데서 오는 그 위선은 종종 끔찍한 죄를 저지른 우리가 이제 세상의 악을 제거할 것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과 연결되어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과거와 대면할 때 극단적인 자기 부정에 몰두하는 일부 독일인에게서 진정한 양심의 가책보다는 오히려 과시를 위한 도덕주의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역사에서 배운 게 있고, 그래서 나치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의 일을 회개했다고 양심의 가책이 덜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양심의 가책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회개는 또 다른 이기주의일 뿐이다. 기억 연구는 양심의 가책과 도덕적 정당성이 등을 지기도 한다는 또 하나의 역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도덕적 자기 정당성이 강할수록 자책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자신에 대한 도덕적 성찰은 더 어려워진다. 도덕주의가 강할수록 더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다. 나치 점령기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비극은 폴란드판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 정권’을 갖지 못한 데 있다는 아담 미흐니크(Adam Michnik)의 지독한 역설은 이 지점에서 울림이 크다. 크비슬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게 점령된 노르웨이에서 설립된 괴뢰정권으로, 정권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나치에게 부역한 자 혹은 민족 배반자를 상징하는 집합명사였다. 그런데 미흐니크는 크비슬링 괴뢰정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없는 게 폴란드의 비극이었다고 주장한다.1) 나치에게 협력하기를 한사코 거부한 데서 오는 도덕적 정당성과 민족적 자부심이 너무 커서 전후 폴란드 사회가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반성이 담겨 있는 주장이다. 실제로 나치에게 점령된 폴란드에서 소수의 개인이 부역을 하기는 했지만, 체계적으로 협력하는 괴뢰정권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우선은 나치가 슬라브족 ‘열등인간’인 폴란드인에게 괴뢰정권을 세울 기회조차 주지 않은 탓이 크다. 설혹 나치에게 그럴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폴란드인의 강력한 민족주의 정서 때문에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란드의 레지스탕스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보다 규모가 훨씬 컸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견줄 만했다. 게릴라부대라기보다는 정규군에 가까운 국내군(Armia Krajowa)은 좌파와 우파를 망라하여 무려 35만 명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했다. 국내군과는 별도로 한창 때는 군세가 10만 명에 이른 극우 민족주의 계열의 민족방위군(Narodowe Siły Zbrojne)이 있었고, 농촌 각지에는 16만 명에 이르는 농민부대(Bataliony Chłopskie)가 따로 있었다. 소련을 후견인으로 둔 인민군(Armia Ludowa)은 작은 규모였다고 하나 무려 3만 명에 달했다. 또 유대계 폴란드인들은 별도로 유대인전투단(?ydowska Organizacja Bojowa)을 결성해서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등을 주도하며 나치와 싸웠다. 그뿐만 아니다. 수백 개의 지하신문 가운데 《비울레틴 인포르마치이니(Biuletyn Informacyjny)》는 매호마다 1만 부 이상을 인쇄했다. 지하대학인 비행 대학(Flying University)은 고등교육과 영화 관람, 타자기와 카메라 소지 등 모든 문화 활동과 지적 작업을 엄금한 나치의 탄압에 맞서 비밀 과정 수료자들에게 공식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지하정부가 공인된 권위를 가지고 사실상 나치 점령기의 폴란드를 통치했다는 점이다. 지하정부는 일상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타협과 용서할 수 없는 배신행위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맞추어 부역자를 처벌하는 사법 기능도 행사했다. 나치에게 점령된 폴란드는 런던에 있는 망명정부와 국내에 있는 지하정부의 연정 아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덕적 정당성에 안주하는 기억은 위험하다이처럼 찬연히 빛나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어두운 그늘은 있다. 그 어둠은 도덕적 정당성의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온다. 폴란드는 나치가 점령한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는 민족적 자부심,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출한 비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 바솀에 조성된 ‘의인의 숲’에 폴란드인이 가장 많다는 사실이 폴란드의 역설에 눈을 감게 만든 것이다. 의인의 숲에 명예 안장된 26,513명 중에 폴란드인의 숫자가 무려 6,706명에 달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 폴란드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한 레지스탕스의 민족 영웅들이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다는 역설이 참으로 곤혹스러울 만하다. 이 역설은 전후의 기억정치에서 폴란드인이 도덕적 정당성의 안락한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자아비판의 성찰적 기억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조피아 코사크-슈추카(Zofia Kossak-Szczucka)는 누구보다 이 역설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그녀는 민족주의 경향의 소설과 산문으로 잘 알려진 작가였다. 전간기(戰間期)에 폴란드 민족주의의 주류를 이루던 반유대주의가 강하게 배어 있는 작품들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자 코사크-슈추카는 민족주의 계열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을 구출하는 레지스탕스의 비밀조직인 제고타(?egota)의 공동 창설자가 되었다. 결국 1943년 나치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나 살아남았고, 사후인 1985년에는 이스라엘의 야드 바솀에서 유대인을 구한 의인으로 추서되었다. 전후 폴란드 공산주의 정권에서 초대 ‘안기부장’을 지낸 유대계 공산주의자 야쿠프 베르만(Jakub Berman)의 동생 아돌프 베르만(Adolf Berman)도 그녀가 구한 유대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덕분에 코사크-슈추카는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가졌는데도 공산주의 치하에서 그럭저럭 살 수 있었고, 2009년에는 폴란드 국립은행이 그녀의 제고타 활동을 기리는 기념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코사크-슈추카가 수천 명의 유대인을 구출한 제고타 활동을 하면서도 유대인들은 폴란드의 정치적 · 경제적 · 이데올로기적 적이라는 반유대주의 신념을 유지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자기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홀로코스트를 방관한다면, 폴란드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는 “피 묻은 손을 씻어버린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신념이 유대인을 구출한 반유대주의라는 역설을 낳은 것이다. 가톨릭 민족주의의 자부심 때문에라도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으며, 반유대주의자들도 폴란드 민족의 명예를 위해 유대인들을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들을 구한 폴란드의 반유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들에게는 민족의 명예라는 추상이 구체적인 한 사람의 생명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한 그들의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유대인을 구한 반유대주의라는 폴란드의 역설은 도덕적 정당성에 안주하는 기억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남한의 민주화운동에 복무했거나 조국 근대화의 주도세력이었다는 데서 오는 도덕적 정당성과 자부심이 좌 · 우를 막론하고 남한의 정치판을 망가뜨린 것도 좋은 예이다. 폴란드의 전투적 민족주의든, 남한의 ‘싸우며 일하는’ 근대화 세력이든, 또는 민중 속으로 들어간 민주화운동 세력이든 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문제는 과거의 도덕적 정당성으로 현실 정치의 무능이나 추악함을 덮고 있다는 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도덕적 정당성보다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양심의 목소리가 훨씬 더 소중하다. 자신의 정당성을 자부하면서도 의심할 수 있는 모순어법이야말로 미래지향적 정치를 추동하는 문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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