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철학·상담학과
본문바로가기
ender
커뮤니티
자료실

자료실

이성이 도덕에 등을 돌릴 때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6 조회수 187

이성과 도덕이 충돌하는 야만의 삶

 

바르샤바 게토 장벽이 있던 자리

바르샤바 게토 장벽이 있던 자리<출처: 셔터스톡>

가족을 지킬 것인가, 인간성을 지킬 것인가

지난 글(‘공범자가 된 희생자들’ 편)에서 폴란드인이 유대인 이웃의 죽음에 법적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고 해도 양심의 가책은 느껴야 한다던 얀 브원스키 논쟁을 다루었다. 그 논쟁은 폴란드 땅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폴란드인 이웃의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기폭제가 됐다. 아니, 아프다는 형용사로는 충분치 않다. 그 기억은 트라우마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모든 가족 구성원의 가슴 깊이 묻혀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 논쟁에 참가한 예지 야스트솅보프스키(Jerzy Jastrz?bowski)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형적인 지식인 가문 출신으로,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할 당시 두 살배기 어린아이였다.

그의 가족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크진 않았지만, 이념적 지향은 보수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 민족민주당(Narodowa Demokracja)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민족민주당을 이끌던 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의 극우적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문화적으로는 세기말의 귀족적 코즈모폴리터니즘에 가까웠다.

그의 가족에게는 할머니 때부터 가까이 지낸 엘야시 파진스키(Eljasz Parzy?ski)라는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 무성한 회색 턱수염을 가진 그는 전형적인 폴란드 귀족처럼 보였고, 동부 변경의 악센트가 있는 아름다운 폴란드어로 아담 미츠키에비츠(Adam Mickiewicz)의 장편 서사시 〈판 타데우시(Pan Tadeusz)〉를 즉흥적으로 읊는 낭만파였다. 스위스의 공과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익힌 빈 악센트의 독일어를 쓸 때는 스위스 신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예지에게 폴란드 시인들의 동시를 암송해 들려준 것도 그였다. 어린 예지를 비롯해 온 가족은 할머니의 친구인 그를 ‘엘리 할아버지’라 부르며 잘 따랐다.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1941년인가 1942년의 어느 날, 엘리 할아버지가 급히 찾아와 자신과 여동생들을 숨겨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한 시간 후면 바르샤바의 게토로 이송될 예정이니, 운명에 복종하든지 폴란드 친구 집에 숨든지 곧바로 결정해야만 했다.

바르샤바 게토로 강제 이주하는 유대인들

바르샤바 게토로 강제 이주하는 유대인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것은 엘리 할아버지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야스트솅보프스키 가족의 호의에 달려 있었다. 이 폴란드인 가족은 온 식구가 처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오랜 유대인 친구를 숨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함께 온 세 여동생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들은 말할 때마다 이디시어 악센트가 두드러졌고, 게다가 한 명은 검은색 고수머리를 감추기 위해 금발의 가발을 쓰고 있었다. 유대인의 특성이 한눈에 드러나는 여동생들까지 숨겨준다면 발각될 게 너무도 뻔했다.

엘리 할아버지는 여동생들과 함께 숨거나 아니면 게토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을 때 나치에게 발각되지 않을 확률은 10퍼센트도 안 됐다. 발각되면 엘리 할아버지 남매와 그들을 숨겨준 폴란드인 가족은 모두 처형될 운명이었다. 이들의 결정은 가족 모두와 유대인 친구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그 집 앞에서 죽음을 향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세 여동생,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억한 심정으로 함께 발길을 돌린 오빠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쓰라린 마음으로 남매의 이별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폴란드 가족에게 이 기억은 평생 아물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 결정의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이 이야기를 들려준 야스트솅보프스키 가족의 한 노인은 결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10퍼센트도 채 안 되는 확률에 온 가족의 생사를 걸 수는 없었던 그들의 선택을 누구도 섣불리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야스트솅보프스키 가족을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들의 결정이 온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합리적이고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치부한다면 너무 처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모두가 몰살당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도덕론일 것이다.

이 가족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내내 그 일로 괴로워했고, 그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게끔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묻어두었다.

나치가 만든 잔혹한 게임 법칙

나치가 만든 이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이성과 도덕, 합리성과 인간성이 비극적으로 대립한 예는 이 밖에도 무수히 많다.

한 번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14명의 좌파 정치범과 유대인이 탈출했다.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아 1시간여 만에 모두 붙잡혔다. 관례대로 그들이 교수대 앞에 서자, 사형을 집행하는 나치 친위대의 장교가 갑자기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교수대 앞마당에 늘어선 수용자들 중에서 각자 1명씩 죽음의 동반자를 고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거부하면 자신이 직접 고르되, 14명 대신 50명을 고르겠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친위대 장교는 직접 50명을 고르는 수고를 안 해도 되었다. 14명의 탈출자가 각자 1명씩 죽음의 동반자를 택함으로써, 그러지 않을 경우 치러야만 했던 36명의 더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들은 누구를 선택했을까? 친구? 아니면 생면부지의 사람? 그것도 아니면 평소에 싫어하던 사람? 고르는 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선택으로 36명의 무고한 생명을 구한다는 합리적 판단이 무거운 마음을 얼마나 덜어주었는지는 의문이다.

나치 수용소의 생존율이 매우 낮은 점을 감안하면 결국 모두가 죽을 운명이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나치의 손에 그 비인간적인 선택을 맡기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을 지키는 현명한 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합리성을 선택한 그들의 판단이 과연 비난받을 만한 것이었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나는 판단 중지 상태에 빠져버린다.

앞서 다룬(‘내 탓이요, 네 탓이요’ 편) 조피아 코사크-슈추카가 전하는 이야기는 더 끔찍하다. 너무 끔찍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바르샤바의 한 다리에서 일어난 사건을 아주 건조하게 적고 있다.

독일 점령기의 바르샤바에서 두 명의 독일군이 키에르베츠 다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

독일 점령기의 바르샤바에서 두 명의 독일군이 키에르베츠 다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비스와강을 가로지르는 키에르베츠 다리 위에서 굶주리고 지저분한 어린 유대인 부랑자 한 명이 구걸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폴란드인이 이 불쌍한 어린아이에게 적선하는 모습을 어떤 독일군이 목격했다. 독일군은 적선하던 폴란드인을 확 덮치더니, 그 어린아이를 강물 속으로 던져버리라고 명령했다. 만약 거부하면 둘 다 쏘아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그 순간에도 독일군은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네가 이 유대인 거지를 도울 방법은 없다. 이 아이는 게토 밖에 있으면 안 되는데 여기에 있으니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이 아이는 어차피 내가 죽일 거다. 네가 이 아이를 강으로 던져버리면 너는 가도 좋다. 안 그러면 너도 죽는다. 아이를 빠트려 죽이거나 너도 같이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셋 셀 때까지…….”

혼비백산한 폴란드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정심으로 적선했던 어린 유대인 거지를 다리 난간 너머 강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독일군의 격려를 받은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틀 후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가 자살한 이유를 알 길은 없다. 인간적 존엄성을 잃어버린 데 대한 수치심과 자기 모멸감 탓인지, 어린 유대인 거지를 강물 속으로 던져버린 데 대한 죄책감 탓인지, 그도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인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나치가 행사한 그 엄청난 압력 앞에서 폴란드인이 수동적 방관자였다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죄를 묻기는 어렵다.

나치 억압자들은 생존의 합리성에 비해 인간적인 다른 동기들은 모두 비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끔 게임의 법칙을 바꾸어버렸다. 나치가 만든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이성은 도덕의 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폴란드인이 유대인 대량 학살을 소극적으로 방관하고 저항하지 않은 것은 생존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변호할 수 있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적 삶을 생존의 계산법으로 환치시킴으로써 생존의 합리성이 인간성을 사상시켰던 것이다. 나치는 결국 생존의 논리를 도덕적 의무와 인간적 존엄성에 앞서게 만듦으로써 통치의 ‘기술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코사크-슈추카가 전한 그 폴란드인의 자살은 어쩌면 나치 억압자들의 기술적 성공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인간적 존엄성이 생존의 논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뒤늦은 자각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프리모 레비가 간파했듯이, 자살은 인간을 노예화된 동물처럼 부리는 나치의 환경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동물은 종종 더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자살하지는 않는다. 강인한 정치범들이 나치 게슈타포나 스탈린 비밀경찰의 감옥이나 취조실에서 자살하는 행위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처럼 젠체하는 고문 기술자들에게 “나의 생사는 내가 결정한다”는 행위주체성을 극적으로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히틀러를 동경한 어릿광대

홀로코스트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유대인들에게 이성과 도덕이 충돌하는 야만의 삶은 더 큰 딜레마를 던져주었다. 우치 게토의 유대 장로회 의장이자 괴짜 지도자, 욕심 많은 야심가이자 히틀러를 모방한 독재자였던 하임 룸코프스키(Chaim Rumkowski)의 행적은 실로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1940년 2월에 문을 열어 한창 때는 16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수용한 우치 게토는 1944년 가을에 폐쇄됐다. 규모로는 바르샤바 게토에 이어 두 번째였지만, 존속 기간은 가장 길었다. 무시 못 할 우치 게토의 산업 생산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룸코프스키의 독특한 개성도 한몫을 했다.

나치 침공 당시 그는 우치에서 유대인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보험대리인에서 사회사업가로 변신한 후여서 사회적 존경도 받고 있었지만, 고아들에게 ‘건전하지 못한’ 관심이 크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력적이면서도 교양 없고 권위적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홀아비였다.

나치 침략자들이 룸코프스키를 우치 게토의 장로회 의장으로 지명한 정확한 배경은 알 길이 없다. 끔찍이도 권력을 사랑했고 수완이 좋은 룸코프스키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야말로 의장 자리에 적임자라고 나치를 설득했을 것이다. 혹은 나치가 이 우스운 자를 조롱 삼아 장로회 의장으로 임명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임명되자마자 우치 게토에 대한 전권을 인정받았다. 장로회가 만들어진 지 겨우 3주 만에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위원들을 나치 상부에 고발하여 제거했으며, 랍비의 종교행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유대인의 결혼을 주관하는 등 우치 게토 안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모두 지배했다.

신관의 영역까지 장악한 무소불위의 이 전제군주는 나치의 상부에 일일이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지만, 그 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는 유례가 없었다.

이 허영덩어리 지도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룸킨(Rumkin)이라는 돈을 발행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는 우치의 게토에서만 통용된 이 돈을 헌 옷의 바지 주머니에서 우연히 발견하기도 했다. 앞면에는 다윗의 방패-유대인의 별이, 뒷면에는 발권자로 ‘리츠만슈타트(Litzmannstadt, 우치의 독일 이름)의 장로회 의장’을 명시한 이 돈은 우치 게토 안에서 룸코프스키의 장악력을 높였다.

룸코프스키가 발행한 화폐 룸킨

룸코프스키가 발행한 화폐 룸킨<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뿐만 아니다. 자신의 초상을 그려 넣은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고, 자신을 경호하고 게토의 질서와 규율을 유지할 목적으로 600명 규모의 경찰을 조직하기도 했다.

게토 안에서 행차할 때는 뼈만 앙상한 경주용 말 한 마리가 모는 우스꽝스러운 마차를 타고 다녔다. 학교에는 자신을 주제로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라고 요구해서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게토의 아이들이 ‘선견지명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우리의 사랑하는 위원장님’을 칭송하게 했다. 또 그는 군중과 가상대화를 하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웅변술을 본따, 박수갈채를 통해 군중의 동의를 얻고자 무진 애를 썼다.

우치 게토에서 연설하는 룸코프스키

우치 게토에서 연설하는 룸코프스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1944년 우치 게토가 폐쇄되어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될 때는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화물칸에 실려 가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권위에 맞는 별도의 객차를 요구했다.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하라는 나치의 최후통첩을 접하고 자살을 택한 바르샤바 게토의 장로회 의장 아담 체르니아쿠프(Adam Czerniakow)의 행적과는 대조적이다.

합리적 이성의 비합리성

우치 게토의 생존자 예후다 레이브 게르스트(Yehuda Leib Gerst)의 회고에 따르면, 룸코프스키는 복잡한 인간이었다. 그는 게토의 동료 유대인에게는 절대 복종을 요구하며 총통처럼 군림했지만, 나치 지배자들에게는 순한 양이었다. 위로는 무능하고 아래로는 전능한 모순적인 전제군주였던 것이다.

피에로처럼 우스꽝스러운 행적을 보이긴 했지만 그의 원칙은 분명했다. 나치가 요구하는 군수품을 최고의 효율로 생산함으로써 우치 게토의 필요성을 각인시켜 더 많은 유대인이 더 오래 생존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나치 지배자가 요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한 발 앞서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전부는 아니라 해도 우치 게토의 유대인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보다 평균 2년 이상 더 오래 살았다. 악명 높은 비밀경찰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게토 주민들의 의식주를 효율적으로 조직했고, 7개의 종합병원과 5개의 의원, 7개의 약국을 세워 수백 명의 의사와 간호사를 배치했다. 비록 의약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온전한 구실은 못했지만, 어쨌거나 의료체제가 작동했다.

또 47개의 학교를 세워 학령기 아동 63퍼센트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문화의 집’을 세워 연극과 오케스트라, 여타 공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른 게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협력의 대가는 컸다. 룸코프스키는 1942년 한 해에만 5만 5,000명에 달하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노동 부적격자로 판정해 헤움노(Chełmno)에 있는 죽음의 절멸수용소로 보내야 했다.

헤움노에 있는 나치 절멸수용소 터

헤움노에 있는 나치 절멸수용소 터<출처: canon_shooter / 셔터스톡>

그해 9월 “내게 네 아이들을 달라”는 연설에서 그는 자기 손으로 어린아이들을 희생의 제단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게토의 원활한 생존을 위해서는 나치 억압자들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으니,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 자식들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그 연설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협력의 속성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드러내주었다.

협력은 생존의 합리성을 설파하는 이성의 언어였지만, 이성을 도덕의 적으로 만든 나치의 초현실적으로 사악한 지배 구조는 합리적 이성의 비합리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우치 게토에서 저비용 고효율로 생산된 군수물자가 나치의 전쟁 수행에 기여하고, 그래서 유대인 절멸 전쟁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우치 게토의 유대인들을 지탱했던 생존의 합리성은 결국 제 발등을 찍은 것이 아닌가? 합리성의 논리가 결국 비합리성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허영과 야망으로 가득 찬 룸코프스키의 모순된 삶은 개인의 도덕적 파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삶은 도구적 이성이 합리성의 이름 아래 숨기고 있는 야만의 발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나치 통치의 가장 잔악한 점은 희생자들을 파괴하기 전에 비인간화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못해서라도 나치가 만든 게임 규칙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내부자의 위치를 거부하고 역사의 외부자가 되어 동시대인의 행렬을 지켜볼 수는 없다.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경계인의 시선으로 이 과거를 기억하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유일한 해법이 아닌가 하는 답답함을 지우기 어렵다.

[네이버캐스트] 이성이 도덕에 등을 돌릴 때 - 이성과 도덕이 충돌하는 야만의 삶 (기억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