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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에서 원자로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2 조회수 311

세상은 변화한다

 

엠페도클레스

엠페도클레스

엠페도클레스

파르메니데스 이후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가 등장하기 전까지 철학의 무대를 장식한 것은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기원전 500?~428?) 그리고 원자론자 레우키포스(Leucippos, ?~?)와 데모크리토스였다. 이들은 모두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에 따라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되거나 비존재로 소멸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경험 세계의 변화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이들은 오감을 통한 감각적 경험을 신뢰했고, 경험 세계를 한갓 허상으로 격하시키려 하지 않았다.1) 그리하여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에서 유가 생길 수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세상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제시하려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엠페도클레스는 글자 그대로 전설적인 존재다. 그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일원으로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오래전에 나는 소년으로, 소녀로 태어났다. 한때 나는 관목이었고, 새였고, 말없이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였다.”2) 그는 이 윤회의 진리를 아는 자는 신에 가까워진다며 그것을 깨친 자신은 이미 신이라고 선언하고 다녔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마법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여기면서 그가 죽은 여인을 되살리고 도시의 역병을 퇴치하는 등 이적을 행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종종 그렇듯이 그 역시 운문으로 글을 썼는데 “호메로스의 재능”을 가졌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시에 능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운문 중 한 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신으로
성스런 왕관과 활짝 핀 화관을 쓴 채
그대들 사이를 거닐며 모두의 존경을 받도다.
그 어떤 도시를 가도
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칭송을 받고
구원에 목마른 수많은 이들이 따르노라.
어떤 이들은 내게 예언을, 어떤 이들은
온갖 질병에 대한 처방을 구하노라.3)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에트나 화산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사체를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짐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불멸의 신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에트나의 화구() 근처에서 그가 평소에 신고 다니던 청동 신 한 짝이 발견된다. 화산이 그의 몸을 삼키면서 신발 한 짝은 뱉어낸 것이다.

살바토르 로사,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1665~1670년경

살바토르 로사,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1665~1670년경

엠페도클레스의 청동 신발

엠페도클레스의 청동 신발

 
 

그럼으로써 목숨을 건 그의 사기극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먼 훗날 영국의 시인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가 이 사건을 소재로 ‘에트나의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on Etna)’(1852)를 쓴다. 이 시에서 엠페도클레스는 화산에 몸을 던지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나온 원소들로
모든 것은 돌아갈 것이다.
우리의 살은 흙으로
우리의 피는 물로
열은 불로
숨은 공기로.

우주의 네 뿌리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우주는 물 · 불 · 공기 · 흙이라는 네 개의 뿌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흙은 고체, 물은 액체, 공기는 기체, 불은 열을 상징한다. 물 · 불 · 공기 · 흙을 흔히 4원소라 부르나, ‘원소’라는 말은 플라톤의 표현이고, 엠페도클레스는 ‘뿌리’라는 식물학적 은유를 선호했다.

생장력을 상징하는 ‘뿌리’가 4원소 안에 내포된 창조적 잠재성을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네 뿌리 안에 앞으로 탄생할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않은가. 엠페도클레스는 이 네 뿌리를 신과 동일시한다. 불은 제우스, 흙은 헤라, 공기는 하데스, 물은 네스티스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 원소들이 신처럼 영원불멸하는 존재라고 말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

이때 물 · 불 · 공기 · 흙은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의 일자’처럼 생성하지도 소멸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이 4원소의 혼합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4원소의 혼합과 분리를 통해 수많은 사물이 탄생하고 사멸해도, 원소들 자체는 질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는다. 물론 양적으로도 아무런 변함이 없다.

변화하는 게 있다면 오직 하나, 그것들이 혼합되는 비율뿐이다. 즉, 4원소가 어떤 비율로 섞이느냐에 따라 우리 눈앞에 보이는 다양한 사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화가들이 물감을 다양한 비율로 섞어 여러 색깔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비유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경험 세계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한스 바이디츠, ‘인간과 4원소’, 1532년

한스 바이디츠, ‘인간과 4원소’, 1532년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세계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 순환은 사랑(philia)과 미움(neikos)이 겨루는 소용돌이 속에 네 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1단계는 사랑이 지배하는 최초 상태다. 이때 세계는 4원소가 구별되지 않은 채 뒤섞여 구() 모양을 이룬다. 이어 2단계에서 미움이 작동하면 구 모양의 세계에서 4원소가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미움이 지배적 원리가 되는 3단계에서는 네 뿌리들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된다.

그러다가 4단계에서는 다시 사랑의 원리가 미움에 대항해 힘을 확장시켜 나가고, 그것이 미움을 완전히 제압하면 세계는 다시 최초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때 2단계와 4단계는 서로 동형()을 이루는데, 우주와 생명은 이들 단계에서만 생성된다. 우리의 우주는 현재 2단계에 있다고 한다.

우주의 순환 주기

우주의 순환 주기

우주만이 아니라 생명체도 물 · 불 · 공기 · 흙의 혼합에서 탄생한다. 먼저 4원소의 혼합으로 피와 살과 뼈가 생성된다. 처음에는 이것들이 서로 무작위로 결합해 “머리들이 목 없이 자라나고, 팔들이 어깨 없이 혼자 다니며, 눈들이 이마 없이 홀로 돌아다닌다.”라고 했다.

발생의 최초 단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머리, 인간 신체에 소의 머리가 달린 놈, 소의 몸통에 인간 머리가 달린 놈, 암수 양성을 가진 놈 등 (마치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에서처럼) 기괴한 생명체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중에서 생존에 불리하게 생긴 놈들은 도태되고, 오직 생존에 적합한 기능을 가진 유기체들만이 살아남는다. 이는 다윈(Darwin Charles Robert, 1809~1882)의 자연선택 이론을 연상시킨다.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들. 제임스 시핸, 모턴 소스나, “인간의 경계”, 1991년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들. 제임스 시핸, 모턴 소스나, “인간의 경계”, 1991년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들. 제임스 시핸, 모턴 소스나, “인간의 경계”, 1991년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들. 제임스 시핸, 모턴 소스나, “인간의 경계”, 1991년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들. 제임스 시핸, 모턴 소스나, “인간의 경계”, 1991년

 

‘영혼’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영혼 역시 4원소 혼합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것을 만들어낸 특정한 혼합 비율이 깨지면 영혼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엠페도클레스는 감각과 사유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고를 담당하는 것은 4원소가 가장 고르게 배합된 심장 주위의 혈액이라고 한다. 그는 감각의 지각을 ‘유사가 유사를 지각’한다는 원리로 설명한다.

감각은 감관과 감각되는 대상에 같은 종류의 원소가 들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모든 물체에서는 기()의 형태로 아주 작은 원소들이 방출되는데, 이것이 감관의 여러 구멍을 통해 들어옴으로써 지각이 일어난다고 한다.4)

우주의 씨앗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기원전 500?~428?)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엠페도클레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아테네에 밀레투스와 엘레아의 철학을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서 그는 “태양은 펠로폰네소스반도보다 더 큰 불타는 금속 덩어리”라고 주장했다가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나, 다행히 친구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의 도움으로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형을 면하게 된다.

천체가 신이라 믿었던 아테네인들에게 그의 말은 그야말로 신성모독이었다. 이 일화는 사실로 보인다. 훗날 소크라테스 역시 같은 죄명으로 기소되는데, 그때 그는 그것이 자기 말이 아니라 “1드라크마만 주면 살 수 있는” 아낙사고라스의 책에 나오는 말이라고 해명했기 때문이다.

신 헬리오스로서의 태양과 타오르는 금속으로서의 태양. ‘태양의 신 헬리오스’, 아테네 적회식 도기, 기원전 약 5세기경, 대영박물관 소장
신 헬리오스로서의 태양과 타오르는 금속으로서의 태양. ‘태양의 신 헬리오스’, 아테네 적회식 도기, 기원전 약 5세기경, 대영박물관 소장
 

신 헬리오스로서의 태양과 타오르는 금속으로서의 태양. ‘태양의 신 헬리오스’, 아테네 적회식 도기, 기원전 약 5세기경, 대영박물관 소장.

 

아낙사고라스의 철학은 크게 세 개의 명제로 이루어진다. 첫째, ‘생성이나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 그의 것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다. 하지만 엠페도클레스에 이어 아낙사고라스도 파르메니데스처럼 감각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한갓 허상으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생성’이나 ‘소멸’이라 부르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혼합’과 ‘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틀렸다. 어떤 것도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고, 그저 함께 섞였다가 분리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성은 함께 합쳐지는 것, 소멸은 분리되는 것이라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5)

존재는 결코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다. 그저 혼합이나 분리될 뿐이다. 근원적 존재는 “양과 작음(크기)에서 한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자(apeiron)’를 닮았다. 무한자는 그 안에 세계를 이루는 모든 성분이 분리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어 전체로서는 특정한 성격을 띨 수가 없다. 함께 섞여 있는 반대의 성분이 그 성분의 발현을 막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색깔조차 띠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근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전체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hen)에 가깝다.” 다만, 등질적인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달리 아낙사고라스의 일자에는 무수한 종류의 “배합(mixtures)과 씨앗들(seeds)”이 포함되어 있다.

종자들

종자들

이 무한자로부터 우주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신(nous)이다. 정신이 무한자를 회전시키면, 그로부터 소용돌이가 일어나 그 원심력에 의해 원소들이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분리되어 나오는 것은 공기와 에테르다. 에테르 같은 구름으로부터 물이 나오고, 물로부터 흙이 나오고, 흙으로부터 돌이 나온다.

하지만 이 물 · 불 · 공기 · 흙은 다른 모든 것의 재료가 되는 ‘원소’가 아니다. 그것들 역시 돌 · 나무 · 동물 · 사람과 같은 사물들 중 하나일 뿐이다. 무한자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무엇이 되느냐는 배합에 달려 있다. 즉, 어느 성분이 지배적으로 배합되느냐에 따라 사물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의 성분이 지배적이면 나무가 되고, 사람의 성분이 지배적이면 사람이 된다.

“정신만이 홀로 존재한다.”

“정신만이 홀로 존재한다.”

아낙사고라스의 사상을 이루는 두 번째 명제는 ‘모든 것 안에는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람이지만 내 안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성분이 들어 있다. 내가 ‘사람’이 된 것은 그 모든 것 중에서 사람의 성분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성분이 지배적이었다면, 아마 나는 사람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 안에는 아주 적은 양이나마 다른 모든 사물의 성분이 들어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이를 “모든 것 안에는 제 몫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신체 안에 그 음식과 동일한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 안에 있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 안에 있다.”

세 번째 명제는 ‘가장 작은 것이나 가장 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두 번째 명제의 필연적 귀결이다. 예를 들어, 어떤 것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으려면 그 어떤 것은 무한소하게 분할될 수 있어야 한다. 즉, 1%, 0.1%, 0.01%, 0.001%, 0.0001%……와 같은 식으로 아무리 작은 수라도 늘 그보다 작은 수가 있다. 그 때문에 하나의 사물이 제 안에 극소량으로나마 무한수의 사물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99%, 99.9%, 99.99%, 99.999%……와 같은 식으로 아무리 큰 수라도 늘 그보다 큰 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결국 그 어떤 것이라도 늘 그보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

파르메니데스의 유산과 대결한 세 번째 인물은 데모크리토스다. 그는 흔히 원자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 생각을 스승 레우키포스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원자론을 ‘레우키포스-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자였다. 그는 최종 목적이나 최초 충격자 등을 상정하지 않고 자연의 움직임을 오로지 기계적 · 역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가 ‘자연철학의 대가’라 불리는 것은 이처럼 자연에 대해 목적론적 설명이 아니라 인과론적 설명을 제시한 것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은 그의 책을 모두 불태우라고 할 정도로 그를 혐오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외려 그의 합리적 논증 방식을 극찬했다.

앞의 두 철학자처럼 데모크리토스 역시 ‘무에서 유가 생성될 수 없고 유가 무로 돌아갈 수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인정하나, 운동과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그의 생각은 기각한다. 그리하여 그 역시 무에서 생성이나 무로의 소멸을 상정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운동과 변화가 가능함을 보여주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과정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물구나무 세웠다는 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하여 ‘고로 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데모크리토스는 이와 정확히 거꾸로 추론한다. 즉, ‘운동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데서 출발하여 ‘고로 공간은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공간 속을 움직이는 것은 원자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a+tom)’는 뜻이다.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미세한 입자들로 이루어진다. 그가 이처럼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의 존재를 필요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은 운동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역리를 고안해낸 바 있다. 그의 역리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무한히 분할한다는 발상 위에 서 있다. 즉, ‘시공은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 고로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여기서도 상대의 논증을 물구나무 세운다. 즉, ‘운동은 가능하다.’는 데서 출발해 ‘고로 이 세상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원자와 공간

원자와 공간

결국 실재하는 것은 두 가지, 텅 빈 ‘공간(void)’과 빈틈없는 ‘원자(atom)’뿐이다.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원자들은 크기나 모양이나 수량에서 무한하다고 한다. 그 다양한 원자는 텅 빈 공간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움직이다 충돌하여 서로 밀쳐내기도 하고, 표면의 미늘에 걸려 서로 결합하기도 한다.

미늘 달린 원자

미늘 달린 원자

세상의 모든 것이 이 다양한 원자의 다양한 결합에서 탄생한다. 물론 그 결합이 풀어질 때 탄생했던 모든 것은 다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원자들 자체는 생성하거나 소멸 없이, 성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남는다. 바뀌는 것은 그저 원자들의 위치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자론자들이 모든 변화를 위치의 변화로 설명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공간과 원자의 소용돌이 운동이 모든 우주적 사건의 원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필연성’이라 부른다. 천체들도 그 필연성을 통한 원자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그중 해와 달은 구형()의 섬세한 원자로 이루어진다. 물 · 불 · 공기 · 흙도 그 필연성에 따라 원자들로 만들어진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네 가지가 사물의 발생 ‘원인’이라 믿었지만, 데모크리토스에게 그것들은 다른 사물들처럼 그저 원자들의 배치 ‘결과’일 뿐이다. 그 점에서 그의 원자는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씨앗’을 닮았다. 아낙사고라스의 씨앗처럼 원자 역시 종류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 무한종의 원자들이 무한한 방식으로 결합함으로써 세상에는 수많은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다중 우주론

다중 우주론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우리가 감각하는 사물의 현상학적 특질(qualia)들도 한갓 인위적 가상에 불과하다.

습속(nomos)에 의해 달거나 쓰고, 습속에 의해 뜨겁거나 차갑고, 습속에 의해 색깔이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공간뿐이다.6)

현상학적 특질들은 그저 감관에 비친 ‘가상’을 일컫는 관습적 이름일 뿐, 감각 너머에 있는 진정한 실체는 원자와 공간이라는 것이다. 원자들 자체는 맛도, 온도도, 색깔도 없다. 다시 말해 맛 · 온도 · 색깔 등은 특정하게 배열된 원자들이 우리 감관에 일으키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는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다. 파르메니데스에게 현상계는 아무 실체적 근거가 없는 순수한 허깨비일 뿐이다. 반면 데모크리토스의 현상계는 뚜렷한 객관적 근거를 갖고 있다. 그 ‘근거’란 물론 다양한 크기와 모양으로 특정 장소에 특정 방식으로 배열된 원자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의 배열로 이루어진다. 영혼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하여 데모크리토스는 영혼도 원자의 배열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것은 신체가 죽음과 더불어 해체되듯이 영혼도 죽음과 더불어 사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그에게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게다. 영혼의 불멸을 믿는 플라톤은 영혼마저 물질로 환원시키는 데모크리토스의 이 급진적인 유물론을 참고 들어주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영혼이 곧 이성이라 보았다. 그리고 인생의 최고 목적은 마음의 평정에 있다고 믿었으며, 마음의 평정이란 영혼이 평온하고 굳건하여 미신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 · 아낙사고라스 · 데모크리토스는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인정하면서도, 경험 세계에서는 생성과 소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이들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우주의 소용돌이 운동 속에서 4원소(엠페도클레스)나 배합과 씨앗(아낙사고라스)이나 원자와 공간(데모크리토스)이 서로 분리 · 결합함으로써 생성하고 소멸한다.

이 세 인물 중 특히 데모크리토스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엠페도클레스(‘사랑과 미움’)나 아낙사고라스(‘정신’)처럼, 혹은 훗날의 아리스토텔레스(‘목적’)처럼 의인법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현상을 철저히 역학적 · 기계적 · 인과적으로 설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연 철학의 대가’라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네이버캐스트] 일자에서 원자로 - 세상은 변화한다 (철학 오디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