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철학·상담학과
본문바로가기
ender
커뮤니티
자료실

자료실

앙리 드 그루의 ‘모욕 당하는 에밀 졸라’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2 조회수 253

용기는 영혼의 근육 강화제다

 

장 제르맹 드루에, [민투르나이의 마리우스], 1786년, 캔버스에 유채, 271x36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장 제르맹 드루에, [민투르나이의 마리우스], 1786년, 캔버스에 유채, 271x36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암살자 앞에서 호기롭게 가슴을 드러내 보이는 마리우스. 그는 오로지 용기와 열정으로 하층민에서 로마의 정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위대한 리더가 되기 위한 자질과 능력을 하나하나 헤아리다보면 과연 이런 자질과 능력을 두루 다 갖춘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덕과 자질을 두루 갖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 자질과 덕은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이를 테면, 리더는 대담하면서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고, 열정적이면서도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 공격적이면서 효율적인 운영을 해야 하고,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인 소통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야 그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 사람인 이상 어떤 것들은 넘치나 어떤 것들은 모자란다.

물론 사람의 일생은 늘 배움 위에 있고 우리는 이 배움을 통해 장점을 강화하고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약점을 보완하려면 먼저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이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덕목이 바로 용기다. 용기가 있어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고 용기가 있어야 우리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용기야 말로 리더십과 관련한 다른 모든 덕목을 강화시켜주는 ‘영혼의 근육 강화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용기란 공포의 결여가 아니라 공포에 저항하는 것이고 공포를 다스리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도 유사한 말을 했다.

“나는 용기가 공포의 결여가 아니라 그것을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공포를 정복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다 모자라고 한계가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해 떨쳐 일어서는 것, 그것이 용기다. 용기가 있다면 누구나 지금보다 훨씬 크게 성장할 수 있다.

뛰어내릴 것이냐, 물러설 것이냐

스티븐 스필버그.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백 번 다이빙 보드 위로 올라간다.”

스티븐 스필버그.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백 번 다이빙 보드 위로 올라간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애장한 그림 중에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1894~1978)이 그린 [하이 다이브](1947)가 있다. 한 소년이 용기를 내어 다이빙 보드 위로 올라갔으나 아찔함을 느낀 탓에 보드 끝에 웅크리고는 놀란 토끼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림이다. 해학적인 장면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답게 록웰은 매우 유머러스하게 이 상황을 표현했다. 한 번 보면 누구나 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그림이다.

스필버그는 이 그림을 처음 보자마자 반해서 구입했는데, 단순히 좋은 작품이니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사서 반드시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리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노먼 록웰, [하이 다이브(High Dive)], 1947년

노먼 록웰, [하이 다이브(High Dive)], 1947년<출처: 노먼 록웰 박물관>
< 그림 보러가기>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백 번 다이빙 보드 위로 올라간다. 뛰어내릴 것이냐 저 심연으로부터 물러설 것이냐가 우리에게 닥친 일이다. 내게는 이 그림이 내가 감독을 맡기로 결심하기 전의 영화 하나하나를 대변한다. ‘그래, 이 영화의 감독 일을 맡아야지’ 하기 바로 전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인 것이다.”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에 착수하기까지 11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들기 전 그는 무려 11년 동안이나 저 다이빙 보드 위의 소년처럼 망설였다. 제아무리 대단한 영화감독이라도 영화 한 편을 찍을 때마다 그토록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역사 속의 모든 성취자들이 위대한 것은, 심연이 두렵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결국 과감히 뛰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도 공포가 존재하지만 그들은 그 공포를 결국 스스로 정복한다. 재능이나 환경, 여건 이전에 용기가 우선적으로 작동했기에 실행하고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더십 컨설턴트 빌 트레저러는 이런 용기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시도하는 용기’와 ‘믿는 용기’, ‘말하는 용기’가 그것이다. ‘시도하는 용기’는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용기다. 앞장서서 시도하고 개척자적으로 노력하며 기꺼이 책임을 떠맡는 것이다. ‘믿는 용기’는 남을 신뢰할 줄 아는 용기다. 상황이나 결과를 통제하려는 의식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맡기고 변화에 열린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말하는 용기’는 과감히 발언할 줄 아는 용기다. 어려운 이슈를 제기하고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며 인기 없는 견해를 나눌 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시도해야 할 때 시도할 줄 알고 믿어야 할 때 믿을 줄 알며 말해야 할 때 말할 줄 안다면, 그는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일의 반을 이룬 사람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일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추진력이 바로 용기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용기

장 제르맹 드루에, [민투르나이의 마리우스], 1786년, 캔버스에 유채, 271x36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장 제르맹 드루에, [민투르나이의 마리우스], 1786년, 캔버스에 유채, 271x36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용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혈전을 벌이는 군인들이나 국난 극복을 위해 과감한 용단을 내리는 정치 지도자들이다. 나라마다 이런 군인이나 정치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난다. 그런 인물 중 하나를 그려 유명해진 서양 회화사의 걸작이 장 제르맹 드루에의 [민트루나이의 마리우스]다.

고대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카이우스 마리우스(기원전 157년경~86년)는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로마 공화정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에 오른, 그것도 그 직을 7차례나 역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열악한 토대에서 그렇게 수직 상승한 위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집념과 투쟁은 남달랐다 할 수 있는데, 그는 타고난 천성 자체가 매우 용맹스러웠으며 인내심이 강했고 간소한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젊은 날 적과 일 대 일로 대결을 벌일 때는 용감하게 맞닥뜨려 번번이 승리함으로써 여러 차례 상을 받았고, 정치에 뛰어들어서는 한동안 귀족이나 평민 혹은 어느 당파에도 치우침 없이 공익을 위해 용기 있게 분투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그를 진정 리더다운 리더로 생각했다.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부유한 것도 아니며 웅변술도 익히지 못해 그 밑천은 매우 보잘것없었지만, 그는 결코 주눅 들지 않고 타고난 용기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큰 성취를 이뤘다.

그런 그가 정적 술라와의 권력투쟁 끝에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몰린 적이 있었는데, 민트루나이의 한 민가로 도피했을 때가 그 때다. 이 주제를 그린 그림이 드루에의 [민트루나이의 마리우스]다. 이곳 행정관과 시의회 의원들은 권력투쟁의 패자인 마리우스를 죽일 결심을 한다. 그래서 갈리아 족 기병을 암살자로 고용하는데, 이 암살자는 어두운 방에 들어갔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형형한 눈빛과 마주친 것이다. 잠자고 있을 줄 알았던 마리우스가 깨어 자신을 노려보자 암살자는 두려움에 쌓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루에의 그림에서 암살자는 망토로 자기 눈을 덮어 마리우스의 눈빛을 피하려고 한다. 반면 마리우스는 옷을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냄으로써 당당히 암살 기도에 맞서고 있다. 암살자는 결국 암살에 실패했다. 너무 놀란 그는 두려움에 싸여 방에다 칼을 버리고 달아났다. 용기로 빛나는 강인한 정신이 어둠의 비겁한 음모를 이긴 것이다.

이렇게 위기에서 벗어난 마리우스는 그러나 말년을 매우 잔혹하게 보낸다. 술라가 보이오티아로 원정을 나간 사이 킨나와 손을 잡고 로마의 권력을 다시 쟁취했으나 피에 굶주린 보복으로 시민들에 대한 잔인한 살육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자제력과 평정심을 잃은 용기는 더 이상 용기가 아니다. 광분일 뿐이다. 결국 몸도 마음도 극도로 피폐해진 그는 술라의 로마 귀환이 분명해진 시점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드루에는 마리우스의 결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의 용기에 초점을 맞춰 이 그림을 제작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용기를 되찾고 다지는 과정에서 이 주제를 택하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미술학도 시절이었던 1783년, 드루에는 영예의 로마 상에 지원할 자격을 얻어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볼수록 경쟁자들의 작품이 하나같이 자기 것보다 뛰어나 보였다. 그는 자신감을 잃고 그리던 그림을 부셔 버렸다. 이 사실을 알고는 스승 다비드가 그에게 탄식하듯 말했다.

“네 작품은 그리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상을 탈 수도 있는 작품이었는데.”

자신감의 상실이 제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듬해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용기를 불사르며 그림에 달라붙었다. 결국 최고상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이 2년 뒤 [민트루나이의 마리우스]를 통해 이처럼 인상적인 장면을 낳았다. 용기만 살아 있다면 극복하지 못할 게 없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라 하겠다.

존 밴덜린, [카르타고의 폐허에서 생각에 잠긴 마리우스], 1807년, 캔버스에 유채, 221×174cm,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존 밴덜린, [카르타고의 폐허에서 생각에 잠긴 마리우스], 1807년, 캔버스에 유채, 221×174cm, 샌프란시스코 미술관.민트루나이에서 암살을 모면한 뒤에도 마리우스는 한동안 피난처를 찾아 떠돌아야 했다. 폐허화된 카르타고가 자신의 신세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마리우스.

불의에 맞서 양심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에밀 졸라

용기는 군인이나 정치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식인, 성직자, 예술가 가릴 것 없이 의미 있는 성취를 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지식인, 성직자, 예술가는 사회의 양심과 양식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빌 트레저러의 세 가지 용기 가운데 ‘말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가 많다. 그 용감한 행위로 역사에 자취를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다.

널리 알려져 있듯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양심과 정의를 대변해 당시 프랑스 군부의 불의를 규탄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가 독일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 판결을 받은 뒤 프랑스 전체가 큰 홍역을 앓게 된 사건을 말한다. 판결 뒤에 군부 내에서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지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도 나왔지만, 군 수뇌부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이에 분노한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오로르’지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으로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이 프랑스 사회의 양심에 불을 댕겼다.

이후 프랑스는 재심을 요구하는 양심적인 지식인, 진보인사들과 반 유태인 정서로 뭉친 수구 우파, 기득권 세력이 강하게 충돌해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드레퓌스가 체포된 지 10년이 되는 1904년, 재심이 개시되어 그의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에밀 졸라의 역할이 매우 컸지만, 그러나 그 용기만큼 그는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한 이듬해 중상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에 따른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결국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상황이 개선되어 가까스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뒤에도 갖가지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1902년 졸라가 파리의 아파트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졌을 때 그게 반 유태 극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러나 검시관은 검시보고서를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자연사로 확정지어 발표했다.

1953년 파리의 한 신문사에 의문의 편지가 배달되면서 이 의혹이 다시 증폭되었는데, 그 편지에 따르면, 졸라는 반 드레퓌스주의자에 의해 살해된 게 확실하며, 살해범은 1927년 임종 때 이를 고백했다는 것이다. 편지의 구체적인 서술과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매우 신빙성이 높은 제보였으나 세월이 많이 흘러 이를 명쾌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졸라는 그 위대한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이렇듯 양심의 횃불을 높이 든 대가를 치렀다.

앙리 드 그루,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 1898년, 캔버스에 유채, 81x109.5cm, 개인 소장

앙리 드 그루,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 1898년, 캔버스에 유채, 81x109.5cm, 개인 소장

이런 졸라의 고난에 주목해 그려진 작품이 앙리 드 그루의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다. 그림을 보면 당시 졸라에게 쏟아진 비난과 증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화면 오른쪽에 미색 옷을 입고 실크해트를 쓴 졸라가 보이는데,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잡아당기는 블랙홀 같다. 분노한 군중이 막대기를 들고 그를 향해 몰려들어 경찰과 경호원들이 가까스로 그를 지키고 있다. 졸라는 지금 제대로 걷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이 그림을 그린 앙리 드 그루는 벨기에 출신의 화가로, 이 무렵 졸라와 매우 친해져 그를 보호하는 경호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목도한 그대로 생생히 표현한 그림인데, 졸라를 향한 반대파의 증오가 컸던 만큼 졸라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게 해주는 그림이다.

용기는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로 나를 인도한다

마네, [에밀 졸라], 1867~68년, 캔버스에 유채, 146x114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마네, [에밀 졸라], 1867~68년, 캔버스에 유채, 146x114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용기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잘못된 자리라면, 그것은 다른 누구의 탓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내 탓으로 그리 된 것이다. 내가 용기를 갖고 추구하거나 도전하지 않았기에 나는 지금 엉뚱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용기를 내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그동안 두려움의 지배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오프라 윈프리의 다음 언급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 힘이 없다. 그에 대한 당신의 두려움이 힘을 갖고 있다.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두려움의 대상은 실제로는 아무 힘이 없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 안의 두려움이다. 이로부터 벗어나려면 진실을 마주할 줄 알아야 한다. 진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해도 진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마주하게 하는 힘이 용기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용기로 충만해야 하는 리더는 그만큼 부단히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자신의 모자람과 한계를 인정하고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에밀 졸라는 말했다.

“당신이 진실을 침묵하게 하고 진실을 땅속에 묻는다 해도 결국 진실은 자랄 것이다.”

용기 있는 자는 진실을 사랑한다. 리더는 진실을 사랑하는 용기를 지닌 자다.

[네이버 지식백과] 앙리 드 그루의 ‘모욕 당하는 에밀 졸라’ - 용기는 영혼의 근육 강화제다 (캔버스 위의 리더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