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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을 향하여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2 조회수 129

사실주의에서 상징주의까지

 

〈구성 8〉, 바실리 칸딘스키, 1923년

〈구성 8〉, 바실리 칸딘스키, 1923년

1. 미와 진실

19세기는 정치적으로는 시민혁명,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결과 ‘현대사회’, 즉 대중민주주의에 산업자본주의가 결합한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동시에 급속한 도시화의 시기이기도 했다. 공업 생산이 증대하면서 과거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와 산업 노동자로 변신을 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 사회의 면모는 그 이전과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다. 급속한 환경의 변화는 당연히 사고방식과 지각방식의 변화를 낳고, 이는 다시 미적 취향의 변화를 초래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 변화를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산업화한 도시의 살풍경에 적응하지 못해 ‘좋았던’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다.

산업화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 풍요는 소수의 것일 뿐 대다수 노동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산업화는 외려 노동자 대중의 빈곤을 심화시켰다. 숙련 노동자들의 솜씨를 졸지에 잉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기계의 부품이 되어 불구화, 파편화한 부분 노동을 수행했다. 전통적 공예의 산물은 장인의 손을 거쳤기에 예술성을 띠었으나,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물건들은 실용성만 있을 뿐 예술성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계로 찍어낸 물건들은 당연히 모양이 획일적이고, 품질 역시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뿐인가? 쉼 없이 독한 매연을 뿜어내는 공장의 굴뚝들은 도시 풍경을 추악하게 바꾸어버렸다.

19세기에 들어와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이렇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새로운 상황에 예술가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먼저 쿠르베와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들은 눈앞의 ‘현실’을, 그것도 ‘있는 그대로’ 그리려 했다. 현실이 추하면 추한 대로 묘사해야지, 그것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미’가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다.

〈오르낭의 매장〉, 귀스타브 쿠르베, 1849~1850년

〈오르낭의 매장〉, 귀스타브 쿠르베, 1849~1850년

사실주의자들은 신화 · 성서 · 역사 속의 ‘허구’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그리려 했고, 그런 그들의 눈에 비친 당대의 현실은 (고전적 의미에서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그들은 추한 현실로 눈을 돌렸고, 그로써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르네상스 이래의 고전 예술의 이념을 무너뜨렸다.

모두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의 라파엘전파는 누추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차라리 ‘아름다운 과거’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저 복고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라파엘전파의 화가들은 사물을 부분까지 정확히 묘사하는 고도의 자연주의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 관찰의 정확성은 당시에 급속히 떠오르고 있던 과학기술의 영향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라파엘전파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얻게 된 자연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자신들이 동경하는 허구의 세계를 그리려 했다. 결국 자연주의라는 과학적 기법이 전통적 회화가 지향하던 허구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도구로 사용된 셈이다.

이 복고적 경향은 라파엘전파에서 ‘예술과 공예운동’으로 전해진다. 윌리엄 모리스는 미적 가치를 상실한 산업 생산물에 다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파편화하고 불구화한 공장 노동에 희생된 인간 노동의 전체성과 존엄성을 회복하려 했다. 모리스의 기획은 자연과 전통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저항이었지만, 그 방식이 대량생산의 시대에 과거의 수공업으로 되돌아가는 퇴행성을 띠었다는 점에서 애초에 성공하기는 힘든 것이었다.

‘예술과 공예운동’에서는 이처럼 진보적인 정치적 태도가 보수적인 미적 취향과 결합되어 있었다. 마치 부화하는 병아리처럼 19세기는 새로운 요소가 아직은 공고한 낡은 시대의 껍질에 갇혀 있던 절충적 시기였다.

2. 색과 형, 내용과 형식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의 정신 속에서 탄생했다. 사실주의자들은 ‘진실’을 추구했지만, 스튜디오 안에서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젤(?)를 들고 야외로 나간 인상주의자들이 어쩌면 그들보다 더 사실주의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주의자들이 사물을 ‘아는’ 대로 그렸다면, 인상주의자들은 실제로 ‘보이는’ 대로 그리려 했다.

그들은 색은 곧 빛이므로 고유색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물리적 색채와 실제로 지각되는 심리적 색채가 서로 다름을 알았다. 인상주의자들은 빛을 그림으로써 사실주의자들이 여전히 고수했던 ‘색에 대한 형의 우위’라는 고전적 원칙을 무너뜨렸다. 인상주의의 화면에서 형의 명확성은 산란하는 반사광 속에서 와해된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자들이 고수한 또 다른 고전적 교리, 즉 ‘형식에 대한 내용의 우위’마저 무너뜨렸다. 사실주의자들에게 회화란 이미지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었다. 반면 인상주의자들은 회화가 ‘내용(what)’이 아니라 ‘형식(how)’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제재나 주제는 그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처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인상주의 화면은 실제로는 원근법적 깊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인상주의자들은 빛을 그리려 했기에 그들의 화면에서 배경과 형상의 구별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둘 다 사물에서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온 빛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의 기획에서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수정하려 했다. 빛은 섞을수록 밝아지는 반면에 물감은 섞을수록 어두워지기에, 물감으로 빛을 그린다는 인상주의의 기획은 애초에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쇠라와 시냐크는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는 대신 화면에 원색의 색점들을 병치하는 기법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이 색광주의가 현실의 과학적으로 더 정확한 재현의 방식이라 믿었다.

하지만 예술은 과학이 아니다. 신인상주의의 화면은 어딘지 광학 이론의 도해와 같은 인위적 느낌을 준다. 한때 신인상주의에 동조한 피사로가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다시 인상주의로 복귀하는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신인상주의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화면에는 빨강 · 파랑 · 노랑의 삼원색만 남아야 한다. 실제로 후기로 갈수록 신인상주의의 화면은 미세한 색점이 아니라 두꺼운 원색의 스트로크로 채워진다. 인상주의자들의 화면 역시 후기로 갈수록 원색으로 변해간다. 인상주의자들은 신인상주의의 등장 이전부터 이미 하나의 색은 그것의 보색 옆에서 더 생생하게 보인다는 인식 하에 보색대비를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두꺼운 원색의 스트로크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풍경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 그림들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 그린 것이기에, 외부 세계에서 받은 ‘인상(im-pression)’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세계의 ‘표현(ex-pression)’에 가깝다.

바로 여기서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는 후기 인상주의로 이행한다. 고흐의 굵고 짧은 스트로크들은 여전히 신인상주의의 자취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림의 전체적 분위기는 인상주의를 넘어 이미 표현주의에 근접해 있다.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한편, 고갱은 인상주의자들이 추방시킨 윤곽선을 화면에 다시 도입했다. 두꺼운 윤곽선으로 구획된 화면은 차라리 현대적 구성의 평면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작업이 더 이상 인상주의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눈에 보이는 일상의 풍경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을 뿐인 성서와 신화의 제재를 다시 도입한다. 이는 그가 이미 가시적 세계의 재현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그의 타이티 그림들은 명확한 상징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

3. 기능에서 아름다움을

상징주의 운동은 라파엘전파 못지않게 복고적이었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통적 제재들을 다시 들여온 것이나, 그림에서 의미의 전달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미술의 형식주의적 경향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징주의가 그저 미술사의 퇴행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다. 상징주의 회화는 전통적 도상학으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 상징주의 회화는 작가 자신만의 내밀한 의미를 담고 있어 사람마다 다양하게 해석되곤 한다. 현대미술 자체가 실은 ‘상징적’ 특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칸딘스키는 색채와 도형을 그 자체로서 고유의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간주했다. 현대미술의 이 상징적 경향이 이미 상징주의에서 그 전조()를 보인 셈이다.

여기서 야수주의까지는 단 한 걸음뿐이다. 누드를 그린 마티스의 두 작품을 비교해보자. 먼저 〈사치, 고요, 쾌락〉은 아직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강렬한 원색과 두꺼운 윤곽선에서 이미 후기 인상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이 엿보인다. 두 번째 작품 〈삶의 기쁨〉에서는 점묘가 사라졌다. 인물은 굵은 윤곽선에 둘러싸이고, 그 안쪽은 마치 광택이 나는 락커처럼 매끈하게 칠해졌다.

그뿐인가? 앞의 작품에는 원근법적 공간이 존재하나, 뒤의 작품에는 그것이 파괴되어 있다. ‘삶의 기쁨’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상징적 공간을 보여준다. 그것은 3차원 공간의 환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2차원 구성의 평면에 가깝다. 최초의 현대 회화가 탄생한 것이다.

〈사치, 고요, 쾌락〉, 앙리 마티스, 1904년

〈사치, 고요, 쾌락〉, 앙리 마티스, 1904년

〈삶의 기쁨〉, 앙리 마티스, 1906년

〈삶의 기쁨〉, 앙리 마티스, 1906년

현대 회화의 또 다른 흐름은 세잔에게서 흘러나왔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생생한 색채 효과는 높이 평가했으나 ‘사물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것의 경향에는 비판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인상주의와 고전주의를 종합하는 데에, 말하자면 인상주의의 색채 효과를 보존하면서도 물그림자 같은 그것의 덧없는 이미지에 다시 일상의 촉각적 실체감을 부여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세잔의 화면 속의 형태들은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여 마치 덧없는 이미지 속에 깃든 단단한 핵과 같은 인상을 준다. 나아가 세잔은 ‘원근법’이라는 500년 묵은 예술의 규약에서 회화를 해방시켰다. 단일 시점으로 구축된 원근법적 공간과 달리 세잔의 화면에는 초점이 다른 여러 개의 시점이 공존한다.

세잔의 화면에서 공존하는 시점들 사이에 존재하는 균열은 교묘히 감추어진다. 이질적 시점들을 봉합하여 하나의 총체상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 세잔은 여전히 고전주의적이었다. 그 분열을 감추거나 봉합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낼 때 ‘입체주의’가 탄생한다. 세계가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시점으로 파편화할 때 화면에서 3차원 공간의 환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2차원 구성의 평면이 들어서게 된다.

분석적 입체주의 단계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을 보라. 수많은 시점을 내포한 각각의 파편이 평면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어 ‘입체주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매우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분석적 단계에서 형은 수많은 시점의 파편들로 해체된다.

신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선()에서 자라나온 마티스. 그리고 인상주의와 고전주의를 종합하려 한 세잔의 궤적을 따라온 피카소. 칸딘스키는 “마티스?색채. 피카소?형태”라며 이 두 인물을 “현대미술의 위대한 이정표”라 불렀다. 그의 말대로 마티스는 재현의 의무에서 색채를, 그리고 피카소는 재현의 의무에서 형태를 해방시켰다.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회화는 마침내 아무것도 닮지 않은 순수한 형과 색의 유희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마티스도, 피카소도 그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지는 않았다. 그 걸음을 내딛은 것은 칸딘스키였다. 칸딘스키는 형과 색이 굳이 어떤 가시적 대상을 재현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바실리 칸딘스키, 1910년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바실리 칸딘스키, 1910년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칸딘스키의 변신이다. 표현적 추상에서 출발한 칸딘스키의 화풍은 바우하우스의 교사로 근무하던 1920년대에 기하학적 추상으로 변모한다. 표현주의의 바탕에는 기계문명에 억압당한 자연과 생명의 외침이 깔려 있다. 반면 기하학적 추상의 바탕에는 기계와 인공의 논리가 깔려 있다. 신체의 움직임은 무한히 다양하나, 기계는 그저 원운동, 아니면 직선운동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에 아름다움의 기준은 ‘자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예술은 ‘자연미의 모방’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더불어 주위의 환경 자체가 자연에서 인공으로 변해버렸다. 그에 따라 자연을 모범으로 삼아 형성된 인간의 지각 방식과 미적 취향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변화에 대한 최초의 대응은 추악한 현재를 떠나 아름다웠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예술과 공예운동’은 기계로 생산한 산업 생산물에 다시 고전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려 했다. 하지만 기계 혹은 기계의 산물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입히는 것은 사실 미학적으로 매우 어색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취향은 보수적이어서 19세기 후반까지도 ‘아르누보’처럼 산업 생물에 유기적 자연의 외양을 입히려는 절충적 디자인이 이어졌다. 아르누보보다 훨씬 현대적으로 보이는 ‘아르데코’도 여전히 자연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완전한 인공미의 취향은 20세기에 구축주의 · 데스테일 · 바우하우스와 더불어 사회에 본격적으로 관철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은 유리 · 강철 · 콘크리트 등 이제까지 없었던 인공적 재료들을 탄생시켰다. 이 재료들은 당연히 석재나 목재와 같은 자연적 재료와는 완전히 다른 미학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회화의 기하학적 추상은 이 새로운 재료가 제기하는 미학적 요구를 순수 미술에서 받아들인 현상이었으리라.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20세기의 취향은 결국 산업혁명 이후 진행되어온 노동의 기계화가 예술의 영역에까지 관철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기계 미학을 주창했다. 과거에 아름다움의 기준은 ‘자연’이었으나, 그 자리를 이제 ‘기계’가 차지하게 된다. 형태는 기능에서 나온다. 기능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이 새로운 미감을 우리는 ‘모더니즘’이라 부른다.

〈방사형 도시〉, 르코르뷔지에, 1930년

〈방사형 도시〉, 르코르뷔지에, 1930년

[네이버캐스트] 모더니즘을 향하여 - 사실주의에서 상징주의까지 (19세기 서양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