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산책자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2 | 조회수 | 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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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누리는 즐거움과 사회적 책무 사이
도시를 산책하는 근대의 풍경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를 설명해주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산책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소설 곳곳에 산책의 흔적을 감춰두고 있다. 흥미롭게도 울프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도시를 산책하는 모습을 자주 연출한다. 1915년에 출간한 《출항(The Voyage Out)》이나 《제이콥의 방(Jacob’s Room)》에서 주인공은 짧든 길든 도시를 산책한다. 《델러웨이 부인(Mrs. Dalloway)》은 어떤가.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본드 가에서 꽃을 사기 위해 긴 산책길에 오른다. 울프가 이렇게 산책자를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시키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산책자는 ‘익명의 바다’라고 부를 수 있는 근대 도시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산책자야말로 새로운 근대의 존재 양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울프가 칭찬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도 산책자가 가득하다. 《율리시스(Ulysses)》는 블룸이 더블린 거리를 하루 동안 돌아다니면서 겪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근대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는 끊임없이 경성 거리를 돌아다닌다. 다분히 《율리시스》의 한국판을 연상시키는 이 중편소설에서 주인공은 친구를 만나 조이스를 논한다. 울프는 산책자였다.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울프는 케임브리지 대학 강의를 회상하는데, 거기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가 갑자기 걷기 시작했다고 쓴다. 울프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곱게 다듬어진 잔디밭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순간 산책은 웬 알 수 없는 한 남성의 제지를 받는다. 울프는 처음에 “와이셔츠에 모닝코트를 걸친 기묘해 보이는 그 물체의 몸짓”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를 제지한 남성은 교구 관리인이었다. 이 순간의 묘사에서 울프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대수롭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 문장은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울프는 산책자야말로 교구 관리인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제도의 굴레를 벗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산책자로 자유를 만끽했던 울프는 어쩔 수 없이 사색의 보따리를 잔디밭에 남겨둘 수밖에 없다. 삼백 년 동안 가꿔온 유구한 잔디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산책자는 상상의 나래를 접어야 했다. 그토록 대담하게 잔디밭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던 생각은 마치 무엇에 쫓긴 물고기처럼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 울프는 전통과 당대의 순간을 대립시킨다. 이른바 전통을 수호하는 관리인의 모습은 와이셔츠에 모닝코트까지 차려입은 관료의 상징이다. 관료의 경직성은 소설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울프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근대에 대한 통찰은 기본적으로 이런 고리타분한 과거의 전통을 비판하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이 전통은 기본적으로 여성을 ‘익명’으로 간주하는 역사였다. “역사에서 여성은 대부분 익명이었다.”고 울프는 한탄했다. 이런 울프에게 모더니즘은 단순한 미학 운동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모더니즘은 근대성의 내부에서 출현한 것이라기보다 그에 대응해서 만들어진 예술 경향이다. 따라서 삶과 경험을 새롭게 형성하는 근대의 조건을 탐구하는 경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울프에게 근대성은 이중적이었다. 자신과 같은 작가에게 기회를 허락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통의 폐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울프에게 이중적인 근대성의 모습은 런던이라는 도시의 장소성에 스며 있었다. 영국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모더니즘의 주제의식을 논하면서, 울프를 비롯한 모더니스트 작가들의 작품세계가 19세기 도시의 확장과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메트로폴리탄 문화의 영향과 떼려야 뗄 수 없다고 말한다. 울프, 런던을 거닐다그러나 모더니즘을 규정하는 척도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작가에 따라 기술과 첨단에 대한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모더니스트 작가는 몰락하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근대성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선택의 문제로 판단하기에도 수월하지 않다. 유럽 대륙과 영국의 모더니즘도 각각 다르다. 유럽 대륙의 모더니즘이 ‘새로운 것’을 선언하는 아방가르드의 성격이 강하다면, 영국의 모더니즘은 전통 자체를 거부하기보다 갱신하고자 한다. 영국 작가로서 새로운 소설 형식의 창조에 매진했던 울프도 무조건 전통을 거부한다기보다, 전통을 새로운 소설의 형식으로 포용하려는 입장을 보인다. 18세기 센티멘털리즘(감상주의) 소설을 다시 쓰려는 울프의 노력이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울프 역시 사라지는 과거의 문학 전통을 회고적으로 반추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울프가 당시의 주류 모더니즘에 전적으로 동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울프는 당대 남성 작가들과 각을 세웠다. 동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울프는 모더니즘의 이분법에 빠져들지 않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곤 했다. 문학의 전통에 대해 비슷한 의견을 가졌던 T. S. 엘리엇과 비교해보면 차이점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엘리엇이 문학 장르를 선형적이고 진화적인 관점에서 봤던 것과 달리, 울프는 사회역사적인 관계의 관점에서 문학의 발전을 고찰했다. 울프는 결코 과거를 이상화하거나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전통이 다양한 인간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를 문학 교육을 통해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울프의 생각은 당대에 이해받지 못했다. 오히려 울프를 현실에 관심 없이 미학주의에 심취한 ‘여류 작가’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울프는 끊임없이 세계에 대해 관심을 표명해온 작가이자 지식인이었다. 그의 소설 또한 미학주의라고 불리기에 너무도 실험적이었다. 오히려 울프는 전통적인 의미의 미학주의에 저항한 작가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울프의 특징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윌리엄스의 말처럼, 울프의 모더니즘은 도시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런던은 울프가 자신의 문학을 실험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몇 편의 에세이에서 울프는 이 도시에 대한 애착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1975년 《런던 전경(The London Scene)》이라는 선집으로 묶여 출간된 다섯 편의 에세이는 원래 〈굿 하우스키핑(Good Housekeeping)〉이라는 잡지에 연재되었다. 그리고 후일 〈가디언(The Guardian)〉에 발표되었던 〈어느 런던 사람의 초상(Portrait of a Londoner)〉이라는 에세이가 한 편 더 발굴되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편의 에세이에서 울프는 1930년대 런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은 〈런던의 도크들(The Docks of London)〉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다. 타워브리지에 가까워질수록 이 도시는 자신을 뽐내기 시작한다. 건물들의 벽은 더 두터워지고 점점 더 높게 쌓아올려져 있다. 하늘은 납빛으로 착 가라앉고, 구름은 점점 더 보랏빛을 띤다. 돔들이 부풀어 오른 듯 솟아 있는데, 세월에 하얗게 바랜 교회 첨탑이 연필처럼 뾰족하게 솟은 공장 굴뚝과 뒤섞여 있다. 누구든 여기에서 으르렁거리는 런던의 포효와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울프는 결코 런던을 아기자기한 관광지로 그리지 않는다. 울프가 그리는 런던의 구역은 이스트엔드라고 불리는 공장지대다. 공장지대를 가득 메운 노동자들에게 문학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울프였다. 이 공장지대와 신성한 교회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런던타워를 울프는 담담하게 그린다. 런던타워는 감옥이었다. “여기에서 마침내 우리는 고대 석재로 이루어진 끔찍한 원형 타워에 이른다.”고 울프는 쓴다. 그곳은 다름 아닌 “수없이 북소리가 울리고 그때마다 목이 떨어졌던 런던타워”이다. 그러나 이렇게 죽은 자의 뼈로 가득했던 런던타워는 근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의미를 잃는다. 노동으로 분주한 도크가 런던타워를 에워싸고 있다. 이런 에세이에서 산책자로서 런던을 주유했던 울프의 시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울프는 당대의 현실에서 봤을 때 새로운 런던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 산책자의 시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시의 삶을 누릴 자유울프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 역시 근대의 주체로서 산책자를 지목한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베냐민은 산책자라는 개념을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에게서 발견했다. 보들레르는 산책자를 근대의 관찰자로 설정했는데,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산책자는 댄디이자 미학자이다. 베냐민은 이런 보들레르의 개념을 가져와서 근대성을 분석했다. 미완의 대작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서 베냐민은 산책자의 모습에 들어 있는 탐정의 모습을 찾아낸다. 산책자는 마치 탐정처럼 자신을 엄폐한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항상 추적하는 대상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베냐민은 산책의 사회 기반으로 저널리즘을 꼽는다. 문인은 이 저널리즘에서 환영하는 상품이다. 울프 역시 〈굿 하우스키핑〉이라는 잡지에 투고하기 위해 런던 전경을 그려냈다. 울프를 일컬어 “자기를 미학적 상품으로 포장한 작가”라는 비판은 다분히 산책자에 대한 베냐민의 분석을 연상시킨다. 베냐민은 “문인은 자기를 팔기 위해 시장으로 나간다.”고 썼다. 베냐민은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에서 개진한 내용을 응용해서 산책자로 거리에 나선 저널리스트들이 자신의 노동 시간을 무단으로 늘려 본인의 노동 증대를 도모한다고 이야기한다.1) 문인과 저널리스트, 또는 저널리즘의 긴장 관계는 모더니스트 작가의 진술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국의 모더니스트 시인 김수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 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2) 김수영은 베냐민이 지적했던 문제의식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역으로 말하면 베냐민이 규정한 모더니즘 미학의 ‘비판정신’을 김수영이 받아들였기에 이렇게 생각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과연 베냐민의 주장은 타당할까? 그리고 이런 관점을 울프에 대입하는 것은 과연 적절할까? 당대의 비평가들 역시 울프의 작품을 대체로 미학주의의 산물로 파악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확실히 울프는 자신의 시대에 이해 받지 못했던 작가다. 울프의 모더니즘은 일기나 에세이를 읽어봐야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근대성에 대응하는 모더니즘이라는 비판정신에 충실했다. 김수영과 울프의 비판정신은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질까? 김수영이 다분히 교양주의적 관점에서 당시 한국의 전근대성을 비판했다면, 울프는 젠더의 관점에서 남성중심주의적 영국의 근대성과 그 제국주의적 확장을 비판했다. 김수영이 개탄했던 한국의 전근대성은 결국 울프가 제기했던 제국의 남성성과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이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를 그리워하면서 “그 당시만 해도 글 쓰는 사람과 그 밖의 예술하는 사람들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3)이었다고 회고하는 그 현실에 문제제기를 한 작가가 바로 울프였다. “그 시절”에 여성은 지워져 있었다. 따라서 수전 손택이 《사진에 대하여(On Photography)》에서 산책자의 시선을 남성적 사진가의 시선과 동일시하는 것은 울프의 태도를 닮았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남녀 대립구도를 넘어 현실을 직시하기 위한 하나의 관점으로 작동하는 젠더라는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김수영이 “인간성”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그 지점을 울프는 타격하고 있다. 제인 오스틴에 대한 논평에서 울프가 지적했듯이, 오스틴 같은 작가에게 ‘도시의 삶’이 주어졌다면 분명 후기 작품처럼 현실 질서에 순응하는 서사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만의 방》이나 《3 기니(Three Guineas)》에서 울프는 특유의 유물론을 드러내는데, 울프가 제시하는 ‘도시의 삶’은 막연한 환상이라기보다 물질토대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단순하게 ‘여성은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누릴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유는 권리의 문제이고, 따라서 여성의 인권은 울프에게 항상 원천적인 문제였다. 소설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20세기 런던에서 여성은 익명의 존재였다. 이 익명의 존재가 산책자가 되었을 때, 런던은 어떻게 보였던 것일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이 울프의 《런던 전경》에 담겨 있다. 다음과 같은 울프의 맛깔스러운 묘사는 어떤가. 아마 연필 한 자루에 모든 열정을 바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나게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싶게 만드는 주변 환경이 있을 수 있다. 물건 하나를 가지겠다는 핑계로 티타임과 저녁 시간 전까지 오후 내내 런던 시내의 절반을 싸돌아다니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마치 여우사냥꾼이 말을 먹이기 위해 여우사냥을 계속하듯이, 마치 골퍼들이 개발자로부터 공터를 지키기 위해 골프를 치듯이, 거리로 나가고 싶은 욕망이 부글거릴 때 연필을 구하러 돌아다닌다는 것은 좋은 핑계인 것이다. 그렇게 일어나서 우리는 “반드시 연필을 사야 해!”라고 말한다. 마치 이런 핑계를 대면 겨울 도시의 삶이 제공하는, 런던 시내를 정처 없이 싸돌아다니는 즐거움을 안전하게 누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4) 울프는 이 도시의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으로 “런던 시내를 싸돌아다니는 즐거움”을 거론한다. 이 즐거움은 울프와 같은 산책자에게 ‘모험’이기도 하다. 연필을 사러 나간다는 실용적인 목적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목적 없는 목적을 위한 핑계로 동원된다. 이런 참신한 생각이야말로 울프의 에세이를 읽을 때 발견할 수 있는 묘미다. 산책자로서 울프의 시선은 베냐민이 묘사한 탐정의 그것이 아니다. “눈은 광부도, 다이버도, 보물을 찾는 발굴자”도 아니라고 울프는 말한다. 눈은 거리의 풍경과 함께 흐른다. 무념무상으로 눈은 떠다닌다. 탐정처럼 범죄자를 잡아내기 위해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뇌마저 잠든 상태”로 눈만 거리의 표면을 부드럽게 훑어가는 것이다. 울프의 눈은 런던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면서 감탄한다. 이 시선은 분명 근대의 주체로서 보들레르가 발견하고 베냐민이 분석했던 그 파리의 산책자와 다른 것이다. 울프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런던을 “빛의 섬”이라고 지칭한다. 상상해보라. 겨울밤 런던의 거리는 적막하다. 가끔 부엉이 소리가 울리고 저 멀리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거진 가로수 사이로 직사각형의 창문이 걸려 있다. 깜깜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그 창문은 적황색의 별처럼 빛난다. 울프는 그 어떤 전원시인보다도 더 운치 있게 런던의 풍경을 묘사한다. 마침내 울프의 겨울밤 산책은 템스강가에 이른다. 거침없이 바다로 향해 흘러가는 강의 위용을 보면서 울프는 연필 사는 일을 뒤로 미룬다. 이제 더 이상 핑계를 댈 필요는 없다. 겨울 강가에 서서 울프는 여름에 보았던 강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강은 예전의 강이 아니다. 울프가 바라본 강은 시간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하다. 망각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부정성을, 울프는 강을 바라보면서 떠올린다. 산책자로서 울프는 확실히 근대의 주체로서 상정할 수 있는 모습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 모습은 모험가에 가깝다. “새로운 방에 들어서는 것은 모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 산책자의 특징이다. 이 산책자의 소설에서 런던은 재탄생한다. 울프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도시의 삶에 대한 충실한 재현일 것이다. 에세이에서 드러나는 도시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소설 《밤과 낮(Night and Day)》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주인공 캐서린은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런던의 거리를 거니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울프의 작품세계를 일도양단해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세월(The Years)》에서 울프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기 위해 한때 자신이 비판했던 리얼리스트의 관점을 채택하기도 한다. 이런 타협으로 울프를 밀고 간 상황은 전쟁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건이었다. “현재의 사회 전체에 전망과 사실을 동시에 주고자 했다.”고 울프는 진술한다. 산책자로서 울프는 끊임없이 사회적인 책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의 산책은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한 미래를 찾아 헤매는 현재의 작업이었다.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즐비한 상점들은 산책자를 유혹한다. 수많은 할인이 있고 호객행위가 벌어진다. 화려한 런던이 반짝이고 있다. 이 화려한 소비사회를 밝히는 자본주의의 불빛 아래서 여배우는 비참한 이혼을 하고 백만장자가 자살하지만,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메운 군중들은 관심이 없다. 언론을 장식하는 소식은 너무도 빨리 바뀐다. 이 부박한 현실에 울프는 동의할 수 없다. 그가 부여잡고자 했던 것은 전망과 사실이었다. 《세월》에서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역사적 고찰은 바로 전망과 사실을 하나로 결합한 결과였다. 1935년에 쓴 일기에서 울프는 “사회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우리 모두는 참여해야 하는가?”라고 썼다. 이런 사정을 감안했을 때, 울프에게 ‘사실 묘사’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쓰고 읽느냐, 이 문제가 곧 울프의 입장에서 정치적인 사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년의 울프는 자신의 미학과 현실 참여 사이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울프의 양가성은 그의 약점이라기보다 사실에 집착하는 것을 작가의 미덕으로 여겼던 현실 참여적 지식인의 본질이었다. 울프에게 미학과 현실 참여는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글쓰기의 형식이라고 울프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소설 쓰기보다 훨씬 쉽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은 너무 단순하고 조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진리가 중요한 자리에서 오히려 소설 쓰기를 택하겠다.”고 말한다. 산책자 울프는 소설가 울프이기도 했던 것이다. [네이버캐스트] 도시의 산책자 - 삶을 누리는 즐거움과 사회적 책무 사이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