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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사라질 때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2 조회수 123

노동의 소멸

 

자본주의의 낭만적 기원? 이른바 ‘원시적 축적’

시간이 사라질 때

<출처: 청미래>

낭만적 사랑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그 기원에 관한 신화가 필요하다. 사후에 쓰인 사랑 이야기는 우연한 마주침도 필연적 만남으로 포장하여 기억된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 스스로를 관철한다.”라는 철학적 명제는, 그러므로 사후적으로는 항상 참이다.

이를테면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책들이 많이 읽히는 까닭 중 하나는 어쩌면 그 기원의 신화가 헛된 것임을 낱낱이 밝혀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헛됨’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상투적이지만 누구나 듣고 싶어 하는 위안도 따라 붙는다. 사회과학과 소설의 닮음은 여기에서도 나타나난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매끈한 논리를 완결 짓기 위해 사회과학은 ‘기원’을 추구한다.1)

한 세대 동안 연평균 10퍼센트에 가까운 성장률의 기적을 이룬 한국 경제의 궤적을 설명할 때,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겪은 직간접적 경험을 투사함으로써, 기적의 기원을 찾아낸다. 똑똑한 독재자나 똑똑한 기업가들이 우파적 기원이라면, 착취당한 노동자들은 좌파적 기원이다. 똑똑한 관료나 높은 교육열이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키워 주는 기원이라면, 냉전 시대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은 경우에 따라서는 성장의 성과를 애써 무시하는 좌파적 기원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지배 엘리트의 공을 추켜세우는 우파적 기원이 되기도 한다.

원인에서 결과에 이르는 길고도 복잡한 연쇄를 뒤집어 결과에서 하나의 원인으로 소급하여 가는 것, 그것은 마치 술에 취해 헤매며 찾아온 골목길을 역순으로 더듬어, 비록 헤매었으나 그럼에도 그 길로 올 수밖에 없었던 필연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과도 같은 작업이다. 아래의 <그림 1>에서처럼 결과 X는 A, B, C, D라는 온갖 우연적·필연적 원인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림 2>의 빨간색 화살표처럼, 결과 X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B라는 원인으로 귀착될 때, A, C, D가 미치는 영향은 (점선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제 그렇게 찾아낸 필연성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타인을 설득하는 장치가 되고, 나아가 타인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그림 1>

<그림 1>

<그림 2>

<그림 2>

 
 

《자본론》 제1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른바 “원시적 축적(Ursprugliche Akkumulation)”2)에 관한 장은 자본주의의 낭만적 기원, 즉 능력주의(Meritocracy)의 기원을 찾는 신화가 허구적임을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파헤치는 부분이다. 그 신화를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아득한 옛날에 한편에는 근면하고 영리하며 특히 절약하는 특출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게으르고 자기의 모든 것을 탕진해 버리는 불량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상의 원죄에 관한 전설은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밥을 얻어먹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지만, 경제학상의 원죄의 역사는 이마에 땀을 흘릴 필요가 전혀 없는 인간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밝혀 준다. 이 서로 다른 원죄 이야기는 어찌 되었든, 근면하고 절약하는 사람은 부를 축적했으며 게으른 불량배는 결국 자기 자신의 가죽 이외에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3)

적어도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근면하고 절약”했음에 틀림없었으리라 간주되는 사람은 노동을, 따라서 시간을 축적한 사람이다. 그렇게 축적된 것으로 여겨지는 시간은 이제 현실의 살아 움직이는 시간을 지배한다. 신분제 사회에서 누군가가 "이마에 땀을 흘릴 필요가 없는" 까닭은 그의 핏줄 탓이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혹은 그의 선조가 땀 흘려 노력한 덕택인 것이다.

노동의 시간이 사라지면 벌어질 일들

시간이 사라질 때

‘기원’을 찾아 소유를 정당화하는 작업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 생산과정에서의 잉여노동 착취보다는 생산과정 밖에서의 수탈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가공의 시간이 진짜 시간을 지배하는 가장 비근한 예는 도시 렌트(지대)의 상승일 것이다.

케인스는 유명한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본축적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금리생활자(Rentier)는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른바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라는 명제다. 자본이 많아지면 그만큼 덜 희소해질 테고 따라서 그 대가로 지불하는 금리도 서서히 하락해서 궁극적으로 0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적어도 서울에서는 금리생활자는 안락사하지 않았으며, 렌트는 오히려 모든 가격 설정에서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은 보장되어야 하는 불변의 상수 역할을 해왔다.4)

처음부터 인간 노동의 산물이 아닌 토지는 농업 생산에서는 천연적인 비옥도에 따라, 도시에서는 갖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위치(Location)에 따라 생산과정에서 만들어진 잉여의 일부를 꼬박꼬박 가져간다. 렌트의 규칙적인 흐름은 ‘자본 환원’의 방법을 통해 자본이 아닌 것을 자본처럼 여겨지도록 만든다. 허구적 시간 혹은 가공의 시간의 탄생이다.5)

그러나 가공의 시간이 과연 진짜 시간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까? 가공의 시간이 궁극적으로는 진짜 시간이 설정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면? 이 물음과 관련하여 렌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현실은, 재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0으로 수렴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영화의 상상력을 넘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미 1975년에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은 과학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자동화(Full Automation)가 이루어지면 착취의 대상인 노동력이 사라져 버리므로 자본주의는 존속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6) 한동안 논쟁의 초점은 노동이 조금이라도 투입되느냐 아니냐, 어디까지를 직접 노동으로 간주하느냐에 맞추어졌다.

그러나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라 디지털화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노동량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예가 점점 많아졌다. 일단 개발된 소프트웨어는 거의 공짜에 가까운 비용으로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 파일에 담긴 전자책은 무한 복제되며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조차 사라져 버린다. 단지 공상과학의 주제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사용가치가 투하노동에 반비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프트웨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에는 가장 고급의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먼저 개발하고 나서 추가적으로 노동을 투입하여 기능이 낮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있는 기능을 삭제하는 것이 없는 기능을 추가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노동이 더 많이 투하된 제품이 사용가치가 더 낮고, 따라서 가격도 더 싸게 된다.7)

베스트셀러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저자였으며 아카데미즘을 떠나 구글의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된 할 베리언(Hal Varian)은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가격차별이라는 방식으로 타개해 나갈 것을 주장한다.8) 가격차별은 요컨대 소비자를 그룹별로 분리하여 가격을 달리 매기는 전략인데, 전통적인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독점력을 가진 기업이 시장을 지배함으로써 추가적인 이윤을 얻는 행위로 설명된다. 그러나 베리언은 그러한 가격차별이 시장을 확대하고 소비를 늘림으로써 결국에는 소비자에게 이득이 된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예의 완전자동화를 둘러싼 마르크스 경제학의 논쟁으로 돌아가 보자면, 설사 정보상품을 생산하는 데 노동이 필요 없어짐으로써 가격을 매길 이유가 없어진다 해도 기업은 여전히 독점력을 이용해 이윤을 얻을 수 있으며 더욱이 그것은 소비자, 그러므로 사회 전체적으로도 이익이라는 주장이다.9)

사실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외부성의 내부화’ 과정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시장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물이나 활동을 끊임없이 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그 대상에는 깨끗한 공기나 물, 돌봄 노동 같은 것들뿐만 아니라 좋은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친밀한 분위기처럼 사적인 영역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들까지 포함된다.

20세기 초반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자본주의가 팽창하여 지구 전체를 시장화하고 나면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어질 것이라는, 일종의 자본주의 자동붕괴론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 달리,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내부화를 통해 단지 연명의 차원을 넘어 눈부시게 성장했다. 때로는 긴밀한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부분에까지 시장이 침투한 것이다. 신랄한 유머를 갖춘 다음의 서술은 이 문제를 지적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공장에 강제로 밀어 넣었을 때, 체제는 비시장적 생활방식의 상당 부분을 심각한 범죄로 바꿔야 했다. 당시에는 실업자가 된 사람을 부랑자로 취급해서 체포했다. 선조들이 늘 하던 대로 밀렵을 통해 새를 잡으면 교수형 감이었다. 오늘날 이것과 비슷한 현상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 상업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업화에 저항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19세기에 밀렵꾼들을 대했던 것처럼 돈을 받지 않고 서로 키스하는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10)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공짜로 키스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세상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한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늘 그러하였으므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지나친 단언일 것이다. 요컨대 노동시간이 사라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며, 어떤 세상이 전개될지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적 재산권 : 죽은 자가 산 자를 잡다

시간이 사라질 때

만약 모든 상품의 가치가 궁극적으로 0으로 수렴한다면, 독점력 이외의 가격의 논리적 근거는 사라진다. 주류 경제학자인 베리언과는 달리, 여전히 정통적인 포지션을 취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무엇보다도 이윤이 잉여노동에서 나온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노동 자체의 소멸은 시스템 전체의 이윤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며, 정의상 이윤이 사라진 자본주의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 이전의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다른 점은 피지배 계급에 대한 노동의 강제가 눈에 보이는 물리력이 아니라 “일하든가 굶어 죽든가”라는 경제적 강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약 상품 가격의 설정 자체가 점점 더 지적 재산권 같은 경제외적 강제에 기초하게 된다면,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요인 자체가 변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에 노동시간의 사회화 그 자체가 권력의 산물11)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변화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경제적 강제가 경제외적 강제로 전환하는 것일까? 아니면, 경제외적 강제가 경제적 강제를 촉진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다시금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공짜 키스가 도둑질”이라는 익살은 키스를 소프트웨어나 지식으로 바꿔 놓고 보면 블랙 유머가 된다. 지적 재산권은 오랫동안 상품이 아니었던 지식을 어엿한 상품, 나아가 가장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상품으로 바꿔 놓았다.

앞에서 본 투하노동이 더 많으면 오히려 사용가치가 덜해지는 상황도 이른바 상품화비용12)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품화비용에는 대표적으로 지적 재산권을 확립하고 집행하는 비용이 포함된다. 당초에 자본주의 그 자체가 노동력이라는 “허구적 상품”13) 을 상품으로 만드는 데에 기초한 체제라는 점에서, 지적 재산권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정의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적 재산권을 실용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표준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결국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적 소유권 보호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사람들을 격려해야 할 필요성과, 지적 소유권으로 인한 독점 때문에 빚어지는 손실이 새로운 지식이 가져오는 이익을 넘어서지 않도록 보장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느냐는 것이다.14)

장하준의 주장을 마르크스 경제학의 눈으로 읽는다면, 지적 재산권(혹은 그 무엇이건 간에 상품이 아닌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제도나 사회적 강제들)은 모종의 적정 수준을 넘어설 때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역동성을 깨뜨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역동성을 잃는 것은, 비록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자본주의의 치명적 위기로까지 연결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본주의가 변화할 가능성을 암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초판에 서문에서 자본주의 이전의 낡은 사회적 관계 때문에 겪는 고통을 “죽은 자가 산 자를 잡는다.”15)라고 표현했다. 상상된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원시적 축적이라는 능력주의의 기원에 관한 신화는 바로 “산 자를 잡는 죽은 자”이기도 하다. 그것이 통시적인 문제라면, 한편 노동시간이 사라질 때 ‘노동이 아닌 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공시적으로 이루어진다. 허구의, 가공의 시간이 진짜 시간을 사로잡을 때,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적 재산권 같은 경제외적 강제가 필요할 때, 우리의 노동시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간 주권을 되찾고 ‘자본의 시간’으로부터 ‘노동의 시간’의 자율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우리의 과제는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네이버 캐스트] 시간이 사라질 때 - 노동의 소멸 (시간으로 읽는 자본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