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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주의와 기독교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4-04 조회수 464

물리주의와 기독교(세계관, 심신문제와 기독교의 문제) : 영혼은 제거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저에겐 너무나 당연한 용어들이지만 타임라인이 철학전공생의 것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이 글은 최대한 쉽게 물리주의 혹은 자연주의를 다룰 것이며, 관련하여 기독교를 다룰 것입니다. 영혼이란 물질계 안에서 무엇인가?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한가, 우리가 말하는 영혼은 정말로 있는가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물리주의라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보편적인 감각가능성이 없지만 있다고 상정되는 것들 가령 신, 귀신, 악마, 천사, 사후세계 등 물질에 초월적인 것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질계'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세상의 모든 현상은 물리적으로 환원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용어로 자연주의가 있습니다. 자연주의는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자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구체적인 철학담론에서 다를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물리주의나 자연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쓰겠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대부터 인간은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의 지위는 육체와 다르며, 육체를 벗어나도 자아동일성을 유지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와는 다른 영혼이 있고, 육체에 영혼이 들어와서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견지했던 심신이원론입니다. 이 이론은 어떻게 육체와 영혼의 연관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육체와 영혼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실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혼과 육체를 매개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 메커니즘을 제시할 수 있어야하는데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르다는 논리적 이유로 그 메커니즘이 불가능합니다. 영혼과 육체를 매개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 매개체는 어떤 성질을 지녀야합니까? 데카르트는 이에 대한 논리적 인과를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대안들이 나타났습니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대안 중에 하나가 물리주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지시하는 초월적인 실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물질의 지위는 인정할 수 없고, 모든 언어,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 물리적인 언어와 물질적인 작용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저는 오늘 물리주의ㅡ적어도 저의 물리주의 안에서ㅡ를 설명하고 이것을 정당화하고자 할 것이며, 이 안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고자 할 것입니다. 아래부터는 본격적으로 물리주의에 대한 저의 입장입니다.


 저는 우선 우리가 물질계를 벗어나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기초적인 작용, 아니 우리의 모든 작용은 무엇을 통해서 일어납니까? 만약 우리에게 신체가 없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작용들 중 어떤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작용들이 물질계 안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작용들은 정의 그 자체로 물질계에 있으므로, 우리가 흔히 비물질적인 작용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살펴봅시다. 사실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우나 우리는 가끔씩 심령현상(귀신목격, 성령체험, 조상을 느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심령현상, 작용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것은 우리 신체 안에서 일어납니다. 누군가 귀신을 목격했다고 말할 때, 그는 신체적으로 그것을 느낀 것이거나 혹은 눈을 목격한 것입니다. 성령체험을 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작용들은 다름 아닌 신체적 자극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물리적인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비물질적인 실체의 존재를 보여줍니까?


 만약 비물질적인 실체가 있다면, 정의에 의해 쿼크 (혹은 그 미만) 단위로 구성될 수 없는 실체가 어떻게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물질계는 기본적으로 물질들에 의해 닫힌 구조를 지닙니다. 적어도 이 개념에 따른다면 비물리적인 실체가 물질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 실체 자체가 물리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언어는 논문이 주어졌을 때 동일한 조건을 통해 실험을 통해 동일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오차는 존재할지언정). 귀신의 존재성은 지금까지 과학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과학에서 밝힌 것은 우리가 심령현상을 겪을 때 일어나는 물리적인 자극들뿐입니다. 가령 우리가 심령현상을 느낄 때 대개 그 장소에는 초저주파가 발생합니다. ghosts and very low frequency를 구글에 치시면 아시겠지만, 귀신의 존재가 보증되지 않더라도 특성 장소에 초저주파를 흘려보내면 인간은 심령현상을 느낀다고 주장합니다. 폐가가 대표적으로 그런 초저주파가 흐르는 장소들이고(왜 거기 흐르는지는 모릅니다), 신성함을 느끼는 대형교회의 오르간 소리에서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신성함이나 비물질적인 실체는 이런 물리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심령적 현상들, 비물리적인 실체가 만들어낸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모두 물리적인 언어로 환원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배후에 비물리적인 실체가 있다고 말입니다. 과학의 언어에서는 실험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반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경험계를 떠난 것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 법칙이 수학으로 완전히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뒤에 무언가가 있음을 증명할 수 없고, 반증할 수 없습니다. 비물질적인 실체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물리주의자들은, 더 이상 그런 형이상학으로 초월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을 보자고 합니다. 이것에 논리적인 완벽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정합성으로 따지자면 데카르트의 이원론보다는 물리주의가 훨씬 나아보입니다. 데카르트는 정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어떻게 연관을 맺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리주의에는 그런 부담이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니까요. 따라서 물리주의는 이원론에 비해 논리적 정합성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물질계 안에 살므로 학문적으로 그 외의 가능성을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세계가 물질밖에 없다는 유물론이나, 모든 것은 물질으로 환원된다고 하는 물리주의는 또 다른 형이상학입니다. 다만 물리주의는 물질계를 초월하지 않기로 한 형이상학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물질적인 언어로 환원되다면 도대체 우리가 따로 비물질적 실체를 인정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는 겁니다. 이미 논리적 정합성이 완벽한 이론에서요(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물리주의는 완벽한 이론은 아닙니다. 감각질의 문제는 (아직) 물리주의에서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약간의 형이상학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는 물리주의를 옹호하겠습니다. 왜냐면 이보다 최선의 대안은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리주의의 레토릭으로 이원론을 현상적으로 해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누구나 들어보셨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과거에 우리는 번개나 천둥을 신의 진노로 이해했고, 장마나 가뭄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이미 물리적인 언어로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틀을 그대로 영혼의 문제나 비물질계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정립된 과학적 이론을 뇌 안에 가지고 원시사회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봅시다. 상상적인 가능성이지만, 저는 그때의 원시인은 결코 돌을 숭배하거나, 영혼의 존재를 믿거나, 어떤 초자연적인 실재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들이 이미 자연 안에서의 '물리적인 언어'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논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방향도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비물리적인 개념들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샤머니즘의 발생에 관하여, 자연과 인격이라는 개념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개념, 사고관이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돌이 물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돌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저는 문헌학자가 아니라 비물리적인 실체에 대한 개념의 정확한 기원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같은 도식을 적용하고 싶습니다. 비물리적인 실체에 대한 물리적인 언어를 제공하면 비물리적인 실체를 더 이상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든 비물리적인 언어가 물리적으로 환원된다면, 우리는 그것들에 지위를 부여할 이유가 없습니다. 돌에 대해 숭배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물리적인 실체에 대한 존재상정과 돌이라는 물질 배후에 어떤 실체가 있다는 것은 같은 논리적 지위를 지니게 됩니다. 모두 물리적 언어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돌을 숭배하지 않으면서 영혼이나 심리현상과 같은 비물리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이유가 있다면 똑같은 지위를 부여하는 물리주의자가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논의를 따라오기 위한 기초적인 논의들입니다. 저는 물리주의의 언어 안에서 영혼이라는 개념을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영혼이라는 단어가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영혼이라는 실체를 가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단순히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영혼의 지위가 정당화됩니까? 우리는 성경을 대개 플라톤적인 시각을 끼고 읽습니다. 말하자면, 현실과 내세, 육체와 영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구분하고 하나에 방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으로, 중세 교부철학자들이 플라톤의 철학을 수용하고 만든 인식의 틀입니다. 신학의 조상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실제로 플라톤주의자였고, 그의 글들은 그런 시각에 입각해서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견해를 수용해야 할 당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영'적이라고 말하고, 영혼이라고 말할 때, 실제로 우리가 지칭하는 것들은 비물질성에 있지 않습니다. 대개 그런 상황들은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때야 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고, 실제로는 물리적 현상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영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경의 가치관을 토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신체를 토대로 물질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이 하나님과 소통한다고 말할 때 그 영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은 어디있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시냅스를 활용해서 단어들을 구성해서 무릎을 꿇고 실질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만약 고대시대의 영혼이라는 개념과 샤머니즘의 문제를 엮어서, 영혼이라는 개념을 비슷하게 이해한다면 우리가 영혼이라는 단어를 제거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실재한다면 우리는 데카르트의 문제와 같이 똑같이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물질이 아닌 영혼이 신체에 관련하냐고 말입니다.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최선의 대안은 영혼은 실제로는 어떤 물질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든가, 아니면 물리주의적으로 그 개념을 제거하는 것뿐입니다. 과학이 현상을 설명하는 이 세계에서 더 이상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원론적인 영혼의 존재를 가정했을 때 우리는 head change의 문제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뇌를 이식했을 때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를 누구로 보아야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대로 저는 인식주체를 담지하는 뇌가 그 사람의 지위를 부여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옮겨진 몸에서 원래 뇌를 가졌던 사람을 통일된 신체의 주인이라고 본다면 그때 그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뇌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지 않은 분들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육체와 영혼이 이분법적이라면 우리는 결국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영혼은 뇌에 있다고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뇌를 아무리 연구해도 물리적인 언어가 아닌 영혼이라는 것을 특정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생각해봅시다. 뇌의 특정부분을 영혼으로 꼽는다고 합시다. 이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시신경을 제거하여도 그 사람의 identity는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가능성 중에 고려할만한 것은 예전에 언급했던 의식의 on/off 스위치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이 사라질 때 우리는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스스로를 인지하지도 못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거나 육체의 심리적 자극을 만든다면 가장 핵심 부분인 의식에 관련해야 할 것입니다. 즉, 영혼을 의식의 스위치에 담겨있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럽니까? 뇌의 특정 부분이 의식의 switch가 된다는 사실이 영혼의 존재를 보증합니까? 알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있다 사라진다는 현상뿐입니다. 더 이상 성경에 쓰여있다는, 대중이 공유하지도 않는 언어를 가지고 아무 합리적인 근거도, 이유도 없이 물질적 언어에 비물리적 언어를 덮어씌울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따라서 영혼이라는 개념을 과감히 제거할 것을 주장합니다. 성경을 벗어나서 더 이상 학문적인 세계에서 비물리적인 담론들이 의미있는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이미 물리적 언어들이 그 설명을 하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저에게 하나의 과제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원론적인 영혼의 개념이 사라질 때, 도대체 우리의 의식주체는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어디있는가 그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저는 영혼이라는 개념을 제거하고,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우리의 의식작용에 맡길 것을 권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물질계를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기억들을 만들어냅니다. 우선적으로는 신체적 기억들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 몸에 쌓인 습관과 같은 기억들, 고통의 신체적 경험들 등 우리 체험의 유기적인 총합을 말합니다. 저는 이 신체적 기억들은 body라는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뇌로 이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여러 가지 것들은 신체에 여러 작용을 일으키지만 결론적으로는 우리에게 뇌에 기억으로 남게 합니다. 우리가 물에 빠졌던 신체적 기억은 강가에 갈 때 무의식적으로 신체가 거부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 뇌 속에서 그 이미지를 반복하여 생산해냅니다. 저는 여기서 강한 form으로 우리의 신체적 경험, 기억들은 모두 뇌의 기억으로 전환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즉, 우리의 뇌는 우리의 신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논의를 꺼내는 이유는 뇌에 인간의 구원를 두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감각적인 모든 경험들이 신체를 통해 뇌의 기억(혹은 스냅스들의 연결 그 자체)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신체가 온전할 때 인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뇌일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면, 구원이 실재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신체 그리고 그 보다도 뇌에 있다고 주장하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head change가 일어나도 구원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바뀐 몸에서 신체의 기억과 뇌의 기억은 다르겠지만, 뇌는 신체를 동화하여 새로운 신체의 기억-뇌의 기억의 관계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저는 이 바뀐 신체-뇌의 관계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겁니다. 바뀐 신체-뇌는 이전의 (신체-)뇌의 관계를 기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신체가 바뀌고 그 몸이 뇌가 가진 기억과는 달리 행동한다고 해도, 뇌의 의식작용들은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겠지만) 신체와는 달리 고유한 자의식을 형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다면, 전의 몸의 관계에서 뇌와 이후 몸의 관계에서 뇌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회심을 없애지 않는 이상 저는 구원의 문제는 물리주의 안에서 이런 하나의 모델로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완벽한 모델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 기억조작의 논리적 가능성을 이 구원의 모델 안에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조작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준의 세계가 온다면, 저는 저의 구원의 모델이 그 상황에서 통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령 충실한 IS 대원의 기억을 충실한 기독교 신자에게 집어넣는다면 구원은 어떻게 될까하는 문제에 대해 저는 논리적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상황이 가능하지 않기를 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