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픽션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2 | 조회수 | 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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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경계를 넘는 실험울프는 새로운 소설의 이론가였다. 이 새로운 소설을 울프는 ‘모던 픽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울프가 말하는 ‘모던 픽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울프는 1927년 일기에 “새로운 것? 버지니아 울프가 이루어낸? 그런데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가?”라고 썼다. 이 자문에서 평생토록 ‘모던 픽션’을 고민했던 한 작가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아홉 편의 소설과 평생 써내려간 자전적 글에서 울프는 끊임없이 소설의 관습에 도전하고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고군분투했다. 20세기 초는 영국 소설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울프도 극찬한 제임스 조이스를 비롯해서 기성 소설의 문법을 깨트리고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는 작가들의 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울프는 이런 변화의 조짐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오늘날 영국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출몰했다.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 포드 매독스 포드 같은 작가들은 대체로 ‘새로운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불렸다. 이들과 나란히 E. M. 포스터와 윈덤 루이스가 있었고, 약간 다른 관점에서 사실적 글쓰기를 추구하던 아널드 베넷과 H. G. 웰즈가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듯이, 울프는 베넷과 웰즈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울프처럼 자의식과 내면을 표현하는 것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울프와 대립각을 세우긴 했지만, 베넷과 웰즈 역시 기존 소설 작법을 혁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을 표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울프는 당대의 현실에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른 행보를 보여줬다. 울프의 이론은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술운동의 핵심을 꿰뚫었다. 모더니즘은 무엇인가? 원래 모더니즘은 1910년대에서 1930년에 걸쳐 절정에 달한 근대화(modernization)라는 새로운 세계 변화의 현실을 담아내기 위한 예술기법을 의미했다. 이 변화는 스타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까지도 포괄하는 거대한 이행이다. 울프는 이런 현실의 전환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이를 이론화하고자 했다. 새로운 소설의 문제에 대해 다룬 〈모던 픽션(Modern Fiction)〉과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Mr. Bennett and Mrs. Brown)〉은 모더니즘 소설을 위한 선언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앞서 소설가 못지않게 비평가로서 울프를 조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울프의 비평은 대체로 선언의 형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울프는 언제나 선언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만큼 근대성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울프를 단순히 ‘여류작가’로 범주화해서 당대를 풍미했던 모더니즘 작가 중 한 명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울프에게 ‘모던 픽션’은 단순하게 소설의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울프에게 ‘모던 픽션’은 기존 소설의 경계를 뛰어넘는 실험이었다. 이 대담한 실험에 대한 당대 동료 작가들의 반응은 흥미롭다. E. M. 포스터는 “울프의 예술은 매우 특이해서 학계에 있는 비평가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 포스터가 보기에 울프의 소설은 도덕적이지도 않고 거창한 철학을 표명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구불구불 정처 없이 늘어지는 긴 문장은 확실히 당시의 관습으로 본다면 낯선 것이었다. 베넷과 웰즈가 불평을 할 만도 했던 것이다. 베넷은 울프의 《제이콥의 방(Jacob’s Room)》에 대한 리뷰에서 당시의 젊은 작가들을 거론하면서 “사회의 상태를 묘사하기에 분주할 뿐,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베넷은 울프의 소설에서 “인물 성격이 생생하게 살아남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울프가 지나치게 “독창성과 명민함에 집착한 나머지” 세부 묘사에 치중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이었다.2) 울프의 에세이 〈모던 픽션〉과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은 베넷과 같은 작가들의 비판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리얼리즘을 시도했던 베넷에게 소설은 무엇보다도 인물 성격을 창조하는 것이다. 베넷에게 울프의 소설 《제이콥의 방》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런 베넷의 생각이 유별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모더니즘 일반에 대한 리얼리즘의 비판에서 이런 입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울프는 《제이콥의 방》을 비롯한 소설에서 빈번하게 ‘틈’과 ‘부재’를 사건의 출현으로 그려낸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울프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있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부재’가 곧 시간의 ‘틈’을 만들어내고, 울프는 거기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곤 했을 것이다. 이 도저한 부정성의 세계가 곧 울프의 미학을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결국 과거의 이야기다. 이 과거야말로 무엇인가 사라진 흔적들이다. 아무리 기억으로 재생해낸다고 해도 결국 ‘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울프가 소설을 통해 추구한 ‘의식의 흐름’은 바로 이런 ‘부재’와 ‘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노력이었다. 삶을 적절하게 다루는 글이런 소설은 기존에 있던 이야기의 구성과 완전히 다른 무엇일 수밖에 없다. 기존의 소설이 현실성을 설정하고 일정한 형식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과 달리, 울프의 소설은 내면의 의식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베넷처럼 인물 성격이라는 일종의 전형성을 염두에 두는 이들에게 울프의 이야기는 생소한 형식이었을 것이다. 울프를 사로잡은 것은 “삶을 적절하게 다루는 글”이었다. 이 지점에서 울프의 글은 전기적 글쓰기와 허구의 소설이라는 갈래로 나뉜다. 1908년 울프는 언니 바네사 벨의 남편 클라이브 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삶을 적절하게 다루는 글이라는 미묘한 주제에 대해 쓰고 싶다.”라고 말한다. “삶을 적절하게 다루는 글”은 도대체 무엇일까? 울프 자신의 삶을 글로 쓰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1908년에 “아직 어떻게 쓰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데, 1927년에 쓴 〈새로운 전기(The New Biography)〉와 1940년에 쓴 〈전기의 예술(The Art of Biography)〉은 이런 초기 문제의식의 완성이라는 생각이다. 전기라는 장르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글쓰기 형태이다. 일찍부터 울프는 전기적 소재를 거울삼아 글쓰기를 시도해왔다. 이런 노력은 《밤과 낮(Night and Day)》에서 빛을 발한다. 이 소설에서 울프는 전기와 허구를 서로 대조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전기에 대한 이 같은 울프의 관심은 상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울프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영국 전기 사전(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을 편찬해서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울프가 전기를 상위의 글쓰기 양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런 집안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울프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양육비로 사전을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사전을 만드는 일을 울프 가족이 전폭적으로 지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울프는 곳곳에서 이 사전 편찬이 자신과 동생을 병약하게 만들었다고 썼다. 울프의 아버지가 사전 편집을 시작했던 1882년은 바로 울프가 태어난 해이다. “68권짜리 검은 책”은 울프에게 가공할 만한 기억을 남겨놓았던 것이다. 말년에 울프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기로 쓰면서 프로이트의 ‘양가감정’이라는 개념을 빌려와서 아버지에 대한 모순적 감정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사랑과 증오가 하나라는 프로이트의 통찰은 울프에게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쥐어줬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울프를 전기로 이끈 계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 찾아왔다. 1904년 울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역사가인 프레더릭 메이틀런드는 울프에게 그의 전기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1906년에 울프는 《레슬리 스티븐의 생애와 학식(The life and letters of Leslie Stephen)》이라는 책에 포함될 〈레슬리 스티븐(Leslie Stephen)〉이라는 전기적 에세이를 썼다. 이 에세이는 자녀들과 장난감 놀이를 하고 저녁에 책을 읽어주는 자상한 아빠의 모습이 등장한다. 비싼 시가를 피우지 않고 파이프 담배를 피웠고, 옷이 다 헤질 때까지 입던 검소한 아빠를 울프는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울프의 아버지는 집안 여성들에게 일방적 인내를 강요하는 폭군에 가까웠다. 사전을 집필하는 동안 집안 식구들은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일방적 가장의 횡포도 묵묵히 감내해야 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형형색색의 불꽃”이라는 묘사가 있을 정도로 울프의 아버지는 ‘한 성깔’ 하는 위인이었고, 이런 아버지의 존재는 울프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울프는 바깥에 내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상하게’ 그려야 했다.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실제와 허구의 괴리야말로 울프의 소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척도였다고 할 수 있다. 전기에 대한 울프의 관심은 치열하게 허구를 진리와 대면시키고자 했던 작가 정신의 발로이지 않을까. 울프의 소설 세계를 관통하는 씨줄은 전기적 기록이었다. 울프의 일기는 소설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글쓰기이다. 일기는 단순히 소설의 소재라기보다 삶에 대한 적절한 글쓰기를 도모했던 울프의 사유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여성의 일상을 소설로 쓰다무엇보다도 울프의 글쓰기에 배어 있는 전기적 요소는 ‘여성’이라는 그의 존재에서 기인한다. 울프가 글을 쓰던 당시에 여성의 일상은 소소한 것으로 취급당해 소설의 소재로 쓰기에 부적절하다는 편견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울프가 자전적 글쓰기를 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실험이었다. 본격적으로 울프가 전기적 글쓰기를 시도한 작품은 《존재의 순간들(Moments of Being)》에 실려 있는 〈추억들(Reminiscences)〉일 것이다. 조카 줄리안 벨에게 주는 서간 형식으로 쓰인 이 자전적 에세이에서 울프는 자신의 언니 바네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존재의 순간들》은 울프 사후에 남편 레너드가 발굴한 원고들을 한데 묶은 책인데, 〈추억들〉을 쓰던 무렵 울프는 이미 바네사의 남편인 클라이브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니에 대해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울프는 클라이브를 공공연하게 유혹한 것으로 유명한데, 바네사에 대한 울프의 이야기는 이런 묘한 관계에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존재의 순간들》에 등장하는 바네사의 모습은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묘사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언니를 지켜보는 울프의 시선은 아버지의 것에 가깝다. 울프는 클라이브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네사에 대한 자신의 묘사가 충분하지 않고 능력에 부치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아주 가까우면서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것이 울프의 생각이었다. 울프는 바네사를 그려내면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영원히 글로 포착할 수 없는 ‘미끄러지는 삶’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 허무한 상실을 다시 잡아내기 위해 울프는 펜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들〉에 비견할 만한 울프의 자전적 글을 꼽자면, 아마도 〈우정의 갤러리(Friendship’s Gallery)〉일 것이다. 이 에세이는 50대 이후에 울프가 천착했던 “아직도 조명 받지 못한 여성의 삶”을 글로써 진술하겠다는 문학적 페미니즘의 맹아를 보여준다. 이 글은 시간상 〈추억들〉보다 먼저 쓰이긴 했지만 훨씬 진취적인 울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정의 갤러리〉에서 울프는 자신을 어머니처럼 대해준 바이올렛 디킨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바이올렛은 빅토리아시대에 여성의 덕목으로 여겨지던 모든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울프는 이런 바이올렛을 자신의 글에 담아 영원히 남기고 싶어 했다. 울프 스스로 이 글을 가리켜 바이올렛을 위한 전기이자 신화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당시 울프의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면서 바이올렛은 울프에게 〈가디언〉에 글을 기고해볼 것을 권한다. 또한 울프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 혼신을 다해 간호하기도 했다. 이런 바이올렛의 모습을 울프는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이올렛의 삶을 찬양하려는 목적이다. 여기에서도 울프는 바이올렛의 삶이라는 전기적 요소를 소설적인 방식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만들어내는 작업에 집중한다. 그래서 이 글은 반쯤은 전기적이면서 동시에 허구적이다. ‘모던 픽션’은 이처럼 사실과 허구 사이를 가르는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에서 탄생한 새로운 소설인지도 모른다. 울프의 자전적 글쓰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울프는 세세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울프는 간단하게 리얼리즘을 판타지로 바꿔놓음으로써 이 난제를 훌륭하게 처리한다. 자신에게 거대한 영향을 미친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자신에게 너무도 아름다운 선물이었던 어머니 같은 바이올렛을 그려내기 위해 울프는 사실을 그대로 글로 옮기기보다 자신의 판타지와 뒤섞인 현실을 만들어냈다. 사실을 날조한다기보다, 현실의 인물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봄으로써 소설처럼 꾸며낸 것이다. 전기와 소설의 경계를 모호하게 조성함으로써 울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도한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울프가 쓴 전기는 사실상 소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일 그의 소설은 이런 전기적 요소를 자양분 삼아 세상으로 나온다. 울프에게 삶이란 이런 의미에서 소설의 언어로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 날것들이다. 개인사를 소설로 다시 쓴다는 것은 실제 삶 자체를 마치 울프 자신이 발명한 것처럼 여기는 과정인 것이다. 울프의 소설을 읽고 자전적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울프의 소설이야말로 삶이었다는 사실을 이 지점에서 깨달을 수 있다. 그에게 삶은 실제의 차원을 갖고 있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소설에 담겨 있는 허구 자체였다. 울프를 실험적 글쓰기로 밀어 넣은 힘문자와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울프에게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쓰는 자로서 울프를 자리매김하게 만든 것은 삶에 대한 궁금증이었을 터이다. 마음 깊이 도사린 우울을 울프는 끊임없이 삶에 대한 유머러스한 고찰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울프의 소설은 전통적 소설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밤과 낮》에서 울프는 기존의 소설 형식으로 결코 당대의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경향은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더욱 강화된다. 초기에 아버지를 ‘영웅’으로 그려냈던 어린 울프의 필치는 소멸해버린다. 《제이콥의 방》에 오면 ‘위대한 남성들’은 시대와 함께 스러져가는 애잔한 군상들로 그려질 뿐이다. 《델러웨이 부인(Mrs. Dalloway)》과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울프의 경험에 기초해 있다. 《파도(The Waves)》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역사와 개인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의 외피를 뒤집어쓴다. 《올란도(Orlando)》와 《플러쉬(Flush)》는 어떤가. 둘은 현실의 차원을 넘은 전기적 글쓰기를 선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저명한 개의 전기”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플러쉬》는 전기문학 자체에 대한 패러디처럼 보인다. 플러쉬라는 강아지의 일생을 중심으로 쓴 이 소설은 우리에게 울프가 얼마나 유머러스한 세계관을 소유했는지 알려준다. 《플러쉬》의 첫 대목을 한번 읽어보자. “이 회고록의 대상이 아주 유서 깊은 가문의 후손 중 하나라는 주장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그러므로 이름 자체의 기원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백만 년 전, 현재 스페인이라고 불리는 고장은 창조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하게 요동쳤다. 세월이 흘러 초목이 생겼다. 자연의 법칙은 초목이 있는 곳에 토끼가 있으라 정했다. 토끼가 있는 곳에 섭리는 개가 있으라 명했다. 여기에는 어떤 의문이나 논쟁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토끼를 잡는 개가 왜 스패니얼이라고 불리는지 물어보면 의심과 곤혹스러움이 시작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카르타고인들이 스페인에 상륙했을 때 온갖 덤불과 수풀에서 쏜살같이 달리는 토끼를 보고 병사들이 “스팬! 스팬!”이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다고 말한다. 그 땅은 토끼들로 우글거렸다. 그리고 카르타고인들의 언어에서 스팬은 토끼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 땅은 히스패니아, 혹은 토끼들의 땅으로 불렸고, 거의 즉각적으로 감지해서 전속력으로 토끼를 쫓는 개들은 스패니얼 또는 토끼 사냥개라고 불렸다.”3) 마치 박물지를 읽는 것 같은 이 도입부는 18세기 소설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실 그 전통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시작한 소설은 점점 플러쉬라는 한 개의 시선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늙은 플러쉬가 응접실에서 조용히 죽어가는 모습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동물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이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울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나는 대목에 이르면 플러쉬는 울프의 삶과 겹쳐진다. 이런 경험은 원숙한 시절의 작품인 《세월(The Years)》에 이르면 역사의 안과 밖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역사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삶을 적절하게 다루는 글’에 대한 갈망이다. 울프를 끊임없는 실험적 글쓰기로 밀어 넣은 힘이 바로 이 갈망이었을 것이다. 1927년에 쓴 〈새로운 전기〉에서 울프는 진리의 화강암과 개성의 무지개를 서로 비교하면서 전기문학을 논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1940년에 쓴 〈전기의 예술〉에서 전기의 사실과 소설의 자유를 서로 대비시키는 논의로 되풀이된다. 그에게 전기적 사실은 견해에 따라 바뀌는 것이지 과학적 진리처럼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삶은 언제든지 다양한 입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삶에서 진리나 사실을 적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울프의 생각이었다. 전기 작가는 광부의 카나리아처럼 ‘쓸모없는 전통의 오류’를 누구보다 빨리 알리는 한발 앞선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울프가 어떤 관점에서 전기를 바라봤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전기 작가야말로 가장 실험적인 전위라고 봤던 것이다. 삶이라는 날것의 재료를 가장 먼저 취급하고 거기에서 전통적 글쓰기 형식으로 포섭할 수 없는 다양성을 발견해내는 것이 전기 작가의 임무라는 것이 울프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실험하고자 했던 당사자가 바로 울프였다. 그가 이론화하고자 했던 ‘모던 픽션’은 삶이 곧 소설이고 소설이 곧 삶인 글쓰기의 경지를 지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정신은 19세기부터 시작된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핵심이기도 하다. 울프는 삶과 글을 일치시키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한 실험적 작가였다. ‘모던 픽션’은 바로 이런 실험을 지칭하는 비형식적 글쓰기를 가리키는 울프의 개념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네이버캐스트] 모던 픽션 - 삶과 글을 일치시키는 방법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