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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물리주의 세계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3-14 조회수 426

헤겔이 세계의 운동 원리, 주체인 실체로서 정신을 그다지도 강력하게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반 이후 많은 사람들은 정신, 영혼, 마음의 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일찍이 라 메트리(J. O. de La Mettrie, 1709~1751)는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기계론(L'homme machine, 1748)』과 『인간식물론(L'homme plante, 1748)』을 폈었다. 그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기계적 운동만을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의식 활동 일체도 물리적 자극과 육체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란 물질적 기계 운동의 특수한 부산물일 뿐으로, 실체로서의 정신은 ― 인간적인 것이든 신적인 것이든 ―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제 헤겔 비판으로부터 자리를 잡은 신칸트학파의 랑게(F. A. Lange, 1828~1875)는 "영혼 없는 영혼론", 곧 "마음 없는 심리학"(Psychologie [Seelenlehre] ohne Seele)을 발설했고(F. A. Lange, 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 Iselohn/Leipzig 1866, Bd. 2, S. 381), 20세기 중반을 넘자 마침내 플레이스(U. T. Place)는 '의식은 두뇌 과정'이라는 물리주의적 원칙을 주창하였다.("Is Conciousness a Brain Process?", in : Britisch Journal of Psychology, 47(1956), Pt. 1, pp.44~45 참조) 그 후 주로 영미 심리철학들은 물질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 현상에 대한 용어들은 물리적 현상 외에 아무런 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실제로 과학의 발달에 의해 마침내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제거적 유물론, Eliminative Materialism) 정신 내지 심리 현상의 정체는 오로지 신경 과학(neuro science)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유형의 심리상태는 그것에 상응하는 일정한 물질적 상태, 곧 두뇌 신경 상태가 있으며, 양자는 존재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유형 동일론, Type-Type Identity Theory 또는 환원적 유물론, Reductive Mate-rialism) 가령, '사랑'이란 오른쪽 1, 2, 3, 4, 5번 뇌세포가 활발하게 운동한 상태이고, '미움'이란 왼쪽 1, 3, 5, 7, 9번 뇌세포가 격렬하게 운동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조에 따라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정신', '영혼', '마음[]', '자아', '인격', '의식' 따위는 물리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한 지시하는 바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유물론적, 물질주의적 주의, 주장들은 학자들 사이의 갑론을박을 거치면서 점점 세밀화 내지 교묘화해 가고 있는 중이므로, 아직도 이론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만으로도 '정신' 없는 물리주의가 인간 세계에 미친 파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인간 세계의 질서 원리를 새로이 모색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물리주의, 다시 말해 세상 만물의 이치를 물리적 내지는 물리학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의당 '정신'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고, 인간에게서도 자기 원인(causa sui)적인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당위를 허용치 않음으로써 무엇보다도 결국 인간 사회의 질서 원리인 도덕이 설자리를 없애 버린다. 물리적 법칙에 따라 만물은 운동하는 것이고, 바위와 소나무 사이에, 사과 나무와 까치 사이에, 개와 개 사이에 당위가 없고 윤리가 없는데, 아무런 자유로운 의지나 의사()없이 똑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 밑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당위, 윤리가 있겠는가?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데카르트가 새삼스럽게 정신과 물체 이원론을 내놓았던 것은, 사실 세계의 진리는 승인하되, 당위적 도덕과 희망적인 성스러움을 여전히 인간 세계에 남겨 두려는 간절하고도 진지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의 세계에서는 진리보다는 선함과 성스러움이 으레 우위를 차지하는 법이니, 정신과 물체의 공존이란 사실상은 여전히 물체가 정신에 종속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정신이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한 모든 사회 질서의 권위는 '고귀한 영혼'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본거지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감성의 '독자성'이나 감각의 '자유로움'은 비천함을 면하기 어렵다. 인간을 철두철미 감성적, 신체적 존재자로 파악한 마르크스(K. Marx, 1818~1883)가 종교(기독교)는 "민중의 아편"(Aus den Deutsch-Franzosischen Jahrbuchern, in : Fruhe Schriften, Bd. 1, hrsg. H.-J. Lieber/P. Furth, Darmstadt 1989, S. 488)이라고 규정한 것이나, 니체(F. Nietzsche, 1844~1900)가 "신들은 죽었다"(Also sprach Zarathustra, in : Nietzsche Werke, Bd. Ⅲ, hrsg. K. Schlechta, Munchen/Wien 1980, S. 340)고 외친 것은, 신을 정점으로 하는 정신 체계의 본거지에 대한 감성적 공격이다. 이에 비해 20세기 후반 미국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물리주의는 동일한 주의, 주장의 이성적 변형이다. 물리주의는 이성의 옷을 입은 니체주의인 것이다.

이성적인 논증과 과학적인 사실 입증을 '토대로' 정신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신의 존재와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을 부정하고 나면, 선의 관념 자체가 원천을 잃게 되는 것이고, 결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자연 물리적 사물들의 관계이거나 아니면 감성적 욕구의 교환, 곧 이해() 관계로 환원될 따름이다. 신도 이성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곧 '정도()'를 거론할 때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호 역학 관계를 맺고 있는 운동체들인 사람들 사이의 힘의 균형밖에는 없다. 이 판국에서 '정도'를 제시하는 것은 하느님도 아니고, 이성을 대변하는 탁월한 현자()도 아니고, 오직 힘있는 '다수'일 따름이다.

그런데 잦은 이합집산 중에 형성되는 '다수'는 변덕장이다. 그래서 아침나절의 '정도'는 저녁나절에는 이미 '정도'가 아니기도 하고, 오늘의 정도는 내일이면 벌써 '사도'()일 수 있으며, 동쪽에서의 '정도'는 서쪽에서는 '헛소리'일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말할 것도 없이 윤리적 가치 또한 상대화되고, 이름하여 도덕 '상대주의'가 득세한다. 도덕의 상대성이란 결국 무도덕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들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우리에겐 악한 것임을 승인하게 되면, 한 행위가 보는 이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척도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서 자신을 신체적 존재자라고 공공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체적 삶의 질은 십중팔구 사람들의 영리한 계산능력 곧 지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차라리 '지력이 좀 모자란다'는 평은 감내할 망정 '도덕적으로 악질이다'는 평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못 견뎌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어'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론은 그야말로 '복음'이다. 형이상학적 명제들과 함께 윤리적 판단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확인된 마당에 윤리적 강령들은 어떤 본부에서 발령이 되든 어떠한 권위도 얻지 못한다. 물리주의는 사람들을 도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복음'인 것이다. 그렇게 '해방된' 인간은 그래서 하나의 물체가 된다. 물체에게 분명 도덕적 가치어들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인간의 존엄성'을 얘기하는 것은 인간이 여타의 생명체보다 지력이 뛰어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온갖 사물을 부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사람 중에서도 가장 존엄한 사람은 가장 지략이 출중하고 뭇 사람을 굴복시키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엔가 쓸모가 있어서 가치가 있는, 그러니까 수단적 가치를 갖는 물건과 달리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그러니까 목적적 가치를 가진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인간을 스스로 이렇게 높여 보는 것은, 만물 가운데서 사람만이 유독 윤리적 당위 질서에 자신을 복종시킬 줄 알고, 바로 그런 한에서 신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이지 물리주의의 주장이 사실이고,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실에 근거해서 '도덕의 세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역시 물리적인 의미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사회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만사는 기껏해야 물리적-생리적-심리적으로 설명될 것이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윤리 도덕에 그 정당성의 뿌리를 두고 있던 국가 사회의 법령들의 권위도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한낱 물리적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우리가 남의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뻗친 감나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남의 집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듯이, 배고픈 나머지 남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은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책임은 스스로 행위한 자에게나 물을 수 있는 것이지, 물리-생리-심리적 인과 연관에서 기계적으로 운동한 사물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이른바 '범죄자'란 단지 대개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한 자를 지칭할 터이니, 범죄자는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일 수가 없고, 오직 치료의 대상이거나 수리()의 대상일 따름이다. 톱니가 손상돼 빨리 내닫는 시계는 톱니를 좋은 것으로 바꿔 주거나 쓰레기로 버리듯이, 아비가 없어 죄지은 자에게는 아비를 만들어 주고, 정서가 불안정하여 남에게 행패를 부린 자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해주거나 그래도 쓸모가 없으면, 또는 수리비가 효용보다 더 들 것 같으면, 내다 버리는 것이 물리주의적 처리 방식이다.

물리주의적 세계에는 기껏해야 '물격'()과 그것의 등급인 '물품'()이 있을 뿐 '인격'(), '인품'()의 자리는 없다. 그런 곳에서 이른바 '선비 정신'이란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생리-심리적 운동 규칙 이상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며, "현대인들은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더 추구한다"는 따위의 말은 애당초부터 무의미한 말일 수밖에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신’ 없는 물리주의 세계 (철학의 주요개념,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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