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이젠은 랑케의 입장을 정교화하고 명료화한다. 랑케의 범신론이 신을 모든 역사적 삶 속에 직접적으로 현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역사학자를 감정이입에 의해 그런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드로이젠은 그런 참여가 직접적으로 감정이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탐구를 통해 성취된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편재하는 신성과 함께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자아들, 곧 자율적 개인들과 함께 하는 참여이다. 자율적 자아들은 공동적인 삶의 형태나 언어 속에서 그 자신을 표현하고, 그러한 공동적 표현들이 역사학자들에 의한 역사적 이해를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그 공동적 표현들이 개별적 자아가 역사에 참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열망이나 지성의 면에서 개인은 아직 역사적이지 않다. 그래서 특별히 역사적인 이해는 개인들의 감정이입적 이해(랑케)도 심리학적 이해(슐라이어마허)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개인 자체는 자신을 표현할 때에만 역사 속의 한 요소로 되고, 위대한 공동 목표의 추구 속에서 능동적으로 되고, 그렇게 역사의 도덕적 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힘들을, 곧 윤리적 공동성의 영역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역사학자를 만드는 것이지, 고립된 다른 자아들에의 주목이 역사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의 공정성은 영웅적인 자기분리, 미학적 추상, 자기 소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시간과 장소의 공동적 삶 속에 ― 즉 그의 전통에 ― 관여함에 의해 그 자신을 넘어섬에 의해서이다.
역사학자는 일정한 도덕적 영역들, 그의 모국, 그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에의 그의 귀속성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된다. 그러나 그의 참여는 바로 이러한 지양할 수 없는 일면성에 의존한다. 그 자신의 역사적 실존의 구체적 조건들 아래서의, 따라서 사안들 위에 떠 있음에 의해서가 아닌, 공정성이 그의 과제로 제기된다.(219)
드로이젠은 역사적인 것이 표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해가 성공한다고 본다. 드로이젠의 경우 해석학은 역사탐구를 지배하게 된다. 그는 슐라이어마허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수용하고, 슐라이어마허의 가정, 즉 역사가 하나의 텍스트로서 철저히 이해가능하고 내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가정을 수용한다. 이점에서 드로이젠 역시 역사를 미적 해석학의 입장에서만 이해한다. 즉 역사학자의 목표는 표현들을, 곧 역사적 공동체들의 공동적이고 소통가능한 표현들을 이해하는 것이지, 사안들, 곧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슐라이어마허에서의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을 적용하면서, 드로이젠은 그것의 전제도 공유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자유의 행위들이라고 본 역사는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이해가능하고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이해는 텍스트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현재'에서 완성된다. 그렇게 우리는 드로이젠이 랑케보다 더 날카롭게 연구와 이해가 매개에 있어서 자기 안에 포함하는 것을 규정한다는 점을 본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 역사학의 과제를 단지 미적-해석학적 범주들 속에서만 생각한다. 역사학자가 추구하는 것은 드로이젠에 의할 때도 전승의 단편들로부터 역사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