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한마디로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욕망에 대한 적극적이고 비타협적인 긍정을 요구하는 이러한 도덕원칙은 그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당혹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오기 쉽다. (성적인) 욕망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추구하라니 이것이 '건전한' 시민에게 어울리기나 한 윤리인가? 아니 이것이 윤리라는 이름을 달 만한 자격이나 있는가?
욕망은 흔히 윤리의 적으로 여겨진다. 성숙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어 욕망은 도덕적 성취를 위협하는 이물질이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파괴적이기에 억누르고 다스리고 길들여야 하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나아가서 공공의 선을 달성하는 데 일조하기 위해 개인의 사적인 욕망은 희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숙한 민주 시민의 최소한의 윤리가 아닌가?
그러나 라캉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건전한' 상식의 윤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윤리는 오히려 '권력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라캉은 정신분석이 넘어서야 하는 지배적인 윤리를 재치 있는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욕망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오라."(315) 현재의 시급한 공익을 위해 욕망은 언제나 뒤로 미루고 양보하고 심지어 포기해야 하는 부차적인 방해물이다.
이 문장을 곰곰이 현실에 비추어 보면 굳이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의 현실과 일상이 이 단순한 명령으로 철저하게 지배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쾌락은 생산성을 위해 너무나 쉽게 그리고 일상적으로 희생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미래의 막연한 안위를 위해 현재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저버린다. 심지어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와 자유의 욕망을 포기하라는 권력의 불순한 요구마저 이 문장에서 배음(背音)으로 울려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도덕적 '선'과 경제적 '효용'에 바탕을 둔 권력의 윤리는 다른 욕구, 소수의 욕망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덕과 쓸모의 이름으로 지배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다수의 욕망과 배치되는 이질적인 개별 욕망들은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쓸모없는' 욕망이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결국 기존 질서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체제 순응적인 윤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문맥에서 권력에 위협적이고 파괴적이며 비타협적인 욕망을 긍정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급진적인 정치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변화와 새 출발을 요구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