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목적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은 언어를 그 사용의 장에 되돌려 놓고 재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한 한 논리실증주의자도 후기의 비트겐슈타인과 보조를 같이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의 본래의 사용의 장으로서 일상언어에 특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에 대립한, 소위 일상언어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확실하게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철학의 문제를 처리하려는 사람들이다. 같은 분석철학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파는 영국에서 주로 옥스퍼드 대학에 자리잡고 일찍이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문제가 일상언어의 오해에서 발생한 것이고 이 오해를 정정함으로써 소멸한다는 견해는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의 간행으로부터 수년 앞서서 이미 라일(G.Ryle ; 1900~76)의 저서 『마음의 개념』(1949)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일상언어 중에 같은 언어이면서 그것이 사용되는 장면에 따라 카테고리를 달리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유리가 깨진 것은 "돌을 던졌기 때문이다"라는 경우와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라는 경우가 그 예이다. 라일에 의하면 "내가 돌을 던졌다"라든가 "유리가 깨졌다"라는 것은 정언(定言)적 진술이고 사건을 진술하는 것에 대해, "유리는 깨지기 쉽다"라는 것은 사실 가언(假言)적 진술이다 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기술되고 있는 것은 "만일 무엇인가에 부딪히면 구부러지거나 움푹 들어가지 않고 깨질 것이다"로 되기 때문이고, 사실 이것은 어느 사건에서 다른 사건을 추리하기 위한 규칙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리가 "깨지기 쉽기 때문에 부서졌다"라고 말하면 거기에서는 추리의 규칙과 사건의 양쪽이 기술되어 있는 것이고, 이것은 라일에 의하면 '반가언적' 또는 '혼합정언적'이라고 불리고, "돌을 던졌기 때문에 깨졌다"라는 두 개의 사건을 기술하는 정언적 진술과는 카테고리를 달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카테고리가 잘못 취해짐으로써 해결 불가능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체와 마음의 두 개의 실체를 인정하는 데카르트류의 이원론, 즉 라일이 말하는 '기계 속에 사는 유령의 신화'가 나온 것은 관찰 불가능한 마음이라는 실체 중에 무엇인가 외적 행동을 야기하는 원인이 있고, 마치 두 개의 사건의 정언적 진술이 문제인 것같이 믿어지기 때문이다. 라일에 의하면 이것은 실은 앞에서의 예와 같은 카테고리의 잘못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가령 "허영심 때문에 운운했다"라는 진술은 사실은 반가언(半假言)적 진술이고 누군가가 허영심을 갖는다 라는 것은 "만일 타인의 감탄이나 선망을 얻을 기회가 있으면 그는 그것들을 얻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라는 가언적 진술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일종의 행동주의라고도 해석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심신(心身)문제와 같은 철학적 아포리아를 일상언어의 용법의 음미로부터 풀어나가려는 착안은 현재까지 분석적 철학의 유력한 동기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일상언어의 용법에의 주목은 분석철학의 산모인 러셀의 언어분석에 대해서도 엄격한 비판을 하게 되었다. 이미 보아온 것처럼 러셀은 "현재의 프랑스 국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이 존재명제를 포함한다고 간주하고 그 진리치(眞理値)를 거짓으로 했지만, 만일 그렇다면 이 문장의 주장은 진실로 되고 기묘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스트로슨(P.F.Strawson ; 1910~ )은 이 러셀의 분석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러셀이 그 표현과 사용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령 "프랑스 국왕은 현명하다"라는 문장을 생각했을 경우, 이것이 루이 14세의 통치에 적용하면 진실이고 루이 15세의 통치에 적용하면 거짓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이 문장 자체의 진위를 묻는 것은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진실이거나 거짓이거나 하는 것은 문장 자체가 아니고 문장의 사용, 그것도 특히 단언을 위한 사용인 것이다. 그리고 문장이 유의미한 것은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라는 것이 아니고 그 사용의 일반적인 제 규칙이 주어지고 있는 것에 의한다.
그래서 "프랑스 국왕은 현명하다"라는 문장이 단언을 위해 사용되고 또 그것이 거짓인 것은 바로 프랑스 국왕이 현명하지 않은 경우이지, 프랑스 국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다. 이 문장의 사용은 일반적으로 프랑스 국왕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러셀이 믿는 것같이 단언의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제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이 문장이 사용되었다면 스트로슨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본래의 사용이 아니고 2차적인 사용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 대답하는 사람은, 프랑스 국왕이 없기 때문에 사안의 진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진위를 묻게 되는 진술 이외에 일상언어의 용법으로서 주목해야 할 예는 오스틴(J.Austin ; 1790~1859)에 의해 수행적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실제 일상언어의 사용의 장면에는 감사, 축사, 명령 등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같은 일정의 행위의 수행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고, 특히 진술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검토할만한 것이다.
프레게 이후 러셀과 논리실증주의자에 의해 극도로 좁혀진 의미의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로부터 후기까지의 추이에 호응하면서 일상언어파에 의해 다시 확대되고, 일단 생각할 수 있는 언어의 용법을 포괄하기에 이른 것같다. 그러나 의미와 용법은 과연 동일시되어야 할 것인가.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이점에 신중하였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훗설이 창시한 현상학은 이제까지 보아온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의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확립되고 같은 의미의 문제를 중심에 둔 것이었으며, 특히 초기에 있어서는 독일ㆍ오스트리아 학파의 다른 사상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영국에서도 많이 읽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