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철학·상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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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실증주의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1-16 조회수 1397

비트겐슈타인의 반()형이상학적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학파가 바로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다. 이 학파는 근대의 경험주의적 · 실증주의적 전통 위에 기반을 두고, 특히 현대 과학의 발달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철학 운동이다.

이 운동의 모태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학파는 1923년 비엔나대학의 슐리크를 중심으로 철학자들 · 과학자들 · 수학자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1929년 《과학적 세계관》을 발표하면서 하나의 철학 운동으로 발족되었던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의 국제대회를 거치는 동안 자못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 대부분 학자들이 영국과 미국으로 망명하여 실질적으로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학자들의 꾸준한 활동으로 많은 동조자를 얻었으며, 특히 미국의 실용주의와 접촉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가고 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을 배격했다. 형이상학적 주장이란 경험적으로 검증할 어떠한 수단도 없으므로, 결국 무의미하다. 가령 “절대자는 시간을 초월해 있다”와 같은 주장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검증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전혀 말할 수가 없다. 의미가 있는 명제란 경험적으로 그 진위(참과 거짓)가 검증되는 경험적 종합명제와 논리적 형식에 의해서 그 진위가 결정되는 분석명제, 이 두 가지뿐이다. 결국 이 두 가지 명제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닌 형이상학적 명제는 사이비 명제(pseudo-proposition)요, 무의미한(meaningless) 것이다.

지금까지는 형이상학이 공허하고 모호하다거나 또는 쓸모없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으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라고 몰아세운다.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적 명제는 논리적 구문법을 어긴 사이비 명제이므로 그 진위를 따질 수 없는 것이요, 그것은 어떠한 인식적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어와 기호의 분석, 분석 철학 본문 이미지 4

인식론에 대해서도 이들의 부정적인 태도는 단호하다. 가령 신칸트학파는 인식론이란 외부에 있는 세계의 실재성과 같은 문제를 따지는 것이므로 철학은 곧 인식론으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외부의 세계가 우리의 경험과 따로 떨어져 실재한다거나 또는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주장을 검증할 만한 방법 자체가 없다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외부 세계에 대한 주장은 절대자나 사물 자체에 관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인식론이 주제로 삼는 실재론이니 관념론이니 하는 용어들은 모두 무의미한 사이비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만일 인식론이 그 주제를 바꿔서 인간의 정신 작용을 다루는 것이라면 그러한 인식론은 심리학으로 바꿔야 하며, 철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카르나프(Rudolf Carnap), 1891~1970

카르나프(Rudolf Carnap), 1891~1970

윤리학에 관해서도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일단 경험을 넘어선 초월적인 윤리학을 배제한다. 초경험적인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일종의 초월적 형이상학이며, 따라서 그것은 역시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윤리학의 세부적인 문제까지 들어가면, 논리적 실증주의자 간에도 견해의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슐리크7)가 윤리학을 공리주의와 같은 자연주의적 이론으로 바꾸고 그것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를 없애려고 한 데 대해, 카르나프8)와 에이어는 보통의 윤리적 주장들이 실은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컨대 “거짓말은 나쁘다”와 같은 주장은 거짓말에 관해 경험적 진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어떤 초월적 가치와 관련짓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거짓말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충고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그 주장은 어느 경우에나 인식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감정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신은 존재한다”라는 형이상학적 발언이나 “거짓말은 나쁘다”와 같은 윤리적 발언은 겉으로 보아서는, 의미 없는 말들을 닥치는 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어떤 존재가 현재 존재한다거나 혹은 그 존재의 성격에 관해 어떤 정보를 알려준다거나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러한 지식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과학적 명제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철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이란 과학적 명제를 분석해서 그 의미의 내용을 분명하게 하고 철저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철학이란 의미 있는 명제로 표현되는 이론이 아니라, 그러한 명제를 논리적 분석에 의해 분명하게 하는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묘한 말이 생겨난다. 즉 철학적 명제란 엄밀히 말해서 무의미한 것이니, 사람들은 《논리 철학 논고》에 쓰인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마저 그를 이해한 다음에는 무의미한 것으로서 버려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관은 결국 철학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네이버 지식백과] 언어와 기호의 분석, 분석 철학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2008. 7. 15., 평단문화사)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39482&cid=47323&categoryId=47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