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판단을 내리거나 의사결정을 할 때에 이성적 사고의 과정을 거쳐 결단에 이르는 시간은 몇 초나 몇 분에 불과하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도 그렇다. 이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 우리가 일종의 도덕적 직관, 본능을 가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도덕적 직관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알 수 있는 잘 알려진 사고실험이 트롤리의 딜레마(Trolley’s dilemma, Thompson 1976)이다. 이 딜레마의 기본 문제는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가?”이다. 이 문제제기는 다음의 두 가지 유형의 딜레마로 제시된다.
[그림 1] 트롤리 딜레마
딜레마 1: 트롤리 사례트롤리는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선로 밖에 서 있고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선로변환기를 당기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선로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죽게 된다. 선로변환기를 당기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
딜레마 2: 인도교 사례트롤리는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선로를 사이에 둔 인도교 위에 서 있고, 바로 옆에는 상당히 무거운 사람이 한명 서 있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아래로 밀쳐서 그 무게로 트롤리를 멈추게 하는 것인데, 이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가?
[그림 출처] Marc D. Howser. Moral Minds, 2006
실험 결과, 트롤리 사례에서는 피실험자들의 85퍼센트가, 인도교 사례에서는 12퍼센트만이 그런 행위가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반응은 성별, 교육의 차이, 문화의 차이와 상관없이 공통적이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두 사례가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내용을 공통적으로 가짐에도 불구하고 피실험자들이 트롤리 사례는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것으로, 인도교 사례는 허용 불가능한 것이라 보는 도덕적 반응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성 모형(Reason model)
두 종류의 트롤리 딜레마에 대한 반응의 차이를 설명하는 전형적 방식은 도덕적 판단에 관한 전통적 설명인 이성 모형(reason model)에 기대는 것이다. 즉,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숙고과정을 통해 내려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을 단지 수단만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취급해야 한다”라는 칸트적인 도덕 원리에 의거하여 설명 가능하다. 첫 번째의 사례가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이유는 다른 선로에 있던 한 사람의 죽음은 다섯 사람을 구하는 데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한사람의 존재가 없더라도 다섯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두 번째의 사례가 도덕적으로 허용 불가능한 이유는 인도교 위의 사람을 밀치는 행위는 그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트롤리 사례에 대한 이성 모형의 설명은 이성과 감정이 뚜렷이 구분되며 마음과 행위에 관한 설명과 정당화에 있어서 이성이 감정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칸트는 이성을 감정의 고삐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우월한 마음의 기능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과 행위로 이끄는 원리이자 정당화의 적절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의 전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에서도 나타난다.
인지과학은 광의의 의미로는 ‘마음에 대한 연구’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여러 측면들 중 인지영역에 국한하여 연구가 진행되어 왔었고, 정서나 의식처럼 비인지적 측면이 개입되는 마음의 영역은 연구 영역을 벗어나는 것으로 금기시되어왔다. 그래서 ‘의식’이라는 단어가 뇌과학이나 심리학, 철학의 문헌들에서 연구 대상으로 등장한 것, 그리고 ‘정서신경과학(affective neuroscience)’이라는 연구 분야가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트롤리 딜레마와 인도교 딜레마에서 보여진 피실험자들의 반응은 합리적인 이성의 사고과정을 거쳐서 내려진 것이라 보기 어렵다. 이 실험에 참가한 피실험자들에게 어떻게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를 물었을 때 그들의 설명은 정합성이 없거나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는 우리의 직관이 인지적 내용이나 합리적 정당화 기제의 작동 여부와는 독립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한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더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완전하게 판별하려면 무수히 많은 경우들을 모두 따져보아야 하는데,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으로 따질수록 그 계산의 항목들의 수는 무한해지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끝없는 과정이 될 것이다.
반면 트롤리의 딜레마와 인도교 딜레마에 대한 피실험자들의 반응,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수 시간이 걸리는 계산과정이라기보다는 비교적 신속하게 내려진다. 이러한 특성들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선호하는 데에 사실의 일치와 불일치를 계산하는 것과 독립적인 감정의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감정 모형(Emotion model)
감정이 인지만큼 실질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신경과학적으로 그 구체적 기능이 밝혀지면서부터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19세기 인물 피니어스 게이지의 예이다.
피니어스 게이지는 철도노동자로 1848년 철로확장공사를 하던 중 폭발 사고로 쇠막대기가 그의 왼쪽 뺨으로부터 뇌의 앞부분을 통관하는 상해를 입었다([그림 2]). 이 사고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생존했고 그의 지적능력이나 언어능력도 전혀 손상이 없었으나, 사회적 관습이나 윤리적 기준을 준수하는 능력, 즉 인격이 변화했다.
[그림 2] 피니어스 게이지[그림 출처] Phineas Gage
현대에 와서 다마지오(1994)의 게이지류의 환자들에 대한 연구는 잘못된 행위를 하거나 잘못된 의사결정의 원인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데 있거나 지적 교육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기존의 생각에 문제를 제기하며, 도덕적 행위나 의사결정의 동기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게이지가 입었던 손상 부분은 전두엽 앞쪽 아래 부분(ventromedial prefrontal)으로 이와 유사한 부위의 손상을 입은 현대의 뇌손상 환자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증상이 나타난다(Damasio 1994; Green et al 2002).
이 환자들은 평균 이상의 지능지수와 사회적 윤리적 상황에 대해 정확하고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의 윤리적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감정은 합리적인 의사판단을 방해하므로 억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 의사 결정이나 성공적인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이 도덕적 판단을 이끈다는 증거 중 하나는 도덕적 딜레마에 상황에 접한 피실험자들이 지저분한 책상이나 악취를 맡게 되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강도가 높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실험(Schnall, S. et al 2008)에서도 볼 수 있다. 또, 최면을 통해 도덕적인 측면이 없는 일반적 사실을 나타내는 ‘종종’ 등의 표현에 대해 역겨움을 느끼도록 하는 실험(Wheatley & Haidt 2005)에서, 최면 후 피실험자들의 다수가 ‘종종’을 표현한 비도덕적 내용을 담은 문장 안에 등장한 행위자에 대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감정이 사실에 대한 합리적 분석을 제어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최근의 과학철학적 연구는 감정이 개인적인 인지 작용뿐 아니라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Thagard 2006)는 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전산철학적 작업을 통해 그 정합성을 보이고 있다.
하이트(Haidt 2001)의 설명에 따르면 의식적이거나 합리적인 정보 없이 작동하는 자동적인 도덕적 직관은 직면한 도덕적 상황에 대하여 화나 역겨움과 같은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을 하게 한다. 게다가,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렸을 때 당사자는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에 대한 적합한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moral dumbfounding),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정당화하는데, 이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에 의존한다는 주장의 한 근거가 된다. 따라서 이성은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대한 그럴듯한 사후의(post facto) 정당화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앞서의 트롤리 사례와 인도교 사례에 대해서도 후자의 사례는 감정의 개입 때문에 도덕적으로 허용 불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정이 도덕적 판단에 개입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감정 만에 의거한 설명은 동일한 현상에 대해 이성에 의거한 다른 설명에 비교하여 설명력이 더 크다고 볼 수 없다. 예컨대, 도덕적 판단을 정당화할 때 우리는 순전히 개인적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속 공동체의 가치관이나 생각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므로 그런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적 정당화가 적절하지 않거나 제공되지 않더라도 도덕적 판단의 일부가 이성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과 양립가능하다.
통합 모형(Dual model)

딜레마의 두 사례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는 내용 구조가 유사한 두 딜레마에 대한 도덕적 직관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두 유형의 딜레마에 대한 인지신경과학적 연구는 감정 모형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직관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두 종류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다른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피실험자들의 두뇌 반응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통해 비교하는 실험(Green et al. 2001)은 딜레마의 상황에 따라 감정이 개입하는 정도가 다르며, 이에 따라 윤리적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딜레마에 대하여 피실험자들은 인지적 반응과 정서적 반응 모두를 보였는데, 두 딜레마에서 정서와 인지가 활성화되는 정도에서 차이를 보였다.
첫번째 딜레마 상황에 있는 피실험자들의 뇌는 작업기억 등 인지기능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발한 활동을 보인 반면,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들의 활동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반면 두 번째 딜레마 상황에 있어서는 갈등을 일으킬 때 활성화되는 부위인 전방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이 더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개인적 딜레마에 속하는 이에 대한 설명은 첫 번째와 같은 비개인적 딜레마의 상황에서는 감정이 덜 개입되므로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판단해야 할 상황에 있을 때 감정과 이성의 갈등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와 같은 개인적 딜레마의 상황에서는 감정이 많이 개입되므로 인지 영역과 감정 영역의 갈등이 큰 것으로 나타났고([그림 3]), 이에 따라서 반응시간도 비개인적 딜레마인 첫 번째 상황에서보다 눈에 띄게 길게 나타났다.
개인적 딜레마의 상황에서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감정 및 도덕 인지와 관련된 뇌 부위의 신경이 더 많이 활성화되는데, 이것은 왜 그런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구할 때 더 잘 생존한다면 그러한 생존 가능성을 높이도록 재빠른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인지과정, 즉 도덕적 본능과 관련된 신경구조가 선택되었을 수 있다.
반면 첫 번째 딜레마의 상황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타주의는 긴박한 필요성이 없으므로 정서적 반응도 덜 일어난다(Gazzaniga 2005; Singer 2005). 후자의 경우는 전자에 비하여 보다 현대 세계에 제기된 보편적인 윤리적 문제로, 평화라든가 공공의 선과 같은 큰 범주의 윤리적 문제나 장기간의 해결과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처리하도록 고안되지 않았으므로, 개인적 딜레마와 비개인적 딜레마에서의 감정 개입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신경윤리로 본 도덕 판단 (뇌 속의 인간 인간 속의 뇌, 2010. 3. 26.,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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