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은 서로 다른 세 가지 뜻에서 '철학적'일 수 있다.
첫째는 문학작품 속에 들어 있는 철학적 이야기이다. 문학작품은 작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 선악의 문제, 진리의 본질, 영혼, 자아의 정체성, 신의 존재 등등 이른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담론을 그 속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낙원』, 셰익스피어의 『햄릿』,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아누이의 『안티고네』, 사르트르의 『구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이 두드러진 예들이다.
『신곡』에는 죽음 후의 삶에 대한 사념적 사색이 펼쳐져 있고, 『실낙원』에는 종교에 비추어 본 인간의 타락의 문제가 언급되어 있으며, 『햄릿』의 주인공은 존재와 무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에서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고, 『안티고네』에서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 갈등을 보이고, 『구토』에는 모든 존재의 무의미에 대한 사색이 전개되며, 『사람의 아들』속에는 참된 삶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 기록되어 있다.
둘째, 문학의 옷(형식)을 입은 철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문학작품의 예로는 볼테르의 『캉디드』와 괴테의 『파우스트』,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들 수 있다. 『캉디드』는 모든 것이 최선의 것이라 하여 결과적으로 현재의 모든 상황을 합리화하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주장에 대한 신랄한 철학적 반박을 의도한 작품이고, 『파우스트』는 지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가 양립할 수 없다는 철학적 입장을 한 과학자의 지적욕망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싯다르타』는 부처의 생애를 통해 불교적 진리를 전달한다. 위의 세 작품들은 논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잘 짜여진 철학적 담론과 다를 바 없으며, 문학의 형식을 빌려 각기 형이상학적 주장, 가치 선택의 철학적 어려움 그리고 하나의 종교적 진리를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작품 자체가 철학적인 경우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용이나 존재양식이 곧바로 '철학적'인 작품의 경우는 현대 미술사에서도 그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뒤샹의 「샘물」 이래 팝-아트, 미니멀리즘, 설치미술, 개념미술 등으로 전개되는 현대 서양미술사는 작품활동 자체가 철학적 사유의 활동과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대표적 예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음악에서의 「4분 33초」(J.케이지)나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이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이렇게 몇몇 예를 들기는 했지만, 한 예술작품이 철학적 사유이자 명제인 가장 좋은 예로는 아무래도 판화가 M.C.에셔의 작업을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폭포」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서 영원한 철학적 문제들을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지배해 온 철학적 전통 특히 서양적 전통은 세계의 객관적 존재, 그 속에서 객관적으로 구별되는 개별적 존재들, 그러한 존재의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한다. 그러나 에셔의 환상적 판화들은 우리들의 지각의 상대성, 객관적 세계의 불확정성, 모든 존재의 형이상학적 순환성 등을 시각적 창작물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준다.
예술작품 그 자체가 하나의 철학으로 변신하는 경우는 문학작품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수많은 고전 텍스트들에 대한 암시와 수많은 새로운 낱말의 조합을 통한 언어적 실험으로 가득 찬 『페네간스 웨이크』는 언어의 기능, 그 의미의 원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세 주인공의 얼토당토않은 대화와 행위의 표상을 통해서 그 자체가 신이 부재한 우주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나타나고, 17세기 초의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유명한 소설, 『돈 키호테』를 완전히 복사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창작품인 양 제시한 20세기 중엽의 아르헨티나의 가상적 작가 메나르의 이야기를 담은 「피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작가」 등이 그것들이다.
뒤샹의 「샘물」이 예술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의 근거를 물었듯이, 한 문학작품과 다른 작품을 구별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에 대한 물음은 이처럼 쉽게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다. J.바스, T.핀천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실험적 작가들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근대적 의미의 근거 찾기는 도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문학·철학 사이의 경계 허물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