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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혁명
작성자 철** 작성일 2019-10-14 조회수 211

벨벳혁명

 

[ Sametova revoluce ]

1985년 3월부터 고르바초프(Gorbatschow)의 개혁(perestrojka)과 개방(glasnost)정책의 물결이 1989년 동유럽혁명으로 이어지면서 동유럽 공산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혁명적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Gorbatschow)

1985년 체르넨크에 이어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70년대 이후부터 지속된 경제적 침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 및 사회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바로 페레스토로이카였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11월 29일 프라우다에 ‘사회주의사상과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기고문을 투고했는데 거기서 그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나름대로 명확히 정의했다.

그에 따를 경우 페레스트로이카는 당과 지도부의 발의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많은 언론들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평가하면서 역사적 비교 및 대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만일 ‘위로부터의 혁명’을 수용할 경우 소련 사회를, 위에서 지도하는 ‘상부’와 그의 사상과 지시 그리고 명령을 수행하는 ‘하부’로 나누게 된다는 것이 고르바초프의 분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르바초프는 농업 집단화를 지향하던 스탈린에게나 어울리는 개념이 바로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의 밑바탕에 ‘하부’가 있고 꼭대기에 지도자가 있는 권력 피라미드에 관한 스탈린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르바초프는 그러한 구상 자체가 현재의 소련이 배격하는 권위주의적 체계의 반영이고, 스탈린주의의 반민주적 이념의 표현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새로운 사고가 아니라 낡은 사고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르바츠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해, 인민을 위해 실현되는 하나의 혁명 과정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당은 인민과의 관계에서 인민의 정치적 전위대로 행동한다. 당이 발휘하는 주도성과 역사적 선도성은 당의 전위적 역할의 당연한 표현이다. 또한 당은 탐구의 권리를 독점하지 않는다. 누가 발의했든가에 유익한 것이기만 하다면 그 어떤 것도 페레스트로이카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페레스트로이카의 생명력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에 달려 있으며, 민주주의의 기능은 특히 인민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자극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1989년 11월 17일 나로드니 트리다(Narodni Trida) 광장에서 나치독일에 대한 항거 및 프라하 대학 폐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개최되었고 여기에는 약 15,000명의 대학생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 중의 일부가 후사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고 그것은 경찰의 과격한 개입을 유발시켰다. 진압과정에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 및 동조적 파업이 프라하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것은 후사크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1)

1989년 12월 10일 프라하에서는 국민화합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찰파(M. Calfa)를 비롯하여 반체제 운동조직인 시민포럼(Ob?anske forum: OF)과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Ve?ejnost’ proti nasiliu: VPN)의 지도자들, 비정당인, 군소 정당 당원, 그리고 반체제운동에 가담한 공산당원들이 참여했다. 한 달 후인 12월 29일 그동안 반체제활동을 주도한 바츨라프 하벨(V. Havel)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40년간 유지된 공산주의 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츨라프 하벨(V. Havel)

하벨은 ‘프라하의 봄’이 한창 진행되던 1968년 봄, ‘반대의 주제에 대해’라는 글에서 공산당의 권력독점체제에 대한 대안정당의 필요성을 제기한 젊은 극작가였다. 그는 권력의 독점이 바로 진리의 독점을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진리를 가장한 허위를 제시하는 가공할 삶적 상황을 창출하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프라하의 봄’이 실패로 끝난 이후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침묵하거나 또는 망명을 선택했지만 하벨은 1975년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던 당시 대통령 후사크에게 공개서한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인권침해에 대한 대안제시를 목적으로 ‘77헌장그룹’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7년 1월 1일 프라하에서 발표된 ‘77헌장’에서는 1975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조인한 인권 및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 권리에 대한 구제협정인 ‘헬싱키 조약(Helsinki Accords)’을 프라하 정부가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거론되었다. 아울러 여기서는 지식과 사상의 권리, 신앙의 자유, 도청 및 가택수사의 철폐 등이 요구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하벨은 1979년부터 1983년까지 ‘국가전복죄’로 복역했으며 그의 작품은 동유럽 개혁이 있기 전까지 출판은 물론 공연도 금지되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하벨은 1990년의 신년사에서 자신을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인들 모두가 전체주의적 정치체제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응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러한 질서체제의 희생자들보다는 공동창조자들만 존재한다는 관점을 피력했다. 또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도덕적으로 건강하지 못함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개선적 방향을 생각하고, 제시하기보다는 기존의 질서체제를 비난하는 데 치중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등한시한 인문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전통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 하벨의 견해였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된 혁명적 변화는 이웃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진행되었다 하여 ‘벨벳혁명(Sametova revoluce)’ 혹은 ‘비단혁명’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여기서 혁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 내지는 개념정립이 필요하다고 하겠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첫째, 혁명이란 단으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둘째, 혁명의 개념이 어떻게 정립되었는가?, 셋째, 혁명은 언제 발생할까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혁명(revolutio: revolve의 명사형)이란 단어는 로마 후반기부터 등장했는데 ‘치받음’ 또는 ‘뒤엎음(전복)’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혁명은 천문학 분야에서, 즉 케플러(Kepler)는 행성들의 순환 및 규칙적인 회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혁명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15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에서는 혁명(revoluzione)이란 단어가 정치적 분야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사회의 모순적 상황에서 이전의 정상적 상태로 복귀한다는 순환론적 역사인식에 위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변화를 인정하고 그 변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타락 이전의 낙원으로 회귀한다는 기독교사상과도 일치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따라서 당시의 개념은 오늘날과는 달리 순환론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영국의 정치가 클라렌든(Clarendon) 역시 찰스 2세(Charles Ⅱ)의 왕정복고 및 공화정체제의 붕괴를 언급하면서 혁명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었던 의미와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따라서 17세기 중엽까지 혁명은 급격한 변화를 유발시키지만 결국 다시 원상태로 회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1688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발생되었던 당시에도 여전히 유효했는데 1688년의 사건으로 이전의 긍정적인 질서체제로 회귀했다는 로크(Locke)의 언급이 바로 그 일례가 된다 하겠다. 그러나 혁명을 순환적 변화로 파악하는 개념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바뀌게 되었는데 그것은 1688년의 명예혁명을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변화의 종결점이자 특정경향이 합친 응축된 사건으로 인식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영국사회는 명예혁명이 끝난 후에도 새로운 정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했다.

1776년 아메리카 혁명에 이어 1789년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이 습격을 당하면서 사람들은 혁명이 무엇인지를 목격했다. 변화에 대한 인식과정에서 프랑스혁명은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은 이러한 인식정립에 큰 기여를 했다. 디드로(Diderot)는 백과전서에서 ‘혁명은 정치적 용어이며, 한 나라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를 지칭한다’라고 정의했고,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프랑스 정치체제의 근본적 변화 또는 법률 집행의 큰 변화’를 혁명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1688년의 영국, 1776년의 아메리카, 그리고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역사의 특정한 계기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 혁명이란 단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은 어떠한 상황에서 발생할까?

이 점에 대해 미국의 역사가 데이비스(C. J. Davies)는 1962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Toward a Theory of Revolution)에서 언급했는데 그것에 따를 경우 사회성원의 기대치(정치 및 경제적 측면)와 실제적 상황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격차가 있을 때 혁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데이비스는 자신의 논문에서 혁명이론인 ‘J곡선이론’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어 데이비스는 어느 사회에서 회복의 조짐 없이 지속적으로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거나 또는 사회적 폐해가 심각히 부각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그의 관점에 따를 경우 사회구성원들이 자기보존을 위해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했기 때문에 그들은 과격적인 개혁, 즉 혁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데이비스는 빈곤이 사람들로부터 혁명가를 배출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는 데이비스가 자신의 이론이 가지는 한계성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을 대표적 혁명들에 대입시킬 경우 그것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단혁명은 1989년 11월 19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오랜 전제주의체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체제로 전환했으며, 국가명도 기존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eskoslovenska socialisticka republika: ?SSR) 대신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eska a Slovenska federativni republika: ?SFR)으로 변경되었다. 이 당시 체코 측은 국호 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eskoslovenska federativni republka: ?SFR)으로 바꾸려 했으나 슬로바키아 측의 반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하벨

하벨

1948년 이후 40년 만에 찾아온 민주화는 선거를 통해 시작되었다. 모두 23개의 정당과 정치연합들이 참여한 1990년 6월 8일과 9일의 연방의회 및 민족회의 선거에서 벨벳혁명을 주도한 시민광장이 체코 지역에서 약 53%의 압도적인 지지를 획득했다.2)

슬로바키아 지역에서도 시민광장의 슬로바키아 측 파트너로서 역시 벨벳혁명의 주역인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승리함으로써 민주세력의 승리와 민주주의의 출발은 확실해졌다.3) 이에 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약 13%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 당은 자신들의 위상을 증대시키기 위해 체코-모라비아 공산당(komunisticka strana ?ech a Moravy: KS?M)을 결성했다. 새롭게 구성된 연방의회는 하벨을 1990년 7월 5일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1989년 11월부터 시작된 벨벳혁명은 종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벨벳혁명 [Sametova revoluce] (주제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2013. 11. 15., 김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