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림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9-08-28 | 조회수 | 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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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하건대 회화는 불평등한 매체다. 그것을 그리는 생산자의 캔버스가 2차원의 닫힌 공간이라면 관객은 3차원의 열린 세계로서 그곳을 바라본다. 관객은 캔버스 너머로 환영과 차원, 공기 등을 느낄 수 있지만, 이 매체를 다루는 작가는 상상하는 대부분을 넣어볼 수 없다. 평면에 대한 일탈은 곧 회화에 대한 결격 사유가 된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화가'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그들은 대부분의 실험과 파격에 이미 훈련된 관객과 맞서야 한다. 점점 더 팔다리를 묶인 채 더욱 높아지는 역치를 뚫고 보는 이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어야 한다. 화가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점점 더 어색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혜림작가는 캔버스 이외에 기름종이나 메쉬천을 덧대기도 하고 작품을 물리적으로 찢거나 분절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관객이 느끼는 이 불편함 속에서 '시각의 예민함'이 깨어나길 바란다. 전통적 회화는 관객이 작품의 맞은편, 즉 한 자리에서 서서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사실 편리한 감상은 회화의 특징이었다. 귀찮게 체험을 요구하거나 예상치 못한 소리의 공격, 거대한 부피감 등으로 관객을 주눅 들게 하는 일이 없었고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버리면 언제라도 이미지를 통제할 수 있었다. 또한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상은 아니어도 묵묵히, 그러나 전시장 한 켠 정도에는 반드시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즉 회화는 미술의 현대적인 특징을 통해 자신을 어필하는 존재는 아니다. 전혜림은 이 사실에 부정적인 작가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현대성(modernity)이라는 대결에서 회화가 다른 장르에 질 수밖에 없다는 열패감에 젖어 있지는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장르에 비해 그 해답을 찾는 길을 상대적으로 더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것에 대한 고민은 회화 작가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특히, 자신을 향하는 이 잣대는 무척 엄격한 편이다. · 납작이라는 미신 "어쩌면 제 작업은 실패를 이미 가정하고 시작하는 작업일 겁니다. 솔직히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놓고 보아도 그리는 방식으로 현대성(modernity)이라는 대결에서 다른 장르에 우위를 점하기란 쉽지 않아요. 완벽한 스킨(Perfect Skin)이라는 게 존재할 리도 없기 때문에 실패를 가정하고 실험하는 제 작업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 또한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최근 작업에는 나르카디아(Narcadia: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목가적 개념의 낙원 아르카디아(Arcadia)에 도달할 수 없음을 표현할 부정 접사 'n'이 붙어 조어된 전혜림 작업의 세계관)가 꾸준히 등장한다. 최근 합정지구에서 선보인 작업 [퍼펙트스킨(Perfect Skin)]에는 캔버스 천 이외에 기름종이, 메쉬 천과 같은 다른 소재의 표면이 섞여 있다. 매끈한 단일의 캔버스가 아닌 다양한 층위를 통해 관객이 작업을 좀 더 예민하게 바라보며 동시에 매끈하게 마감된 하나의 캔버스가 불러올 원근, 존재하지 않는 재현이라는 허깨비를 쫓아낼 장치인 셈이다. 작가는 앞서 언급한 최근 전시에서 [그건 거기 없는데(Nothing is there though)] 시리즈의 영상 작업을 선보였다. 영상 중 '납작이라는 미신'이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사람들은 제 그림으로부터 야자수나 폭포수와 같은 구체적 지시물을 좇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가로서 관객들이 그것을 발견하는 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 그림을 둘러싸고 이러한 충돌이 발생하는 것 자체에 저는 큰 흥미를 느낍니다. 다만 제가 그린 대상이 오직 그런 자연물의 재현만은 아니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제 작품의 제목들이 '무엇'에 관한 묘사보단 '어떻게'에 관한 경우가 많은 이유도 그런 탓인 것 같아요." · 회화만의 근사한 낙원을 여는 것 “현대 미술 작가들이 대부분 장르에 얽매여 작업하지 않듯이 저도 여러 실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최근 작업 중에 [그건거기없는데(nothing is there though)]라는 영상이 있습니다. 제가 비슷한 시기 진행했던 회화작업의 당위성을 검토하는 수단으로 시도했던 작업이에요.” 다른 장르를 시도할 계획은 없냐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었다. 이내 회화라는 장르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 같은 게 느껴진다는 말을 건네자 작가는 훗날 자신이 그저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 작가가 될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눈앞에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게 돼도 당장에 바로 그릴 수가 없다고 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고 당장에 눈 앞에 펼쳐진 '그것'을 재현하는 것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는 작가의 그리기 방식은 귀납적을 넘어 해체적으로까지 보인다. 타협 없이 우직한 모습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흡사 예불을 드리는 구도자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그 행위에 크게 매료되곤 합니다. 그린다는 것은 매우 생생한 경험으로, 화가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높은 해상도를 가집니다.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강렬한 경험이죠. 이러한 경험이 단순하게 이미지를 재현하거나 드러내려는 과정으로만 전환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회화의 오랜 주제였던 낙원(아르카디아)은 내 작업에서 오랫동안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향으로 존재했다. 근래의 낙원은 ‘화가로서 추구하는 목적지’로서의 이상향이라는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화가의 낙원을 형상화하는 여러 고민은 미술사와 동시대의 맥락들과 함께 회화 자체를 재료로 삼아 작업에 등장하며, 관례적으로 이루어진 회화를 둘러싼 태도와 형식을 재고한다. 여기에는 없는 그것(낙원)은, 추구함으로 이루어지는 화가의 세계이길 바란다. - 전혜림 작가 작업 노트 중 -· 그림의 생존 전략 망막을 향해 돌진하는 그림들이 있다. 아직 겪지 못한 이에겐 슬픈 일이지만 경험한 이들은 이것이 매우 강렬한 체험이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그림이라는 장르에 광적인 팬이 되는 순간 역시 대부분 이와 같은 사건을 시작으로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혜림 작가는 누군가의 이러한 첫사랑이 되길 스스로 거부한다.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의 망막에 단박에 가닿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두어 제동을 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방식이 근현대 회화사의 서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이다. 전혜림 작가는 지난 전시에서 발색의 차이를 가지는 바탕재의 표면 위에 선명도가 달리 드러나는 유화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그린 후 비슷한 선상에 위치시켰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에는 일정 값의 '편차'가 발생했다. 전통적 원근이나 투시법에 기대어 생긴 깊이감이 아니었다. 작품을 찢어 바닥에 축 늘어뜨리거나 방수천, 기름종이 등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관객이 안주하는 감상에 자꾸만 브레이크를 건다. 자리를 옮겨가며 감상해야 하고 가까이 와서 찬찬히 들여다봤다가 멀찍이 떨어져 눈을 찌푸리며 보는 등 다양한 방식의 '보기'를 실천해야 한다. “저는 작업실에 앉아서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 회화는 그리고 싶지만, 그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한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세상입니다. 작업해가면서, 다른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저는 늘 동시대 미술로서 회화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 답은 무한대에 가깝고 완성된 회화 앞에서는 그저 좋은 작업과 아닌 작업이 있습니다. 그 사이를 오가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회화적 실험이고, 그것이 쌓여서 저의 방법론을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글 오웅진 / 전시 공간 ‘OF’ 기획자 · 추천의 변 언젠가 전혜림은 회화의 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실천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자신의 실천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화가든 역사 속에서 이뤄진 회화의 성취를 비판적으로 의식하며 자신의 회화를 시작하지만 회화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들의 성취가 곧바로 그 자신의 성취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본인의 회화는 실패를 기정사실화 한 채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전혜림의 고백은 회화의 긴 역사가 오늘의 회화를 내리누르는 힘을 의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혜림의 회화는 한마디로 부정(negation)과 갱신의 회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낙원(Arcadia)을 부정하는 뜻에서 직접 만든 조어인 ‘나르카디아(Narcadia)’와 더불어 ‘밤’의 이미지를 그렸고, 부조리한 이상향, 꿈의 세계에 대해 스토리텔링 하는 식으로 작업해왔다. 이 작업들은 캔버스 화면 위에 고통받는 인간 군상을 신화와 미술사적 도상 또는 항쟁의 이미지를 가져와 플롯에 대입하고 이미지를 구축한 그림들이다. 작품의 제목 또한 [나르카디아], [밤], [낙원의 재건]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작품 내용에서 고통과 극복, 주술과 제의를 연상케 했다. 이후 작업에서는 재현 또는 지시적인 회화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 우리는 구체적인 형상을 그린 회화를 볼 때면 화면 속 재현 대상을 통해서 작품의 주제나 내용을 추적하곤 한다. 그러나 전혜림은 자신이 그린 대상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관람객들이 더 발견하길 기대한다. [그건 거기 없는데](2018)나 [퍼펙트 스킨](2018)과 같은 작업들은 캔버스와 그 위로 드러난 이미지, 그 사이에 끼어 있을 어떤 것을 상정한다. 그에게 회화는 캔버스 표면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는 이미지 그 이상이며, 그래서 작가는 광목천이나 비옷, 망사 등 이질적인 재료들을 캔버스에 덧대어 납작한 회화라는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기도 한다. 전혜림이 취하는 부정의 방법은 갱신을 향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미술사는 회화의 역사가 주도했다. 적어도 20세기 전반 모더니즘 미술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시대에서 회화는 더이상 동시대성을 두드러지게 주도하는 매체는 아닌 듯하다. 전혜림은 이를 숙지하면서도 그렇다고 회화가 다른 매체들에 대해서 어떤 열패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대신 그의 회화는 끊임없는 재귀, 자기 반영을 통해서 어떠한 갱신을 꿈꾼다. 그의 [퍼펙트 스킨] 시리즈나 [시선의 모양](2019)은 평면에 머무르지 않는 회화다. 한때 미술사는 평면에 머무르는 것을 완벽한 회화의 조건으로 보았던 적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전혜림은 이 완벽한 회화로서의 불가능성과 좌절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 오히려 평면의 불가능성을 긍정으로 바꾼다. 그의 (역설적인) ‘완벽한 표면’은 형상을 가졌지만 분절되고 구겨졌으며, 시선을 가지되 이 시선이 움직이는 공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럼으로써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 회화의 닫힌 계를 부정하고 갱신한다. 따라서 현재 전혜림의 회화는 회화에 대한 회화, 즉 메타 회화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회화사를 의식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은 회화를 둘러싼 관념을 검토하고 이를 그의 회화에 담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천인 이성휘 / 헬로!아티스트 작가선정위원 · 작가소개 전혜림 전혜림은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를 졸업하고, 2019년 [육면체의 인덱스], 합정지구, 2017년 [신기루] OCI미술관, 2015년 [나르카디아; 의식의 밤] 서교예술 실험센터 등의 개인전 및, 2018년 [생생화화(Hard-boiled &Toxic)]경기도미술관, 2016년 [언더마이스킨] 하이트컬렉션 등의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다. 인천아트플랫폼,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등의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혜림 - 회화의 낙원을 그리는 화가 (헬로! 아티스트, 네이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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