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철학·상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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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의 전설
작성자 철** 작성일 2019-01-18 조회수 349

이데아론의 탄생

소크라테스가 남기고 떠난 과제를 완수하는 데에는 윤리학과 형이상학의 종합이 필요했다. 그 일을 하기에는 역시 플라톤이 적격이었다. 당시 그리스 사회에 그처럼 뛰어난 이론적 역량을 갖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주는 두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현상계로, 그 세계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만물유전(panta rhei)'처럼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정신의 눈으로 보는 예지계로, 그 세계는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의 일자(immovable one)'처럼 생성과 소멸, 변화와 운동에서 벗어나 있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이데아계'라 불렀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덕이나 정의가 그것이 드러나는 개별적 행위들과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덕이나 정의 '그 자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분명 개별적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이 세계는 아닐 게다. 그렇다면 개별자들과 별도로 그것들의 모범이 되는 보편자들의 세계가 따로 있어야 한다. 그 세계가 바로 '이데아계'다.

비록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지만 '이데아계'의 구상은 플라톤 자신의 발명임에 틀림없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상대주의에 맞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과 절대적 도덕 기준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가 굳이 '이데아'라는 초월적 존재들의 세계를 상정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덕이나 정의와 같은 보편자가 개별적 행위들과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플라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비망록'을 보면, 소크라테스 특유의 것으로 알려진 전략을 외려 그의 상대자가 사용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어법을 멋지게 반박한다.

아리스티포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좋은 것을 아느냐고 물었네. 만약 소크라테스가 음식, 음료, 돈, 건강, 힘 또는 담력과 같은 좋은 어떤 것을 언급한다면 그는 그것이 때로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했던 것이지. 그러나 ……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답변을 제시했네. 그가 말했다네.

-자네는 열을 내리는 데에 좋은 것을 내가 아느냐고 묻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닙니다.
-눈병에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말인가?
-아니, 그것도 아닙니다.
-배고픔에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말인가?
-아니, 배고픔에 좋은 것도 아닙니다.
-글쎄, 그럼 자네는 그 어떤 것과도 관련되지 않은 좋은 것을 아느냐고 묻는 셈인데, 그렇다면 나는 (그 따위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다네.1)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개별자들로부터 분리된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개개의 좋은 것들에서 분리된 '좋음(, agathon)'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자들의 세계 너머에 따로 보편자들로만 이루어진 초월적 세계도 존재할 리 없다.

다시 말해, 굳이 이데아계를 상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아무튼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에게 '선의 이데아'에 대해 물으면, 그는 "(그 따위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다."라고 대답할 게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에 맞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과 절대적 도덕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지식의 객관성과 도덕적 기준의 절대성을 확보할 구체적 방안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방법은 차라리 변증법적이다. 절대적 진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으나 인간들 사이의 생산적 대화를 통해 점차 그것에 접근해갈 수는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 탐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처럼 독단적이지 않다. 물론 플라톤은 스승의 이 열린 태도에 만족하지 못한 듯하다. 그로서는 스승의 입장을 소피스트와 명확히 대립시키려면 지식과 도덕적 기준의 객관성과 절대성을 보장할 '이론'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느꼈을 게다.

이데아를 향하여

그 '이론'이 바로 이데아론이다. 앞에서 '좋음'을 예로 들었으니 여기서는 '아름다움(kalon)'의 예를 들어보자.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선과 미가 하나로 융합된 '선미(kalokagathia)'를 자신들의 윤리적-미학적 이상으로 삼았다.

대화편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무녀()에게 들었다는 얘기를 전해준다. 여기서 디오티마는 한 소년의 신체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해 점점 더 높이 상승해 마침내 미의 이데아에 이르는 도정을 설명한다. 무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사실 그녀의 것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것도 아닌, 플라톤 자신의 생각일 것이다.

만티네아의 디오티마

만티네아의 디오티마

이런 개개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하여 ……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게 옳겠지요. 계단을 오르듯이 신체 하나의 아름다움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모든 아름다운 신체로, 아름다운 신체에서 아름다운 윤리와 관습으로, 아름다운 윤리에서 아름다운 지식으로, 그 지식에서 마침내 아름다움 그 자체의 인식에 도달하여,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인식할 때까지. 소크라테스여, 이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생은 인간에게 살 만한 가치가 있겠죠.2)

이처럼 계단을 밟듯이 아름다운 '것들'에서 출발해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 '자체'는 아름다운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다. 현실의 아름다운 '것들'과 달리 아름다움 '자체'는 "인간의 살과 색과 그 밖의 모든 썩어 없어질 무가치한 것과 섞이지 않은 신적인 아름다움"3)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시간 · 장소 ·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변화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적 아름다움으로,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고, 성장도 쇠락도 하지 않고, 이 속에서 아름답다가 저 속에선 추하거나 하지 않고, 지금 아름답다가 잠시 후엔 추해지거나 하지 않고, 이렇게 보면 아름답다가 저렇게 보면 추하거나 하지 않고, 여기서는 아름답다가 저기서는 추하거나 하지 않고, 어떤 이에게 아름답지만 다른 이에게는 추하거나 하지 않는다.4)

하지만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과 별도로 아름다움 '자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 귀에는 황당하게만 들린다.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그저 'x는 아름답다'는 문장 속의 술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술어를 실사()로 실체화하여 초월적 세계로 보낸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로써 판단과 행위의 보편적 · 객관적 · 절대적 기준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계단을 밟듯이 상승해 마침내 선이나 미의 이데아의 인식에 이른 사람은 현실에서 마주치는 개개의 사안에서 누가 정의로운지, 혹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판단하는 데서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계의 인식을 삶의 목표이자 완성으로 여겼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들만이 아니다. 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초월적 세계에 자신의 이상적 대응물을 갖고 있다. 즉, 말의 이데아, 꽃의 이데아, 책상의 이데아, 인간의 이데아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이상적 '모범'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현실의 사물들과 천상의 모범들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에 따르면,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그 이상적 모범이 사물의 원형이며, 우리가 감각 세계에서 보는 것들은 그 원형의 불완전한 모방에 불과하다. 원형과 모방 사이의 관계를 그는 '분유(methexis)' 혹은 '참여(participatio)'의 관계로 설명한다. 즉, 감각 세계의 사물들은 천상에 있는 이데아의 속성을 불완전하게나마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데아와 감각 세계, 분유 혹은 참여의 관계

이데아와 감각 세계, 분유 혹은 참여의 관계

동굴의 비유

플라톤에 따르면, 원래 우리의 영혼은 이데아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육체의 옷을 입고 태어나는 과정에서 근원적 세계를 잊고 그것의 모방에 불과한 현세를 유일한 실재로 착각하고 지내게 된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로 설명한다.

거기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갇혀 지내는 수인이다. 수인들은 뒤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다리와 목이 묶여 있어 오직 눈앞의 동굴 벽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들의 등 뒤에는 불이 있고, 그 불과 수인들 사이에는 낮은 담장이 있는데 그 사이로 사람들이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을 치켜들고 오락가락한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담장에 가려 있어 동굴 벽에는 오직 그들이 들고 다니는 인형들의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이다.

동굴의 비유

동굴의 비유

그뿐인가? 그림자들이 움직일 때마다 담장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동굴 벽에 반사된 소리를 들은 수인들은 그것들을 그림자들이 내는 소리로 여긴다. 이 음영()과 반향()을 수인들은 실재로, 그것도 유일한 실재로 받아들인다.

그도 그럴 것이 수인들은 태어나서 계속 동굴 속에서만 지내느라 다른 실재를 접할 기회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용케 사슬을 벗고 동굴에서 벗어났다고 하자. 동굴 밖에서 그는 처음엔 극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태양 빛을 처음 보는 그에게 세상은 너무 눈이 부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태양 빛에 익숙해져 동굴 밖의 찬란한 세상을 비로소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동굴을 빠져나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동굴처럼 어두운 감각 세계에서 동굴 밖의 밝은 세상으로 인도한다. 당신이 그렇게 참된 세상을 보게 된 철학자라면 아직 동굴 속에 사는 동료들 생각에 그들을 구하러 다시 동굴로 돌아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동굴로 돌아가도 이미 밝은 빛에 익숙한 당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동료들에게 아무리 바깥 세상에 대해 얘기해도 그들은 동굴 안도 보지 못하는 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외려 그들은 당신이 밖에 나갔다가 아무것도 못 보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마치 죽일 듯이 덤벼들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죽지 않았던가.5)

동굴의 비유

동굴의 비유

메노의 역설

플라톤은 진리의 인식이란 곧 우리 영혼이 전생에 보았던 이데아계의 '기억'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이른바 '메노의 역설'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대화편 '메노'에서 소크라테스는 독특한 역설과 씨름한다.

인간은 아는 것을 탐구할 수도 없고 모르는 것을 탐구할 수도 없다. 아는 것을 탐구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이미 그것을 알기에 굳이 탐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것을 탐구할 수도 없는데, 그 경우에는 탐구해야 할 게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6)

우리는 아는 것을 탐구할 수도 없고, 모르는 것을 탐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탐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역설에서 빠져나오려면 '모순'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탐구하는 그것이 '우리가 알면서 동시에 모르는 것'이어야 한다.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있다. 바로 이데아계다. 왜? 그 세계는 우리의 영혼이 탄생 전에 이미 보았기에 우리가 이미 아는 세계다. 하지만 육신의 옷을 입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잊혔기에 우리가 모르는 세계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가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것을 새로 알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으나 망각된 세계의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이다. 이를 인식의 '상기설'이라 부른다.

대화편 '메노'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메노의 집에서 일하는 노예 소년을 데리고 한 가지 실험을 한다. 그는 소년에게 가로세로 2피트 크기의 정사각형(22f=4f2)을 보여주며, 그 두 배의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그리라고 시킨다.

처음에 소년은 가로세로의 길이를 각각 두 배로 늘렸다. 그러자 면적이 두 배가 아니라 네 배가 되었다(44f=16f2). 실수를 깨달은 소년이 이어 가로세로를 각각 1.5배로 늘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면적은 두 배를 넘었다(33f=9f2).

이때 소크라테스가 소년에게 원래 정사각형의 대각선을 이용하는 방법을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자 소년은 그 대각선을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이 원래 도형의 두 배가 되는 면적을 가진다는 사실을 즉각 깨달았다.

정사각형의 두 배의 면적 구하기

정사각형의 두 배의 면적 구하기

여기서 포인트는 그 노예 소년이 기하학을 배운 적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대각선의 암시를 주자 직관적으로 기하학의 원리를 이해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따로 배운 적이 없으므로 노예 소년은 기하학의 개념들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한마디로 소년은 훗날 데카르트가 '생득관념(innate ideas)'이라 부르게 될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관념들을 어디서 얻어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그 관념들의 출처는 당연히 이데아 계일 수밖에 없다. 결국 소년은 이데아계의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크라테스가 소년을 도와 태어나는 과정에서 망각된 그 세계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는 얘기다.

에르의 전설

하지만 노예 소년이 배우지도 않은 기하학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그 관념의 출처로서 이데아계의 존재가 저절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계의 존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한 사내의 이야기로 그 증명을 대신한다.

그에 따르면, 팜필리아의 영웅 에르라는 사내가 전쟁터에서 사망했다. 전투 후에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시신만은 죽은 지 열흘이 지났어도 전혀 썩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 사람들은 화장을 하기 위해 온전한 그의 시신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얼마 후 죽었던 그가 장작더미 위에서 눈을 뜨더니 자기가 죽은 동안에 경험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하인리히 로이테만, '영웅의 화장', 1866

하인리히 로이테만, '영웅의 화장', 1866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에르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영혼들은 어떤 신비한 장소에 이르는데, 에르의 영혼은 거기서 그곳의 일을 똑똑히 보아두었다가 현세의 인간들에게 알려주라는 명을 듣는다.

거기에는 땅과 하늘을 향해 통로들이 나 있고, 그 사이에는 심판관들이 있어 그곳에 도착한 영혼들을 심사한다. 심판의 결과 선인으로 판정받은 이들은 천상으로 올라가고, 악인으로 판정을 받은 이들은 하계로 내려가게 된다.

영혼들은 천상에서는 살아서 한 선행의 열 배의 상을 받고, 하계에서는 살아서 지은 죄의 열 배의 벌을 받는다. 그렇게 천 년 동안 선인의 영혼은 천상에서 행복하게, 악인의 영혼은 하계에서 고통스럽게 지내게 된다.

그렇게 천 년이 지나면 선한 영혼들은 밝고 깨끗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고, 악한 영혼들은 더럽고 누추한 모습으로 지하에서 올라온다. 이 두 그룹의 영혼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면, 서로 아는 영혼을 만나 끌어안고 각자 있었던 곳의 안부를 묻는다.

지옥에서 올라온 영혼들이 울부짖으며 지하에서 자신들이 겪은 참혹한 경험에 대해 얘기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은 즐거운 목소리로 천상에서 누린 지고의 열락과 그곳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한다. 두 부류의 영혼은 이레 동안 초원에서 함께 보낸 후 다시 길을 떠난다. 그렇게 나흘을 걸으면 엄청나게 밝은 무지개의 축을 보게 되고, 하루 더 걸으면 그곳에 다다르게 된다.

알고 보니 그 축은 필연의 방추체였다. 그것을 관장하는 이는 필연의 여신 아난케(Ananke). 높은 보좌에 앉은 그녀의 아래로는 운명을 관장하는 그녀의 세 딸이 앉아 있었다. 에르를 제외한 나머지 영혼들은 이들에게 추첨 표를 받고, 추첨을 통해 제 이름이 불리면 각자 환생 후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필연의 여신과 세 딸들

필연의 여신과 세 딸들

영혼들은 아난케를 지나서 평원으로 가는데, 거기에는 망각이라는 뜻의 '레테(lethe)'의 강이 흐르고 있다. 영혼들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려면 이 강물을 마셔야 한다. 강물을 많이 마시는 영혼도 있고 조금만 마시는 영혼도 있지만, 일단 그 강물을 마시는 순간 영혼들은 이곳의 일을 모두 잊고 세상에 나가게 된다.

다만, 에르는 세상에 나가 이곳의 일을 전할 임무를 지고 있기에 강물을 마실 의무를 면제 받는다. 강물을 마신 영혼들은 저녁이 되면 스스로 잠이 들고, 그렇게 잠든 영혼들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각자 다시 태어날 곳을 향해 온갖 방향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렇게 12일에 걸친 여정을 마친 에르가 장작더미 위에서 다시 눈을 뜬 것이다.7)

레테의 강

레테의 강

이처럼 신비주의 종교에서 유래한 듯한 '영혼의 윤회'라는 모티프가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체계를 정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참됨'의 이론, 즉 그의 존재론(이데아론)과 인식론(상기설)은 모두 영혼의 불멸과 윤회를 전제한다.

게다가 에르의 전설은 윤리학의 토대를 놓는 '이야기'다. '정의로움'이란 게 존재하려면 선인은 죽어서라도 보상을, 악인은 죽어서라도 처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아가 한 소년의 아름다운 몸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에 이르는 '항연'의 도정이 가능한 것 역시 환생 전에 본 미의 이데아의 기억 덕분이다. 한마디로 형이상학을 정초하기 위해 플라톤은 내세의 이야기를 발명했다. 로고스라는 건물을 뮈토스의 대지 위에 지은 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르의 전설 - 플라톤의 이데아론 (철학 오디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