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의 철학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9-19 | 조회수 | 7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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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주의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 개인들은 내면으로 침잠하기 마련이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하는 에피쿠로스(Epicouros, 기원전 341~270)의 쾌락주의,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 피론(Pyrrhon, 기원전 360?~270?)의 회의론은 모두 불안한 정국에서 탄생했다. 고대의 ‘쾌락주의’는 오늘날의 그것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에피쿠로스가 최고의 열락으로 꼽은 것은 육체의 쾌락이 아니라 정신의 ‘평정(ataraxia)’이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도 마찬가지다. 스토아학파의 ‘금욕(askesis)’은 중세처럼 자기 수양의 목적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 ‘무감(apatheia)’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기술에 불과했다. 세계와 연을 끊으려는 것은 회의론도 마찬가지였다. 회의학파의 대표자인 피론은 마음의 평정을 위해 아예 세계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파나 피론의 회의주의나 인생의 목적을 마음의 교란에서 벗어나 내면의 행복(eudamonia)에 도달하는 데에 둔 것은 한가지였다. 세 학파 사이의 차이는, 마음을 교란하는 요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었다. 회의학파는 그 요인을 세계에 대한 ‘견해’라고 보았다. 어차피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차라리 아무 견해도 갖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그 요인을 ‘정념’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정념은 욕망에서 나오므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면 욕망부터 제어해야 할 것이다. 한편, 에피쿠로스학파는 그것을 ‘고통’이라 보았는데, 그들은 마음의 고통이 주로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에피쿠로스학파의 방법은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실은 아무 근거가 없는 감정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신이 있어 그가 인간에게 형벌을 내린다는 이야기는 유치한 허구에 불과하다. 원자론자였던 그들은 우주란 충돌하는 원자들로 이루어진 무정한 기계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계획자나 건축가가 있을 리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 신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이 없다고 하는 대신 신이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관여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신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뿐인데, 에피쿠로스는 그 공포를 해소하는 유명한 해법을 남겼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이 최초의 원동자 없이 스스로 소용돌이 운동을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곧바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원자들은 왜 애초에 정지해 있지 않고 하필 운동을 할까?’ 이 반론에 답하기 위해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몇 가지 수정을 가한다. 먼저 그는 원자들이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크기와 형태에 더해 ‘무게’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무게가 있기에 원자들은 바닥이 없는 우주의 허공 속으로 무한히 낙하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물음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등속으로 떨어지는 원자들이 어떻게 서로 충돌할 수 있는가?’ 그것은 원자가 낙하운동과 더불어 기울기(clinamen) 운동을 하기 때문이란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원자들 중 일부는 아래로 떨어지다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져 다른 원자들과 부딪힌다. 이 충돌 속에서 비슷한 것들은 서로 결합하고,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 밀쳐낸다. 눈에 뵈지 않는 이 미립자들의 충돌과 결합의 연쇄로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물체와 운동이 만들어진다. 이 기울기 운동의 가설에는 윤리학적 함의가 살짝 깔려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결정론적 성격이 강하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기계적 필연성을 띠는 낙하운동과 달리 기울기 운동만은 우연적 · 자발적이라 본다. 덕분에 기계처럼 돌아가는 우주 속에서도 어떤 우연한 일탈이,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자발적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철학당시 에피쿠로스학파와 경쟁하고 있던 것은 스토아학파였다.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은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이 주로 아고라 근처 벽화가 그려진 주랑(stoa poikile)에서 가르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쌍벽을 이루는 이 두 학파 중에서 후대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역시 스토아학파다. 원자론은 그 안에 유물론과 무신론을 함축하고 있어, 이를 신봉하던 에피쿠로스학파가 당대 지성계의 주류가 되기는 힘들었을 게다. 스토아학파는 고대 말기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철학사에서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는 최후의 고대인이자 최초의 중세인으로, 그의 사상은 고대와 중세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스토아학파는 매우 독특한 우주론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태초에 신이 있었는데, 이 신은 불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신은 자신을 이루는 불을 공기와 물과 흙으로 변화시키고 이 네 원소의 결합으로 우주를 만들었다. 4원소 중 물 · 흙 · 공기마저 불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국 우주의 모든 것이 불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우주가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거대한 불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우주가 완전한 종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그 소멸이 새로운 생성의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는 우주의 모든 것이 화염에 휩싸이는 대화재(大火災) 속에서 다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며, 이 탄생과 소멸의 순환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4원소를 다시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나눈다. 그중 능동적인 것으로 분류된 불과 공기는 ‘숨결’이 되고, 수동적인 것으로 분류된 물과 흙은 ‘물질’이 된다. 숨결은 불처럼 따뜻하며 공기처럼 자유롭고, 물질은 물처럼 축축하고 흙처럼 건조하여 만물의 재료가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 ‘숨결’과 ‘물질’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숨결은 신이다. 하지만 조물주와 같은 인격적 존재는 아니다. 숨결로서 신은 사물의 제작자로, 세계의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처럼 개개의 사물 안에 스며들어 있다. 숨결은 생물만이 아니라 무생물에도 깃들어 있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본다는 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우주론은 범신론에 가깝다. 그들은 4원소처럼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 역시 능동적 원리와 수동적 원리로 나눈다. 수동적 원리는 물질이며, 능동적 원리는 이성(logos), 즉 신이다. 신은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만큼이나 물리적인 존재인데, 스토아학파는 이 존재를 ‘숨결(pneuma)’로 표상했다. 만물은 이 신성한 숨결이 물질에 스며들어감으로써 생성된다. 이 스밈을 그들은 물리적 ‘병존’도 화학적 ‘합성’도 아닌 ‘공존’으로 설명한다. 숨결과 물질의 공존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거기서 능동적 원리가 승할수록 존재는 신적 · 이성적으로 되고, 수동적 원리가 승할수록 존재는 물질에 가까워진다. 그 결과 신성한 숨결이 얼마나 스며들어 있느냐에 따라 자연에 위계(scala naturae)가 발생한다. 이 위계는 크게 네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위계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숨결은 ‘긴장과 상태’로 존재한다. 이것이 사물에 ‘응집력(hexis)’을 주어 그것들로 하여금 제 모양을 유지하게 해준다. 그보다 한 층 높은 단계에서 숨결은 자연의 ‘생장력(physis)’을 이룬다. 이 힘 덕분에 식물들이 대지 위에 살아 성장할 수 있다. 식물보다 한 층 높은 단계에서 숨결은 ‘영혼(psyche)’을 이룬다. 이것이 동물들로 하여금 운동과 지각과 생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최고 단계에 이르면 숨결은 마침내 ‘이성적 영혼(logike psyche)’이 된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이성으로서 인간의 영혼은 신적 영혼의 한 파편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안의 신’, 즉 우리 몸에 스며들어 있는 신성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사실 헬레니즘 시대에 알려진 고대의 여러 가르침을 새로운 교설로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르케를 ‘불’로 본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이다(이 생각의 그 근원은 저 멀리 조로아스터교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 또한 ‘4원소’의 등장은 엠페도클레스의 이론, 신성한 존재를 ‘숨결’로 표상한 것은 당시의 의학적 지식, 그 ‘숨결’을 물리적 존재로 간주한 것은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영향이다. 나아가 신적 숨결이 사물 안에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영혼을 동물적 영혼과 이성적 영혼으로 나누고 후자를 신성한 것으로 보는 것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의 영향이리라. 플로티노스의 철학흔히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신플라톤주의’라 부르나 그의 사상에는 플라톤은 물론이고 그가 명시적으로 비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요소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헬레니즘 말기, 플로티노스가 플라톤의 전통을 되살리려 했을 때 그와 플라톤 사이에는 이미 500여 년의 시간 차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지성계를 지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스승 플라톤의 철학마저 그 시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해석되곤 했다. 거기에 스토아학파의 영향까지 겹쳐 신플라톤주의는 원래의 플라톤 사상에는 없었던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된다. 플라톤의 후예답게 플로티노스는 원자론자들이 생각했듯이 원자나 원소의 단순한 배열에서 저절로 통일성이 생긴다고 믿지 않았다. 요소의 배열에서 그 요소들에 없었던 새로운 성질이 나타난다는, 이른바 ‘창발(emergence)’의 개념은 그의 시대에는 낯선 것이었다. 한 사물이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려면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이 그보다 상위의 원칙에 의해 조직되어야 한다. 그렇게 조직된 것들은 물론 그보다 높은 원칙에 의해 더 고차의 대상으로 조직될 것이다. 이렇게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국 무한 소급에 빠지게 되므로, 그것을 피하려면 최상위의 존재만은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저 스스로 통일성을 갖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할 게다. 그 최종적 존재를 플로티노스는 ‘일자(一者)’라 불렀다. 사실 이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플라톤의 초월자는 다수의 이데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플라톤은 이 형상들을 일종의 ‘형태’로 표상했다. 그에 반해 플로티노스의 초월자는 ‘일자’로, 단 하나의 단일한 존재다. 플로티노스는 그것을 ‘형(形)’이 아니라 ‘질(質)’로, 즉 빛으로 표상했다. 이는 초월자를 ‘불’로 보았던 스토이시즘(Stoicism)의 영향으로 보인다. 빛이나 불이나 밝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신플라톤주의의 아르케는 거대한 빛으로 표상되는 일자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 일자에서 유출된 빛으로 이루어진다. 촛불에 가까울수록 밝고 멀어질수록 어두워지듯이 세계의 모든 것은 이 빛의 밝기에 따라 일자-정신-영혼-물질의 순서로 위계를 이룬다. 이 위계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일자(hen)다. 일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형상을, 즉 유기적 통일성을 주는 존재다. 일자 바로 아래에는 정신(nous)이 있다. 이는 개별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세계정신을 가리킨다. 플로티노스의 정신은 세계 창조의 원리인 로고스 같은 것으로, 아직 감각 세계로 들어가 물질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형상들로 이루어진다. 정신의 아래에는 영혼(psyche)이 존재한다. 이 역시 개별 인간이나 동물의 영혼이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세계영혼을 가리킨다. 영혼은 사물을 살아 있게 하는 원리로, 그것에 힘입어 자연은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된다. 영혼의 아래에는 자연(physis)이 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에 해당하는 것은 정신을 이루는 형상들이다. 그는 이 형상들이 그보다 더 상위의 존재인 일자에서 유출된 것이라 설명한다. 결국 그는 플라톤이 말하는 초월적 세계(이데아 세계) 위에 그보다 더 초월적인 존재(일자)를 상정하는 셈이다. 자연의 사물들은 일자에서 유출된 이 형상들과 그것의 수용체인 물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플라톤의 교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처럼 들린다. 다만, 플로티노스의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플라톤의 ‘코라’를 합쳐놓은 것에 가깝다. 한편, 플로티노스는 ‘물질’은 존재의 위계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을 차지하나 그 역시 다른 것들처럼 일자에서 유출된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일자와 나머지 것들의 관계를 ‘참여’와 ‘분유’ 그리고 ‘유출’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참여’와 ‘분유’는 플라톤에게 물려받은 것이나 ‘유출(eklampsi)’의 개념은 플로티노스 고유의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에 ‘숨결’이 스며들어 있다는 스토이시즘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렇게 형상이 물질에 스며든다고 주장할 때, 그의 플라톤주의는 슬쩍 형상들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가까워진다. 물론 이데아(일자)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명백히 플라톤주의적 특성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일자가 현상계로 유출되어 감각 대상들 속에 구현된다고 말한다. 이는 명백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요소다. 플로티노스에게 영혼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원천이다. 그는 하나의 세계영혼이 식물과 동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별 영혼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하나의 영혼이 모든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살아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를 그는 원과 중심의 관계로 설명한다. 원의 정의는 “일정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다. 즉, 원을 이루는 모든 점이 하나의 중심을 공유하듯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영혼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영혼의 통일성 관념에서 감각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결론이 도출된다. 서로 동일한 영혼을 분유하기에 세계의 모든 것은 서로 공감(sympatheia)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VI.5.8).3) ‘유출’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의 반대편에는 ‘상승’의 미학이 있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유동적이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지성적 영혼(nous)으로 상승하거나, 혹은 동물적 영혼이나 식물적 영혼으로 추락할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플라톤에게서 유래한 관념이다. 현자의 영혼은 예술 · 사랑 · 철학을 통해 제 안의 육(肉)의 요소를 정화하여 순수한 영혼과 정신으로 상승한다(I.3.1-3)4). 이 운동의 끝에서 “모든 영혼은 그것이 관조하는 그것(일자)이며, 그것이 된다(IV.3.8.15-16).” 이렇게 일자와 합일할 때 개인의 영혼은 개별성을 벗고 몰아(ecstasy)의 상태에 빠지는데, 플로티노스는 생전에 종종 이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체험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이런 관념은 사실 그의 앞 시대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고대 철학에서 영혼은 ‘생명’ 혹은 ‘생기’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가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맺고 있어 육체가 죽으면 (능동적 이성을 제외하고) 영혼의 대부분은 소멸한다고 보았다. 영혼을 원자의 배열로 보았던 에피쿠로스 역시 사후에는 영혼도 다른 원자들처럼 해체된다고 믿었다. 심지어 인간의 영혼을 신적 영혼의 한 부분으로 본 스토아학파마저도 영혼을 일종의 물리적 실체로 여겨 궁극적으로는 사멸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 이후 ‘영혼’이라는 낱말은 전적으로 ‘육체의 죽음 후에도 불멸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이 교부철학의 가공을 거쳐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중세의 신학적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으로 변모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플로티노스는 상위의 존재인 (세계)영혼이 어떻게 육체에 갇히게 되었는지 궁금해한다. 이렇게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며 자아가 원래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에 속한다고 느끼는 것은 앞 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세계감정이다. 이는 플로티노스만이 아니라 영지주의(靈智主義)를 비롯한 당시의 여러 사조가 공유하는 감정이기도 했다.5) 고대는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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