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자를 미워한 공산주의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2 | 조회수 | 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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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기억에서 지워진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의 실종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중부 유럽 시간으로 2018년 5월 24일 아침 8시, 나는 폴란드 동부의 변경 도시 자모시치(Zamo??)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가를 찾아 서성이는 중이었다. 독일-폴란드 역사 및 지리 교과서 위원회 연례회의에서 강연 초청을 받았는데, 마침 자모시치에서 회의가 열렸다. 전날 저녁 개막 강연을 마치고 느긋하게 아침 산책을 나온 터였다. 바르샤바에서 첫 안식년을 보내던 1995년 초겨울, 룩셈부르크의 생가를 찾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곳에는 허름한 구둣방이 문을 열고 있었다. 폴란드가 낳은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의 생가이니 기념관이 되었을 거라고 예상하고 갔는데, 구둣방이라서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나마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가임을 알리는 명판이 가게 입구 벽에 걸려 있어서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Stanisław Staszic) 37번가는 구둣방에서 문구 및 잡화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명판이 안 보이는 것이다. 주소상으로는 그 집이 분명히 맞는데……. 내 기억이 틀렸나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할 수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인아주머니에게 명판의 행방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1995년 첫 방문 당시 룩셈부르크의 생가를 묻는 내게 폴란드인들이 보낸 적대적 시선이 생생하게 떠올라 더 조심스러웠다. 아주머니는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동양 사람이 폴란드어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명판을 물으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흘낏 나를 쳐다보면서 가게 밖으로 나와서는 명판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진다. 지난 3월에 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떼어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흔적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명판이 걸려 있던 자리는 색깔이 다소 하얘 표시가 난다. 흔적이 더 지워지기 전에 일단 휴대전화로 사진부터 찍었지만, 막막한 감정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자모시치 시청과 시계탑이 있는 구시가의 리네크 비엘키(Rynek Wielki) 광장 한 귀퉁이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뒤쪽의 아르메니아 지구에서는 원색의 건물들이 아침부터 강렬한 햇살을 반사하며 화사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과 시계탑이 정겹게 아침 그림자를 광장 한 귀퉁이에 드리우고 있었다. 아름다운 폴란드 르네상스 유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자모시치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렇게 사라졌다. 권력이 기억을 독점하다그날 저녁 룩셈부르크 생가 근처 카페에서 폴란드 친구들과 동네 맥주를 한잔하다가 그 이야기를 꺼냈다. 바르샤바 대학 사학과 교수 예지 코하노프스키(Jerzy Kochanowski)는 현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PiS)'의 역사 정책이 사회주의의 흔적을 지우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니 놀랍지만, 충분히 예견된 바이다. 그 선봉에는 민족기억연구소(Instytut Pami?ci Narodowej, IPN)가 있다. IPN은 과거에 저질러진 '폴란드 민족에 대한 범죄'를 찾아내 규명하는 역사적 역할과 그것을 단죄하는 사법적 권한을 함께 갖춘 무소불위의 연구소이다. 유럽의 진보적인 역사학계에서는 이 연구소가 민족주의적 기억을 단세포적으로 생산한다는 평판이 자자하다. IPN의 막강한 권한은 또 있다. 역사적 기념비나 유적 등을 관리하는 최종 권한이 그것이다. IPN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한 밑에는, 역사적 기념비가 폴란드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관리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민족기억연구소는 폴란드의 법률에 따라 역사 정책이나 기념비, 유적 등에 관한 자신의 결정을 지방 정부에게 강요할 수 있다. 자모시치 시장 안제이 브누크(Andrzej Wnuk)가 반대하는데도 2018년 3월 13일에 로자 룩셈부르크의 명판을 제거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브누크 시장의 정치적 성향은 좌파와 거리가 멀지만, 자기 고장 출신의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명판을 떼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고향에서 흔적이 지워졌다. 집권당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150년 전에 태어난 룩셈부르크의 역사를 지워버린다면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히틀러의 베를린 분서와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다. 그 어리석음은 밀란 쿤데라가 《농담》에서 신랄하게 풍자한 현실사회주의 시대의 우스꽝스러운 검열체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막스(Max)'와 '마르크스(Marx)'를 구분하지 못한 세관원들이 막스 베버의 책을 압수했던 1970년대 남한의 몽매한 반공주의도 농담의 소재이긴 매한가지다. 폴란드의 민족기억연구소는 박근혜 정권에서 시도한 국정교과서보다 더 폭넓은 맥락에서 극우 민족주의 폴란드 정권의 공식 역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기관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대통령 직속 과거사 위원회의 일부 위원이 민족기억연구소를 모델로 여기고 그곳의 소장을 초청한 일은 여전히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친일 청산이 진보적 역사 해석의 핵심인 양 골몰하며 IPN의 사법권을 부러워하던 그들에게 사석에서지만 나는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놓는다 해도, 실정법에 역사를 옭아매는 부작용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그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명판을 떼어낸 IPN의 결정에도 갈채를 보낼지는 잘 모르겠다. 좌파든 우파든 특정 권력이 사회적 기억을 독점 · 생산하겠다는 생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선호도에 따라 권력의 기억 생산 공정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역사가들이 많은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그들이 만든 국정교과서라서 문제가 아니라 국정교과서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남한의 어용 역사가들이 모두 우파였다고 해서 좌파 어용 역사가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동유럽의 당 역사학을 한번 살펴볼 일이다. 조국에서 버림받은 최고의 두뇌어쨌거나 그날 저녁 카페에서 한동안 우리 화제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머물렀다. 폴란드 과학아카데미 베를린 역사연구소에서 일하는 마우고자타 포피우웨크(Małgorzata Popiołek) 박사는 미술사를 전공했다. 이 소장 역사가의 학문적 관심은 현실사회주의의 역사 기념비들을 역사적 · 정치적 · 미학적으로 분석해서 전후 폴란드의 기억 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있다. 그녀에 따르면, 몇 년 전 자모시치시 문서보관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가와 관련된 새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태어날 당시인 1870~1871년에 룩셈부르크의 아버지가 소유한 집은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 37번지가 아니라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ciuszko) 7번지였다는 것이다. 자모시치 문서보관소의 기록에 따르면, 로자의 아버지가 200미터 남짓 떨어진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 37번지의 집을 구입한 것은 로자가 태어나고 몇 달 후의 일이었다. 그러니 로자는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래도 확언할 수 없는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출생증명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IPN이 명판을 떼어가면서 이제 이곳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가가 아니라는 명분을 내걸었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고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7번지에 명판을 새로 붙인 것도 아니니, 별반 설득력은 없다. 폴란드처럼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죄르지 루카치 동상도 비슷한 시련을 겪었으니, 사실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실을 따진다면 로자 룩셈부르크가 몇 년에 태어났는가 하는 점부터 문제다. 폴란드 학파는 1870년설을 주장하고, 구소련 및 동독 학파는 1871년설을 지지해왔다. 1870년설은 룩셈부르크의 어머니 등 가족의 증언에 따른 것이고, 1871년설은 룩셈부르크가 취리히 대학에 제출한 신상명세서에 근거한 것이다. 오래된 룩셈부르크 생년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생각으로 마우고자타 포피우웨크 박사는 로자의 출생증명서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자모시치 문서보관소에서조차 룩셈부르크의 출생증명서를 찾는 데 실패했다. 이제 1870년설과 1871년설은 서로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고 팽팽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 겨우 1년 차이가 대수냐 싶겠지만, 블라디미르 레닌이 1870년생이라는 점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레닌주의를 '타타르 마르크스주의'라고 평가절하하고, 민주집중제나 전위당 이론, 민족자결권을 신랄하게 비판한 점을 생각하면 같은 해에 두 사람을 함께 기념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할 때 이런 딜레마는 더 컸을 것이다. 그러니 1871년 출생설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념하기에 훨씬 편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2015년에 작고한 펠릭스 티흐(Feliks Tych)에게서 들었다. 유대계 폴란드 역사가인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룩셈부르크 전문가이다. 그렇게 좌파든 우파든 폴란드 사회의 기억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특히 폴란드 독립을 반대한 그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룩셈부르크는 일관되게 폴란드 독립보다는 러시아혁명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폴란드사회당(PPS)의 사회애국주의에 맞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선을 대표한 것이다. 그 이상적 국제주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나 서유럽의 사민주의에 맞서 제3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이유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조국 폴란드에서는 지워버리고 싶은 대상이 된 것이다. 1795년 이래 한 세기 이상 러시아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에게 분할 점령된 폴란드의 역사적 맥락에서 폴란드 독립에 반대한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정서적으로 수용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우파 민족주의 정권이 룩셈부르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일의 우파들에게 '붉은 로자'였다면, 폴란드의 우파들에게는 '민족배반자'였다. 반유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유대계 민족배반자를 사랑하고 기념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룩셈부르크 명판은 자모시치 구시가 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 유대계 공산주의자, 설 곳을 잃다로자 룩셈부르크는 현실사회주의 시절에도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다.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는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민족허무주의'라는 딱지를 붙였다. 1931년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skaja Revolucia)》 편집부에 보낸 편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볼셰비즘의 적'이라고 낙인찍었다.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라는 레닌의 격찬도 '룩셈부르크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비난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1932년에 열린 폴란드공산당(KPP) 제6차 당 대회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룩셈부르크의 사상적 적통이라고 자부하던 당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56년 소련의 제20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주의의 죄상이 폭로된 이후에야 복권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1956년 10월 문화궁전 앞 광장에 운집한 군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권좌에 복귀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는 '폴란드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표방했다. 당의 공식 선전물을 가득 채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수사는 무늬에 불과했다. 고무우카가 대변한 당내 빨치산파는 민족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 안에는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도 자리 잡고 있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서 펼쳐진 반시온주의 캠페인은 반유대주의를 감싸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풀어버렸다. 당의 반유대주의는 1967년 6월 19일 고무우카의 악명 높은 '제5열' 연설에서 절정에 올랐다. 다음 날인 6월 20일의 신문기사는 '제5열'이라는 단어를 삭제했지만, 연설 테이프가 남아 있다. 바르샤바의 유대사 박물관 폴린(Polin)에서 전시되고 있는 '폴란드의 1968' 50주년 특별전이 들려주는 고무우카의 육성은 사실을 알고 들어도 다시 놀랍다. "모든 사람에게는 조국이 하나밖에 없는데, 조국이 두 개인 자들이 있다. …… 우리 조국과 당 내부에 시온주의자들, (제국주의의 스파이인) 제5열이 침투해 있다." 이스라엘의 승리에 '환호한' 폴란드 당내 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을 겨냥한 연설이었다. 바르샤바 시내 푸와프스카(Puławska) 거리에 모여 살아서 푸와프스카파라 불린 이들은 당내에서 개혁공산주의를 대변했다. 제5열을 향한 고무우카의 공격은 바로 이들 유대계 개혁파에 대한 공격이었다. 나톨린(Natolin) 거리에 웅거하며 완고한 보수주의 노선을 추구했던 빨치산파의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얀 그로스를 비롯한 유대계 지식인들이 탈당하고 망명길에 오른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종전 직후 크라쿠프, 키엘체 등에서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을 때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둥지를 떠나지 않았던 이들의 이민 물결은 폴란드 공산주의가 민족주의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기억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고무우카와 빨치산파의 공격은 곧 로자 룩셈부르크를 공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 교육이 폴란드의 청소년에게 민족허무주의를 주입시킨다는 비판은 이미 1960년대 내내 제기되었지만, 1968년 이후에는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정통성 논쟁으로 비화했다.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우뚝 선 유대계 마르크스주의자에게서 운동의 정통성을 빼앗아 순수 폴란드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쥐어주는 역사 다시 쓰기 작업과 연동되었다. 빨치산파의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룩셈부르크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룩셈부르크의 이론적 오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레닌의 전위당 이론과 민족자결권을 비판한 내용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자 알렉산데르 코한스키(Aleksander Kocha?ski) 같은 일부 유대계 역사가들이 '객관적 애국주의'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룩셈부르크를 옹호하고 나섰다. 룩셈부르크가 19세기 말 폴란드의 독립을 반대했고 그래서 주관적으로는 비애국적이지만,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이 민족주의적 억압을 해소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는 애국적이었다는 논지였다. 논리도 다소 궁색했지만, 정치적으로도 빨치산파가 이끄는 민족주의적 캠페인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7년에 국영출판사인 PWN에서 만든 《대백과사전》의 '절멸수용소' 항목이 유대계의 희생만 일방적으로 강조했다는 빨치산파 예비역들의 잇단 비난에 이어 백과사전 기획자인 아담 브롬베르크(Adam Bromberg)를 공금 오용의 혐의로 구속하면서 이미 유대계의 기세는 꺾여버렸다. 이 와중에 심지어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폴란드왕국/리투아니아사회민주당(SDKPiL)의 당원이 아니었다는 지나치게 창조적인 해석도 나왔다. 그 해석의 과학적 근거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당비를 낸 영수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당을 만들고, 당 강령을 쓰고, 당 기관지를 편집하고, 당의 노선을 정립했다고 해도 당비를 내지 않았다면 당원 자격증이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당비를 안 낸 로자 룩셈부르크는 진작 당에서 제명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제명되지 않았으니 역사에서 지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Julian Marchlewski)나 체자리나 보이나로프스카(Cezaryna Wojnarowska) 같은 폴란드 '순종'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당의 핵심 세력이었음을 밝히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룩셈부르크의 영향력이 실제로는 크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핵심 주장이다.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의 주요 도시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 광장이나 거리를 갖고 있는 데 비하면, 폴란드 공산당은 이마저도 인색했다. 폴란드가 낳은 가장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인데도 폴란드 전역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 거리는 없었다. 단지 폐허가 된 바르샤바 게토의 경계 바로 너머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 전구 공장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폐허로 전락한 룩셈부르크 전구 공장 앞에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기념 박물관'이 세워졌다.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우파 민족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담 미흐니크(Adam Michnik)도 1960년대 말에 룩셈부르크 전구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다. 바르샤바의 68 시위를 이끌어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직후 이 공장에 배치되었다는데, 미흐니크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술회한 바 있다.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역사 에세이스트이자 신문편집자인 미흐니크가 룩셈부르크주의자였다고 속단하지는 말자. 그가 행복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온통 젊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일했기 때문이다. 이 좌파 쾌락주의자이자 젊은 유대계 반체제 지식인이 룩셈부르크 전구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해하는 정경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그런데 사실 웃을 일은 아니다. 공산주의든 반공주의든 폴란드 사회의 기억 문화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한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자유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자유"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각은 교조적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를 미워한 폴란드의 공산주의는 결코 모순어법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를 미워하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모순어법이 아닌 것처럼. 단지 그것이 진실처럼 작동하기 위해서는 불편한 기억들을 지우는 망각의 정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망각도 기억의 한 방편인 것을……. [네이버 지식백과] 마르크스주의자를 미워한 공산주의 - 폴란드의 기억에서 지워진 로자 룩셈부르크 (기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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