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프랑크와 넬슨 만델라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2 | 조회수 | 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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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정치, 남아공에서 나치즘을 불러내다
숨겨진 두 페이지독일에서 살던 유대인 소녀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은신처에 숨어 지낸 이야기를 담은 《안네의 일기》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다. 동아시아의 한 · 중 · 일 청소년들도 대개 알 정도로, 홀로코스트 수기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 그만큼 많이 팔린 책이기도 하다. 그 원본인 안네 프랑크의 일기 가운데 갈색 종이를 붙여서 가려놓았던 두 페이지의 내용이 최근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안네 프랑크 박물관 소속 연구원들이 최근 이미지 처리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갈색 종이에 가려진 글자들을 해독해냈다고 한다. 최신의 이미지-글자 전환 소프트웨어가 종이 뒤쪽에서 역광을 비추고 찍은 사진 이미지를 글자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가려져 있던 두 페이지에는 줄을 그어 지운 구절 다섯 개 외에 네 가지 야한 농담, 성교육과 매춘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성매매를 언급하며 "정상적인 남자라면 누구나 거리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며", "파리에는 이를 위한 집들이 마련돼 있고, 아빠도 거기에 간 적이 있다"고 썼다. 은신처에서 숨어 지낼 때 주변 어른들이 흘린 이야기를 주워듣고 쓴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어린 소녀에게는 금기시되는 내용이라 아무도 못 보게 스스로 가려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볼까 봐 스스로 검열을 한 셈이다. 혹은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딸의 일기를 출판하면서 자기 이야기가 들어 있는 부분을 가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네의 일기》는 사실 1947년 첫 출간 때부터 편집 논란에 시달렸다. 오토 프랑크는 초판 서문에서 가족의 내밀한 사생활이나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성에 대한 내용 등은 뺐다고 밝힌 바도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일기가 출간되자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안네 프랑크의 삶이나 생각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일기 어디에서도 유대교의 계율을 지키려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독일에 동화된 유대인으로 살다가 나치 집권 이후 네덜란드로 피신한 집안이니 세속주의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정통 시온주의자들도 불만이 많았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유대인이라는 수동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같은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려는 그들에게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소심하고 수동적 유대인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런 이유에선지 처음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었을 때는 독서계의 반응도 미지근했다. 1952년 일본어 번역판이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 400만 부 이상 팔리고 청소년용 만화 등도 출간된 일본의 안네 프랑크 열기는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었다.(홀로코스트 열기의 일본적 특수성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논할 것이다.) 서구에서 안네 프랑크가 크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는 뮤지컬이 상연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정작 유대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번에도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뮤지컬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안네 프랑크의 유대적 정체성이 지워졌다고 분노했다. 그들에게는 뮤지컬 속의 안네가 그저 옆집의 비유대인 소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시오니스트들도 비판적인 건 매한가지였다. 심지어는 《안네의 일기》를 불태우고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목소리도 들렸다. 《안네의 일기》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계의 특수한 정서를 넘어선 보편성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내밀한 고민과 미세한 감정의 떨림 등이 국경과 인종, 종교를 넘어 큰 호소력을 지녔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안네 프랑크는 그 보편성 덕분에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비극을 전 세계의 청소년에게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한 셈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간 《안네의 일기》《안네의 일기》의 호소력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1948~1994)에 대항해 온 몸을 던진 투사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권운동가이며 정치가였던 넬슨 만델라에게도 미쳤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민주화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얼마 안 된 1994년의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우리(반아파르트헤이트 정치범)의 정신을 고양시켰으며, 자유와 정의의 대의는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가 인종차별주의의 한 극단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만델라가 안네 프랑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래도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아프리카국민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정치범들에게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정치범들의 감옥으로 악명 높았던 로벤 아일랜드(Robben Island)의 자료실에는 수감자들이 남긴 노트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아메드 카트라다(Ahmed Kathrada)가 남긴 노트가 가장 유명한데, 18년간 복역하면서 밀반입된 책이나 신문 등에서 따온 인용문들이 주된 내용이다. 안네 프랑크는 카트라다가 엄중한 처벌을 각오하고 만든 이 노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4인방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장기수의 노트 속에서이긴 하지만, 안네 프랑크는 소포클레스, 공자 그리고 잔 다르크와 같은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시대착오적 인종차별주의와 싸우고 있던 이들에게 나치의 인종주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던 안네 프랑크의 기억은 그만큼 소중한 정치적 · 문화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이미 1940년대 초부터 남아공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자국의 인종차별주의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연결함으로써 운동의 동력과 국제적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민주주의로 바뀌어가던 1990년대에도 정의와 화해, 아파르트헤이트와 그 희생자에 대한 기억과 복권 등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질 때면 나치즘과 홀로코스트가 비교 대상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하지만 남아공에서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1957년 남아공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저명한 유대인 연출가 레너드 샤흐(Leonard Schach)가 케이프타운의 극장에 올린 뮤지컬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무려 8개월 동안 장기 공연에 성공했다. 백인 관객들에게 이 뮤지컬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신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 한 소녀의 인생극장으로 읽혔다. 그들에게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치 현실과 안네 프랑크의 이야기는 결코 연결되지 않았다. 뮤지컬에서 나치즘의 기억이 지워져 버린 탓이다. 대신 유대적 정체성이 되살아났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미국의 청중을 고려해 하누카(Hanukkah)의 송가 장면에서 히브리어 노래를 영어로 바꿔버렸는데, 남아공에서는 히브리어 노래가 되살아나는 식이었다. 정통파 유대교도였던 연출가 샤흐의 입김이 작용한 탓인데, 심지어는 안네 프랑크 가족이 겪는 고통은 독일인으로 동화되기를 꿈꾸던 유대인이 겪어야만 했던 인과응보라는 시각이 엿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남아공 버전의 뮤지컬에서 되살아난 유대적 정체성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이데올로기와 기묘하게 매치되었다. 인종주의적 권력 집단인 국민당은 '평등한 분리'라는 슬로건 아래 흑백의 인종적 정체성을 뚜렷이 함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의 문화 담론을 구축했다. 나치의 인종주의적 학살이라는 역사적 맥락만 제거되면, 유대적 정체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아파르트헤이트와 배치될 것은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기승을 부리던 1977년,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역시 샤흐의 연출 아래 아프리칸스어 연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되기도 했다.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공연된 이 연극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와 연결시켜서 보는 백인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나치즘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연결하다프리토리아의 백인 관객들이 역사성이 삭제된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즐기는 동안, 반아파르트헤이트 인권운동가들은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이야말로 나치의 패망 이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전투'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3년 연속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서 열린 '남아공의 나치즘(Nazime in Zuid-Afrika)' 전시 기획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네덜란드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단체가 주관한 이 전시들은 나치즘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71년 여름 남아공-네덜란드 학생 단체가 조직한 첫 번째 전시는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령들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사법 조치들 그리고 반투스탄(Bantustan)과 게토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시 기획자의 말을 빌리면, 굳이 나치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전시를 한번 둘러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안네 프랑크 기념관이라는 장소의 특별함 덕분에 이 전시는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전시는 안네 프랑크 일가가 숨어 지내던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관람을 끝내는 동선으로 짜였는데, 전시실을 나서는 관람객은 모두 '나치즘=아파르트헤이트'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 밑을 지나야만 했다. 1972년 여름의 두 번째 전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유지하는 데 투자된 외국 자본이 주제였다. 전시장 안에는 당시 남아공의 수상이었던 발타자르 포어스터(Balthazar J. Vorster)의 실물 크기 종이 인형이 나치의 휘장인 하켄크로이츠를 들고 있었다. 또 이런저런 아파르트헤이트 정치가들의 인종주의적 발언들을 딴 포스터들이 걸려 있었다. 이 전시 역시 관람객을 끄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3년의 마지막이자 세 번째 전시는 관람객들의 방명록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유럽, 미국, 중남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남아공 등에서 온 수천 명의 관람객이 남긴 반응은 제각각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치즘과 아파르트헤이트의 비유가 설득력이 있으며 인종주의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고 썼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온 방문객들은 대부분 심드렁했고, 남아공에서 온 관람객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남아공의 언론들도 전시를 주목하고 본국에서의 토론을 이끌었다. 편견과 광기에 사로잡힌 남아공 때리기라는 비난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가 지속되는 한 전시가 보여준 남아공의 이미지는 바뀔 수 없다는 용기 있는 주장도 나왔다. 전시를 주도한 집단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나치즘 이전부터 존재한 식민주의의 유산이기도 한데 '나치즘=아파르트헤이트'라는 등식은 식민주의의 책임을 지워버린다는 비판이 대표적이었다. 안네 프랑크의 유산을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투쟁에 이용하는 데 찬성하고 지지해 온 안네의 아빠 오토 프랑크도 '나치즘=아파르트헤이트' 등식에는 반대의 뜻을 보였다. 결국 1973년 전시를 마지막으로 안네 프랑크 기념관과 남아공-네덜란드 학생 단체는 결별하고 더는 전시가 열리지 않았다. 자기변명과 자기비판 사이에서남아공 본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전선에서는 나치즘에 대한 비유가 그치지 않았다. 만델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히틀러 같은' 국민당 정부, '장차의 게슈타포,' '주인 인종(Herrenvolk) 정책' 등의 말을 즐겨 썼으며, '벨젠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유령이 남아공을 배회하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초점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나치즘에 비유함으로써 인종차별정책을 비판하는 데 있었을 뿐이며, 나치의 희생자들은 단지 부차적 관심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범죄를 폭로하고 그에 반대하는 운동의 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적 비판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치즘과의 비유는 매우 분명하고 도덕적 정당성과 지적인 확신을 줄 수 있었고, 총과 지식을 독점한 거대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싸울 때 가장 유효한 기억의 프레임이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라는 나치즘의 사악한 범죄행위는 너무도 자명해서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희귀한 역사적 예였다. 그렇다고 해도 정작 희생자들 개개인이 겪는 고통과 아픔은 물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구조적 비판의 그늘 아래에서 지워진다는 느낌은 감추기 어렵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정언명령은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도덕률이 정치의 영역에서 작동할 때 희생자들을 도구화하는 경향 역시 부정하기 힘든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끝나고 민주주의로 바뀌어가는 시기에 안네 프랑크에 대한 남아공의 기억이 바뀌는 데서도 기억의 정치에 내재할 수밖에 없는 도구주의적 경향이 잘 드러난다.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공에서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에서 화해와 관용의 상징, 민주화된 남아공과 전 지구적 인권 체제를 연결하는 보편적 희생자-인간의 이미지로 재정립된 것이다. 1994년 케이프타운에서 시작해서 14개월 동안 남아공 전국을 순회한 전시 '세계 속의 안네 프랑크(Anne Frank in the World)'가 대표적인 예이다. 요하네스버그의 전시 개막식에는 신임 대통령 만델라가 직접 참석해서 앞서 인용한 연설을 했다. 안네 프랑크가 살아서 그 연설을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희생자의 기억이 도덕의 영역에만 머물러야지,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너무 순진하며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기억의 정치에서 희생자를 도구화하는 경향을 부정해서도 곤란하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도 '불가피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태도와 '불가피하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회의하는 태도 사이에는 큰 벽이 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 차이가 한 사회의 기억 문화가 자기변명 중심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자기비판 중심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큰 차이를 낳는다. 한국 사회의 기억 문화는 어느 편에 가까울까? [네이버 지식백과] 안네 프랑크와 넬슨 만델라 - 기억의 정치, 남아공에서 나치즘을 불러내다 (기억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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