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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과학기술 관료는 부역자일까?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2 조회수 379

과학기술 관료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과학(자)와 조국

흔히 과학은 언제 어디서나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 과학을 실행하는 과학자는 각각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역사적 인간이다. 루이 파스퇴르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본(Bonn) 대학에서 받은 박사 학위를 반납하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말을 남겼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과학자의 조국'이라는 파스퇴르적 명제를 식민지에 비추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제국대학의 공학부 · 이학부 · 농학부 출신 조선 유학생 다수가 일본 본토와 조선총독부, 만주(국) 등지에서 기술 관료로 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민지 개발과 농업 증산에 헌신했다. 그들에게 제국과 민족의 이익은 대립적이지 않았다.

윤리의 준거를 해방 이후로 옮기면 사태는 달라진다. 식민지 광산 자원 공출을 독려한 총독부 광공국 서기관인 도쿄제대 법학부 출신 임문환이 친일파라면, 그 광산 자원을 과학적으로 선별한 총독부 식산국 광산과 기사인 도쿄제대 공학부 광산야금학과 출신 김성호도 친일파일 것이다.

그렇지만 식민지 기술 관료의 '친일성'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운 애매한 경우가 많다. 교토제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최경렬은 총독부 기수가 되어 1936년 완공된 한강인도교(현재의 한강대교)를 설계하고 공사를 직접 감독했다. 총독부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평양 보통강 직강공사, 인천 제2갑문공사 등에도 관여했다.

그의 토목공학 지식은 총독부의 식민지 개발에 긴요하게 쓰였지만, 그 결과물인 한강인도교는 식민지 민중들이 안전하게 한강을 오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최경렬은 총독부 시절의 한강대교 설계 공로로 독립한 한국에서 1960년 3 · 1문화상을 받았다. 과학기술의 업적은 '국가'를 넘어서는 것일까?

한강대교

한강대교

제국대학 농학부 출신 기술 관료들도 일본과 조선, 만주 등지에서 식량 증산에 기여했다.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은 일본의 국립농사시험장(코노스)에서 수입에 의존하던 종자의 전량 국산화(일본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농정 자문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농업 기술 관료들의 노력으로 식량 증산이 이루어졌지만, 그만큼 공출도 늘어 일본의 전쟁 자원이 되었다. 이들은 부역자인가?

차별을 극복하는 '과학' 판타지

식민지인들에게 과학이란 무엇이었을까? 앞질러 결론을 말하자면, '과학'은 차별을 극복하고 세계적 수준의 주체로 비약할 수 있다는 환각을 제공했다.

식민지인은 삶의 전 영역에서 차별을 겪었다.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 엘리트들도 이러한 차별을 피할 수 없었다. 똑같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에서 같은 직급으로 근무하더라도 가봉()제도에 따라 일본인이 더 많은 급여를 받았다.

대학과 지식인 사회도 다르지 않았다. 제국대학 문과 계열의 교수직은 조선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문과 계열 출신의 뛰어난 조선 지식인이 갈 수 있는 교수직은 관립과 사립의 전문학교가 그 최대치였다. 도쿄제대 문학부 철학과 출신의 윤태동이 1934년 몇 달 동안 경성제대 예과의 교수로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대신한 제도인 예과의 교수는 대학 교수가 아니었다.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과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은 1천수백여 명이 넘는다. 그러나 8 · 15 해방 때까지 제국대학 문과 계열 교수직에 진출한 조선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일본은 식민지인이 제국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허용했지만, 가르치는 권위만큼은 패망 때까지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이태규와 리승기가 차례로 모교인 교토제대 이학부와 공학부의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태규와 리승기의 제국대학 교수 임용 소식에 식민지 저널리즘은 열광했다. 이태규가 프린스턴 대학에 연수를 떠나거나 리승기가 '합성 1호' 등의 인조섬유를 발명한 일은 조선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사건으로 곧바로 보도되었다.

과학기술은 과학자의 출신, 즉 민족이나 국적, 계급, 성별보다는 그 업적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퀴리 부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식민지 폴란드 출신의 여성 과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라듐 원소를 발견한 과학적 업적 때문이다. 그렇지만 식민지인들은 그녀가 식민지 출신이라는 사실에 더 크게 반응했다.

식민지 저널리즘은 과학의 내용보다는 그 성취가 얼마나 '세계적 수준'이며 그를 통해 어떤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테면 도쿄제대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장춘의 업적은 '피튜니아 겹꽃 종의 합성' 이론의 내용보다는 세계 농학계에 명성을 남기고 '조선인 최초'로 '동양 최대의 농사 시험장'의 '최고 기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혔다.

이런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식민지에서 과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적 과학자는 민족의 울분을 풀어준 스포츠 스타와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다.

《동아일보》는 1939년 1월에 〈세계에 빛나는 우리 명장()〉을 연재한다. 세계적 성취를 이룬 조선인을 소개하는 이 연재의 9회 차는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편이었다.1)바로 그 앞의 8회 차의 제목은 〈비타민 E 결정 발견 세계 학계에 대충동-노벨상 후보 김양하 씨〉2)다.

《동아일보》 1939년 1월 10일자 신문에 실린 '세계에 빛나는 우리 명장' 김양하 소개 기사

《동아일보》 1939년 1월 10일자 신문에 실린 '세계에 빛나는 우리 명장' 김양하 소개 기사

함흥 출신인 김양하는 당시 도쿄제대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핵심 국책 연구기관인 '리켄'(이화학연구소)의 스즈키 우메타로()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김양하는 1935년 쌀눈에서 비타민 E 결정을 추출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발견하여 '리켄'의 학술지에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이 어려운 논문을 한글로 번역해 네 번에 걸쳐 연재하는 성의를 보였다. 《동아일보》 기자는 "일본 학계에서 '노벨상'의 후보자를 추천한다면 단연 우리의 김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아쉽게도 경쟁 연구자들의 성과가 쏟아지면서 김양하는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에 감격하고 김양하의 '노벨상'을 열망하는 식민지인의 심정이란 무엇일까?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서구(팝)에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팝송 세대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방탄소년단'을 보며 느끼는 기분과 흡사할지도 모르겠다.

식민지 문학의 과학자 표상

유진오는 많은 작품에서 차별받는 조선 지식인의 비애를 그렸다. 알다시피, 유진오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식민지 시기에는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해방 이후에는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초대 법제처장,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이미 학생 시절부터 그는 식민지를 떠들썩하게 한 '민족의 수재'였다. 경성제일고보(경기고)를 졸업한 그는 경성제대 예과에 수석 입학하여 법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모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4년 동안 법문학부 연구실 조수로 있으며 대학 강사로도 출강했다. 1회 졸업생으로 이 정도의 성적이라면 모교 교수를 꿈꾸었음직하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식민지 출신들에게 문과 계열 제국대학 교수직은 막혀 있었다. 도쿄제대 지질학과 출신 김종원이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에 이공학부 조교수로 임용된 것이 경성제대에서 조선인이 교수가 된 유일한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 유진오가 울분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진오는 꿈이 가로막힌 식민지 수재의 설움을 여러 작품에 새겨두었다. 〈김강사와 T교수〉는 관립 전문학교가 배경이고 도쿄제대 독문과 출신 김만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일본인 중심의 지식제도에서 제국대학 졸업생이 받는 설움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유진오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는 경성제대 대학원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은 소설도 썼다. 〈수난의 기록〉3)은 겉보기에는 경성제대 대학원생과 댄서의 통속 연애소설이다. 하지만 그 심층의 서사는 사회주의적 전망이 막힌 시대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방법론으로 식민지를 분석해온 경성제대 조선 지식인의 좌절을 다룬다.

소설의 주요 서사는 주인공 김세민이 같은 연구실 소속의 실력 없는 일본인 동료에게 교수직이 보장된 유학 기회를 빼앗긴 후 술집을 전전하는 이야기이다. 김세민이 경성제대 대학원 경제학연구실 조수이고 연구 주제가 농촌 현실 분석이라는 점에서는 유진오의 1년 후배로 북한 초대 농림상을 지낸 박문규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세민은 유진오를 비롯하여 차별의 벽에 부딪혀 좌절해야 했던 제국대학 출신 식민지 수재들 모두를 상징한다. 유진오는 자신을 비롯한 재능 있는 후배들이 겪은 지식장에서의 차별과 울분을 김세민의 방황을 통해 표현했다.

식민지 문학은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들의 좌절과 상처를 어떻게 봉합했을까? 그 사례 역시 유진오 소설에서 확인된다. 유진오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인 《화상보》 역시 대중 연애소설이지만, 당대의 차별적인 지식제도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

소설의 주인공 장시영은 수원고농 중퇴생으로 중학 시대부터 10여 년간 독학으로 조선의 식물을 연구한 성실한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식물속'을 발견하면 그것을 수원고농의 은사인 무라마쓰 교수에게 보낸다. 그러면 무라마쓰는 다시 도쿄제대의 식물학의 권위자 나가이 박사에게 그 '식물속'에 대한 감정과 명명을 요청한다. 결국 이 새로운 '속'의 발견은 제국대학의 권위를 배경으로 지닌 나가이의 이름이 붙어서 세계 학계에 보고된다.

식민지-제국의 지식제도는 '나가이(도쿄제대)/무라마쓰(수원고농)/장시영(식민지 민간학)'으로 위계화되어 있다. 소설은 장시영이 도쿄에서 열린 제국식물학회 석상에 초청되어 논문을 발표한 후 교수 자리가 예약된 수원고농 조수로 임명되며 끝난다. 중졸의 식민지인 장시영은 식물학(과학)의 업적으로 제국 과학계의 시민권을 획득한다.

과학이 부리는 마술 같은 성공담의 결정판은 이광수의 소설 〈그들의 사랑〉에서 만날 수 있다.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 리원구는 일본인 교수 니시모도 박사 일가의 가정교사이다. 박사의 딸 미치코와 애정 문제가 불거지자 리원구는 '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쫓겨난다. 리원구는 경성제대를 중퇴한 후 새로운 결심으로 K제대 이학부를 졸업하고 액화 원료를 개발하여 이학박사가 된다.

여기서 연재가 중단되어 결론을 알 수 없지만, 이광수는 어쩌면 과학적 성취를 이룬 리원구가 '피의 차이'를 넘어서 미치코와 결혼하는 결말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리원구가 다시 다닌 K대학은 교토제대를 연상시킨다. 저널리즘의 보도에 익숙한 식민지 독자들은 이학부 졸업 후 액화 원료를 개발하는 리원구의 형상에서 당시 교토제대 교수로 있던 화학자 이태규와 공학자 리승기의 모습이 어른거린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한국 근대 과학계의 최고 스타인 이 두 교수를 만나볼 때가 되었다.

교토제국대학의 두 조선인 교수 이야기

이태규
리승기
 

이태규(좌)와 리승기(우)

 

이태규와 리승기는 교토제대 선후배로 함께 모교 교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 이들은 각각 남북한을 대표하는 과학자가 되었다. 그동안 이들의 삶은 냉전 시대의 라이벌적 구도 속에서 설명되어왔다. 특히 내셔널리즘과 진보가 결합된 역사관에서 보면, 이태규와 리승기의 삶은 도덕적으로 상반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학자 강만길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이 그리는 이들의 삶의 형상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강만길은 이태규와 리승기의 식민지 및 해방 이후의 이력과 체제 선택의 행로를 검토하며 그 둘을 도덕적으로 다른 형상을 지닌 과학자들로 암시한다.

강만길은 《특고월보》에 게재된 지원병제 실시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조선에도 의무교육령을 실시하고 징병제로 하면 일본 전체가 얼마나 강하게 되고 행복하게 될지 모른다."4)라며 징병령을 희망한 이태규의 답신을 발굴하여 비판했다.

이태규의 행적과는 반대로 리승기는 '폴리비닐'을 군수용으로 바꾸는 연구를 하라는 육군부의 명령을 사보타주(sabotage)하고, '일본의 패망을 기다리며 연구를 지연시킨다는 말'을 조선 동포로 가장한 헌병대 끄나풀에게 털어놓아 체포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에 석방된 행적이 거론되고 있다. (리승기의 투옥은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폴리비닐 군수용화에 대한 사보타주 때문인지는 명확치 않다.)

해방 직후 이 둘은 신생 국가 수립에 기여할 목적으로 함께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서 동료로 근무한다. 이후 이태규는 1948년 도미하여 1973년 귀국할 때까지 미국 유타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이에 대해 강만길은 "일제강점기의 조선 청년들을 징병제로 내몰아 침략전쟁의 전사가 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또 다른 쿄오또제국대학 교수 이태규 박사가 해방된 조국 땅에 살지 않고 미국에 가서 살게 된 일, 그러면서도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힌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도 역시 우리 현대사가 풀어야 할 문제"5)라고 쓰고 있다.

강만길의 진술에서 '국대안'의 분란의 와중에 당국의 입장을 대변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전쟁의 전 민족적 재난에서도 홀로 떨어져 '안락한 삶'을 누리고, 노후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태규의 삶의 궤적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강만길의 이태규 평가에는 한국 내셔널리즘의 저류에 흐르는 '검은 머리 외국인'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 드러나 있다.

반대로 리승기는 미국의 나일론과 경합하는 세계적 발명인 합성섬유의 개발자이면서도 자신의 과학기술이 파시즘 일본의 전쟁물자가 되는 것을 막다가 투옥된 민족적 지사로 묘사된다. 또한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월북하여 비날론을 개발, 공업화에 성공하여 '북녘 주민들의 의생활 해결에 크게 공헌'한 삶의 궤적은 도덕적 정당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태규와 리승기는 박정희와 김일성에게 각별한 존경과 지원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강만길이 직접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태규의 친일적 형상은 박정희의 만주국 군관 이력을 연상시키고, 리승기의 민족주의적 열정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연상시킨다. 과학자로서의 이태규와 리승기의 선택과 삶의 행로를 이처럼 민족 · 반민족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그들은 왜 북한과 미국을 택했을까?

리승기의 월북 동기에 대한 과학사가 김근배의 견해는 이러한 도덕적 관점을 재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김근배는 해방기의 과학 건설은 이 두 과학자의 개인 차원에서는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별다른 성과 없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러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 과학자로서 이들이 취한 행동은 이데올로기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연구 분야와 활동 경력과 관련해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근배에 따르면, 이태규는 이미 식민지 시기 프린스턴 대학에서 2년간 연수한 경험이 있는 이론과학자이기 때문에 세계 과학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의 중심으로 등장한 미국이 자신의 연구처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반대로 리승기의 경우 일본에서만 연구 활동을 했으며, 전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지역성이 강한 일본식 과학 연구의 경험을 쌓은 실험과학자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이태규는 '국대안'의 과정에서 정치가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과학의 연구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경험을 하고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절감했으며, 리승기는 해방기 삼척 북삼화학의 실패를 통해 정치의 후원 없이는 대규모 설비가 필요한 응용과학의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그들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태규의 도미와 흥남화학공장 건설을 약속한 김일성의 제안을 받아들인 리승기의 월북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김근배의 견해다.6) 그들의 선택은 "최소한 자신들의 연구나마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나서는 것"7)이었다. 도덕을 걷어내고 보면 둘 모두 과학자이자 인간으로서 내릴 수 있는 합리적 선택을 한 셈이다.

리승기의 과학은 도덕적인가?

식민지 시기 리승기의 과학은 이태규에 비해 도덕적이었나? 식민지 말기에 리승기가 남긴 진술을 하나 읽어보자.

리승기 : 그러기에 서로 경쟁적으로 연구해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일대일 정도가 아니라 구미 사람이 한 가지를 발명하면 우리는 2나 3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선서 분전하는 장병과 같이 과학자들도 그들에 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쟁이야말로 우리에게 과학 정진에 좋은 기회를 주었고 중대한 시련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미국이나 독일이 먼저 발달된 것은 사실이나 일본 과학문명도 그 역사는 비록 한 세기도 못 될 만치 짧되 그 수준이 저열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전이 나기 전에는 외국 과학서적을 갖다가 번역하기가 바쁜 감도 있었는데 지금 서로 서적 유출입이 차단되었으니 서로 답답한 구석은 있으나 그것은 피차가 똑같은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니 대전 중에 서로 연구해서 전쟁이 끝난 후에 서로 비교해보고 누가 더 연구하고 성공했나 하는 것을 검토해보는 데 과학의 승리가 있을 것이오, 또 과학의 승리가 있는 데 더 큰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우리 과학전사들은 정진하고 있습니다.8)

위의 인용은 1942년 교토에서 이태규, 리승기, 박철재 3인의 교토제대 박사가 참석한 〈삼박사 좌담: 과학세계의 전망-특히 이공화학을 의제로 하야〉에서 리승기가 한 발언의 일부이다. 리승기는 일본의 국가 과학이 미국, 독일을 능가하는 성취를 이루도록 노력하자는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 '전선서 분전하는 장병'과 동렬에 '과학자'를 위치시키는 리승기의 발언은 '총후'의 '과학전사'라는 '전시과학'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전시과학을 배경에 둔 리승기의 발언은 앞서 강만길이 비판하는 이태규의 진술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뒤 과학적 성과의 우열을 비교해보자는 리승기의 진술은 나일론에 대항하여 석탄에서 뽑아내는 인공섬유 '합성 1호'를 성공시킨 리승기의 과학적 자부심의 피력이기도 하다. 나일론 대 '합성 1호'는 미국 대 일본이 벌인 태평양전쟁의 과학적 버전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이러한 대립은 나일론(미제과학) 대 비날론(주체과학)의 대결로 전환된다.

나는 리승기가 연구를 통해서 헐벗은 대중들에게 염가의 피복을 제공함으로써 의복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는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대중은 일본 국가 안의 조선인과 일본인 및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다양한 사람을 포함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과학은 일본 국가와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었고, 그 결과도 전시의 일본 국가로 수렴되었다.

해방 이후 그의 과학은 새로운 국가와 관계를 맺게 된다. 리승기의 연구는 북한의 국가적 후원을 통해서 공업화될 수 있었고,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주체과학의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국의 과학은 민족의 과학으로 탈바꿈했으며, 제국 일본의 전시과학의 성과물인 '합성 1호'는 민족적 주체과학의 상징인 '비날론'으로 거듭난다.

이태규와 리승기는 각각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그렇다면 문부대신이 임명한 고등관이었던 교토제국대학 교수 시절 그들의 과학이 봉사한 조국은 어디였나?

[네이버 지식백과] 식민지 과학기술 관료는 부역자일까? - 과학기술 관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제국대학의 유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