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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 실험실에서 펼쳐지는 예술 혹은 노동
작성자 철** 작성일 2018-07-12 조회수 230

과학 연구와 예술 창작의 닮은 점

지난 회까지는, 실제 과학 연구가 상식적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고정된 방법론에 따라 이루어지기보다는 통찰력을 갖춘 연구자의 ‘현명한’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서로 긴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수렴적 상상력과 발산적 상상력을 적절히 활용하는 판단이 중요한 활동이라는 점을 거듭 이야기했죠.

이번 회부터는 앞선 논의에 기초해 과학기술의 예술적 성격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예술적 성격’이라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익숙합니다. 컴퓨터공학자가 만든 미디어아트랄지 대도시 빌딩에 투사된 멋진 파사드 작품 등은 이제 낯설지 않은 문화적 풍경이 되었어요.

사실 당대의 첨단 기술이 예술 창작 과정에 활용되는 일은 우리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험적인 예술가들은 오래전부터 새로운 표현 기법이나 예술 형식을 찾았고 그 답을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적 고안물에서 얻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독특한 화풍을 만든 데 당시 급부상한 화학 산업에 힘입어 생산된 수많은 색감의 인공 염료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죠.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처럼 20세기 중엽 대량생산을 시작한 비디오 영상 기술에서 새로운 표현 매체와 예술 장르의 가능성을 본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예술 활동은 그 자체로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과학기술의 예술적 성격’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상파 그림이나 비디오아트에서 ‘과학기술’은 도구적 성격을 부여받습니다.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쓰인 과학기술은 그저 새로운 표현 매체를 제시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매체가 그 매체로 표현되는 내용을 어느 정도 규정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문학적 상상력을 시로 표현할 때와 소설로 표현할 때 그 내용이 얼마나 달라질지 상상해보면 이 점은 쉽게 이해가 갑니다. 따라서 첨단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 기존 예술의 정체성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량복제 시대에 예술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던 발터 베냐민의 통찰을 봐도 그렇고, 팝아트의 등장만 봐도 예술 작업에서 매체의 변화는 ‘무엇이 예술이고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데 분명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작품 수준에서 볼 때 앞서 지적한 ‘만남’은 대개 예술적 상상력이 과학기술적 도구로 표현된다는 점이 핵심이죠.

아래 이미지를 한번 볼까요? 그리고 이 이미지가 어떻게 얻어진 것일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언뜻 보기에는 팝아트 같기도 합니다. 물감을 적당히 흩뿌려 만든 예술 작품처럼 보일 수 있는데요,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어떤 ‘것’을 만들고 그걸 사진으로 찍은 겁니다.

카메라 제조업체 니콘에서 해마다 여는 현미경 사진 대회 ‘스몰 월드 컴페티션(Small World Competition)’의 2003년 출품작.

카메라 제조업체 니콘에서 해마다 여는 현미경 사진 대회 ‘스몰 월드 컴페티션(Small World Competition)’의 2003년 출품작.

그 어떤 ‘것’은 무엇일까요? 세제입니다. 빨래할 때 쓰는 세제를 적당히 용매에 풀고 거기에 특수 염료를 뿌립니다. 세제가 염료에 들러붙으면 물결무늬 같은 너무 뻔한 패턴이 나온다는 걸 잘 알기에, 응집성이 비교적 약한 염료들을 적당히 뿌려준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고배율 현미경으로 찍으면 이런 이미지가 나온다는 거죠. 자, 그럼 이건 공들여 만든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제를 희석하고 염료를 적당히 뿌려 사진 찍은 게 전부인데 과연 예술 작품이 맞는지 얼핏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작가가 아름다운 숲과 호수를 ‘찍은’ 것이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면 위 그림도 당연히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조금 더 난해한 질문도 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라 한다면 과연 어떤 종류의 예술 작품인가? 이를테면 예술자의 생각을 인위적으로 구현한 추상적 조형 작품에 가까운가 아니면 기암괴석을 절묘하게 담아낸 사진 작품에 가까운가?

일단, 인위성이 강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세제에 염료를 섞는 일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세제나 염료 자체가 지극히 인위적인 산업 생산물이죠.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이미지의 생산 과정 그 자체는 지극히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과정입니다. 어떤 색의 염료가 세제 분자에 어떤 형태로 결합하느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거든요. 그저 여러 번 시도해보고 가장 그럴듯한 이미지를 고를 뿐이거든요. 이런 방식이라면 ‘자연’이 예술가 노릇을 하고 우리는 그 결과물을 그저 사진으로 ‘보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요?

앞서 저는, 우리가 다룰 과학기술의 예술적 성격은 위 이미지를 얻어낸 방식처럼 과학기술이 예술적 작업에 ‘도구적’으로 활용된 상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은 어떻게 예술적 성격을 갖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는 과학 ‘연구 과정’ 자체가 예술 ‘창작 과정’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유사점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저 위의 세제 이미지가 ‘인위적’으로 얻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연현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기록하고 보고한 것인지 구별하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과학은 실험이고, 실험이 곧 과학이다!

일단 ‘과학(science)’과 ‘과학 연구(scientific research)’를 구별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의아해할 수도 있어요. 과학 연구를 하면 과학지식이 도출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결국 둘은 같은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실제로 과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합의된 과학지식은 분명 이전의 과학 연구로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 연구의 진행 과정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완성된 과학의 특징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래서 잘 정리된 과학지식만이 아니라 ‘진행 중인 과학(science in action)’에 대한 연구가 최근의 과학철학과 과학기술학에서 주목받고 있지요.

‘과학 연구(scientific research)’라는 단어로 이미지 검색을 했을 때 흔히 제시되는 사진.

‘과학 연구(scientific research)’라는 단어로 이미지 검색을 했을 때 흔히 제시되는 사진.<출처: 셔터스톡>

위 그림을 한번 보시죠. 포털 검색창에 ‘scientific research’라고 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입니다. 대개 깔끔한 흰색 실험복을 입은 과학자 두셋이 실험 안경을 쓰고 색색가지 액체를 섞고 있거나 배양 접시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시험관만큼이나 컴퓨터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제가 ‘실험 연구(experimental research)’라는 단어로 검색한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즉 ‘과학’ 연구와 관련해 자주 쓰이거나 곧잘 연상되는 이미지는 단연코 ‘실험’ 연구라는 점을 보여주죠.

실제로 21세기 현재 과학 연구에서 실험 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참여 연구자의 수나 산출되는 연구 결과의 양, 투입되는 자원의 양 등 어떤 지표로 판단해도 단연코 압도적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현상은 현대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관측이나 실험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오직 이론적 연구만 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도 뛰어난 관측천문학자였고 뉴턴도 수많은 화학·광학 실험을 수행했으며 아인슈타인조차 취리히 공과대학 재학 시절 이론 강의는 자주 빼먹었어도 어떤 때는 지하 실험실에서 몇 시간이고 실험에 몰두하곤 했습니다.

물론 현대과학 이전에는 이론적 연구라는 게 아예 없었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20세기 이전 과학에서 이론과 실험은 항상 결합된 방식으로 수행되었지 현대과학처럼 이론 연구와 실험 연구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론’과 ‘실험’이 각각의 연구로 분리된 지금, 대다수 사람은 ‘과학’이라 하면 방정식 몇 개로 우주의 비밀을 해명해내는 이론적 작업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자연현상을 꼼꼼히 관측하거나 실험장치를 잘 배열해 특정한 인과적 효과를 구현해내는 일이 현대과학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구 활동입니다.

이는 과학 연구가 ‘머리’를 쓰는 것만큼이나 ‘몸’을 쓰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와 몸을 총체적으로 활용하는 ‘노동’이라는 점을 함축합니다. 과학이라 하면 ‘기술’과 달리 지극히 추상적인 활동, 예컨대 수학 문제를 푸는 활동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과학 연구는 말 그대로 ‘고된’ 노동이라는 것이죠.

물론 그런 과정을 거쳐 도출한 성과에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노동이죠. ‘재미있는 노동’으로서 과학 연구가 지닌 특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활동이 바로 실험 연구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그 ‘실험’ 연구에 집중해 과학 연구의 예술적 성격을 살펴볼 겁니다.

그리고, 실험은 어렵다!

일단 실험 연구가 굉장히 어렵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으니 실험 연구도 당연히 어렵겠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의 과학 상식에 따르면 적어도 실험은 ‘제대로만’ 수행하면 정직하게 결론이 도출되는 분야 아니던가요?

어차피 자연현상은 참/거짓이 분명하고 정치적 견해에 따라 실험 결과가 달리 나오지 않을 테니 (물론 실험이 ‘제대로’ 수행되었다는 전제하에서 그렇습니다) 적어도 실험 연구는 성실하기만 하다면 누구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정직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일단 아무리 잘 훈련된 연구자가 정성을 다해 실험을 해도 대부분의 실험은 성공에 이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몇 번의 실험으로도 적합한 데이터를 얻는 운 좋은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다수 연구자는 100번, 1000번 실험해도 제대로 된 데이터를 얻지 못하죠. 즉 실험은 잘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실험 실패’는 통계적 의미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해봤던 실험 경험을 한번 돌이켜볼까요? 교과서 설명대로 장치를 설치하고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교과서에서 예측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당황했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의 전설적 실험인 피사의 사탑 실험을 흉내 내서 물체를 높은 탁자 위에서 떨어뜨려 중력가속도를 구하는 실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 자유낙하 하는 물체가 있고 그 물체의 높이 및 지표면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을 알면 중력가속도를 구할 수 있는 식이 있으니까요. 탁자의 높이를 측정하고 낙하 시간을 측정해 이 식에 대입하면 중력가속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직접 해봅니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중력가속도 값인 9, 8이 잘 안 나옵니다. 하라는 대로 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그 값이 안 나와요.

사실 값을 정확히 얻어내려면 엄청난 고민이 뒤따릅니다. 중력을 제외한 모든 인과적 요인을 제거해야 하고 측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 요인도 최대한 제거된 실험을 설계해야 하거든요.

그렇듯 실험적 전문성이 동원된다고 해도 실험 때마다 똑같은 숫자가 탁탁 튀어 나오지는 않습니다. 실험 때마다 조금씩 다른 숫자를 얻게 되는데, 이걸 평균 처리하면 이론값에 가까운 값이 얻어지는 거죠. 실험이 이토록 어렵습니다.

18세기의 화학 실험실을 묘사한 그림.

18세기의 화학 실험실을 묘사한 그림.<출처: Wikimedia Commons>

우리가 중고등학생 때 했던 실험은 ① 실험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표준적’ 실험 지침 ② 실험 중에 측정해야 할 값의 종류와 측정 방법 ③ ‘제대로’ 실험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 ④ 실험으로부터 얻은 데이터로부터 ‘마땅히’ 얻어져야 할 결론 등이 모두 미리 정해져 실험 지침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실험 지침서를 보고 실험을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만약 그런 실험 지침서조차 없다면 무엇을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정말 막막할 겁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과학 연구로서 ‘실험’이란 기존에 밝혀진 지식을 학습하기 위해, 혹은 실험 기법을 연습하기 위해 수행하는 실험이 아닙니다.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하는 거죠. 당연히 실험 지침이 ‘미리’ 정해져 있을 수 없고 실험 연구를 수행하는 개별 연구자(혹은 좀 더 일반적으로는 연구팀)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실험 방법도 정하고 어떤 값을 측정할지도 정하고 또 그 값을 어떻게 측정할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실험이 끝나고 운 좋게 데이터를 얻었더라도 이 데이터가 믿을 만한지 검증해야 하고 이 데이터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탐색해야 합니다.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한 ‘원자료’와 ‘현상’의 구별 문제를 떠올려보세요. 동일한 주제로 실험을 진행하더라도 연구자나 연구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험하고 데이터를 얻고 결과를 분석하게 됩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구된 결과를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상호검증과 비판적 종합을 거치면서 점차 ‘올바른’ 실험 방법을 합의해나가게 됩니다. 그런 합의가 상당히 진척되어 관련 연구자 사이에서 일종의 ‘공통지식(common knowledge)’이 되면 그때 비로소 실험 지침서가 만들어지고, 후속 세대 연구자들이 이 실험 지침서를 보면서 기존의 과학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 실험 연구 과정은 ‘역동적’으로 진행됩니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면 앞서 제가 말한 것, 곧 과학 연구는 뜻밖에도 예술 작업과 무척 비슷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공할지 등을 계속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실험 연구자들은 자신이 설정한 과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구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험 계획을 수립합니다. 어떤 실험 재료를 쓸지, 어떤 방법으로 그 재료를 실험할지 등을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끊임없이 결정을 내립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실험 연구 과정과 예술 작품 창작 과정은 상상력과 노동이 통찰력을 매개로 결합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합니다.

하지만 과학 연구 결과가 ‘과학지식’으로 확정되고 나면 이런 유사성은 거의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예술 작품과 달리 과학 연구의 최종 결과물은 연구 과정의 흔적을 모두 지운 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권위 있는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때 논문에는 연구 과정 중 연구자가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발휘한 통찰력은 전혀 기록되지 않습니다. 어떤 복잡한 연구 과정과 시행착오를 거쳐 최종 결론에 도달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동료 연구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제시될 그 ‘결론’에서 출발하죠. 그 결론이 명쾌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실험 방법을 기술하며 실험 결과와 그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을 기술합니다.

이는 과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 ‘거짓말’로 꾸며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논문에 제시된 실험 결과와 실험 방법, 추론 과정 및 결론은 모두 연구자들이 실제로 수행했던 내용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얼마나 어렵사리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논문을 기술할 때 제거됩니다. 그저 너무나 당연한 출발점에서 시작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결론으로 단번에 이른 것처럼, 그 과정이 매우 명쾌하게 기술된다는 거죠.

이처럼 과학 논문이나 교과서에 실려 후속 세대 과학자들에게 ‘지식’으로서 제시되는 과학은 역동적 연구 ‘과정’에 비하면 훨씬 정제된 것, 논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합리적 과학과 즉흥적 예술의 ‘대립’은 실제 연구 과정이 아닌, 최종 단계의 결과물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실험실에서 얻은 지식도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인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조금 엉뚱해 보일 수 있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도 자연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근대과학 이후 시기에는 실험 연구가 과학을 주도해왔기에 이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질문의 답이 항상 ‘당연히 그렇지!’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암 치료법을 찾는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쥐를 대상으로 어떤 실험을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특정 약물을 투여한 쥐가 그렇지 않은 쥐에 비해 종양 크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해보죠. 이 결과가 다른 실험실에서도 재현되었다면 우리는 적어도 ‘실험실 환경’에서는 이 결과가 타당하다고, 즉 참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가 실험실 ‘바깥’에서도 타당할까요?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합니다. 실험실 바깥이 무슨 별세상이 아닌 이상 실험실에서 참인 결론이 실험실 바깥에서 달라질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거죠.

실은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이유가 없다면 왜 대중매체에서 연일 보도하는 획기적인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겠습니까. 실험실에서 참인 결론을 실험실 바깥의 다양한 환경에서도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유지하려면 과학적·기술적·사회적 측면에서 추가 연구와 장치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이런 복잡한 사정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조건을 조절해 관측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자연현상에 대해 관련을 갖는다는 생각 자체가 무척 근대적인 것이지요.

근대과학이 등장하기 전, 즉 아리스토텔레스 과학 전통이 주도적이던 시절에는 자연을 그대로 관측하지 않고 거기에 뭔가 조작을 가하거나 상태를 변형할 경우 그렇게 얻은 결과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용한 인공물을 만드는 기술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자연철학의 내용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죠.

사실 실험실에서 실험이 진행되는 과정을 직접 보면 자연과학이 정말 ‘자연’에 대한 학문인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실험실에서 관측되는 현상 중 연구 대상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관측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개 실험실에서는 연구자가 관심을 갖는 현상의 특정 측면 혹은 인과 작용을 집중해서 보기 위해 다른 인과 작용은 최대한 억제합니다. 이것이 통제실험(control experiment)의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 남극에서도 불가능한 극도로 낮은 온도에서 실험을 하거나 공기를 모두 뺀 진공에서 실험을 하기도 합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발견되기 어려운 생활환경을 제공하거나 자연 상태에선 흔히 발견되는 포식자를 일부러 제거하고 실험을 하기도 합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 자연에서는 결코 ‘자연스럽게’ 관측될 수 없는 상황에서 실험을 하고 결과를 얻은 다음 그 결과로부터 ‘자연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자연현상에는 수많은 인과관계가 중첩되어 있어 자연 그대로 관측해서는 그 관계의 유무나 정확한 양적 관계를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실험 연구자들은 자신이 알아내고 싶은 인과 과정만 남겨두고 가능한 다른 인과 작용은 제거하거나 억제하며, 그도 안 되면 무작위화를 통해 그 인과 작용의 영향을 최소화합니다.

예를 들어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할 때, 그냥 동네를 돌아다니는 쥐들을 잡아다 실험하는 게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데이터를 얻을 수 없거든요. 연구자들은 어떤 유전형질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쥐로 한정해서 실험을 합니다. 그래야만 그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유전학적으로 해석해 안정된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과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공학 실험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통제실험으로 얻은 지식도 자연에 대한 지식이라 할 수 있을까?

통제실험으로 얻은 지식도 자연에 대한 지식이라 할 수 있을까?<출처: 셔터스톡>

과학자들이 왜 통제실험을 하는지는 이제 이해가 될 거예요. 하지만 그런 극단적 조건에서 얻은 실험 결과를 가지고 자연세계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이 지점에서 근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갈릴레오가 등장합니다.

자연은 너무도 복잡하기에 한꺼번에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실험실에서 극단적 조건, 과학철학에서 쓰는 표현을 가져오자면 ‘이상화(idealization)’되었다고 여겨지는 조건을 먼저 연구함으로써 개별 인과관계를 얻어낸 다음, 이를 덧셈하듯 더해서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자는 생각을 한 것이죠.

이런 식의 과학 연구 방법론을 상황에 따라 ‘분석적(analytic)’ 방법이라 부르기도 하고 환원적(reductionistic) 방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두 개념의 의미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일단 갈릴레오가 이상화를 통해 성취하려 했던 목표, 즉 복잡한 자연을 개별 인과 작용에 대한 연구로 이해하려는 근대과학의 태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이런 제안이 어떻게 당시의 주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직관을 누르고 과학 연구의 표준적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요?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바꿀 리는 없잖아요? 당연히 중요한 계기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흥미롭고 시사적인 계기를 다음번 이야기에서 소개하겠습니다.

[네이버 캐스트] 과학 연구, 실험실에서 펼쳐지는 예술 혹은 노동 - 실험실의 지식은 어떻게 과학지식이 되는가? (상상력과 과학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