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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
작성자 철** 작성일 2021-06-02 조회수 444

칸트는 마구() 장인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칸트와 독실한 경건주의 기독교인 어머니 안나 레기나 도로테아 로이터 사이의 열 한 자녀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칸트를 포함해 4명이었다. 칸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프러시아로 이주한 사람이어서, 칸트의 아버지는 영어식 발음과 억양이 섞인 독일어를 구사했다. 칸트는 ‘엠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나중에 히브리어를 배운 뒤 스스로 ‘임마누엘’로 바꾸었다. 칸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경건주의 기독교가 득세한 곳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였다. 칸트는 ‘경건주의자들의 합숙소’라는 별칭이 붙은 콜레기움 프리데리치아눔에 입학하여 라틴어를 비롯한 교양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3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1737) 1740년 16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6년간 공부했다. 일종의 졸업논문으로 힘을 측정할 수 있는 원리를 논하는 [활력의 올바른 측정술에 관한 사상]을 제출했는데, 당시만 해도 과학과 철학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집안이 부유하지 못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칸트는 1747년부터 1754년까지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로 일했다. 1755년 31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논문 [보편적 자연사와 천체이론]을 발표하고 학위논문 [불에 관한 몇 가지 고찰에 관한 간략한 서술], 오늘날의 교수자격논문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에 관한 새로운 해명]을 1755년에 썼다. 1756년 공석이 된 논리학, 형이상학 원외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임용되지 못했고 1758년에도 응모했지만 실패했다. 원외 교수는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고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할 수 있는 직위였다. 1764년 프로이센 교육 당국이 칸트에게 문학부 교수직을 제의했지만, 칸트는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오직 철학만이 그의 관심사였고 분야를 달리하면서까지 교수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칸트는 32살 때인 1756년부터 46살인 1770년까지 사()강사로 지냈다. 사강사는 오늘날 대학의 시간 강사와 비슷하지만 대학에서 강사료를 받지 않고 수강생들에게 강의료를 받았다. 사강사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칸트는 왕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수입을 보충했다. 그리고 1770년 46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논리학, 형이상학 강좌 담당 정식 교수로 임용됐다. 1781년 57살 때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지만 ‘해괴망측한 나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고 내용에 대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칸트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순수이성비판] 입문서에 해당하는 [형이상학 서설](1783)을 내놓았고, 1784년에는 역사철학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1785년 [도덕형이상학 원론], 1786년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내놓았다. 그리고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 비판]을 내놓음으로써 칸트의 이른바 삼대 비판철학서가 완결되었다.

다움편에 계속.....

 

 

 

[네이버 지식백과]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 비판철학을 통해 서양 근대철학을 종합한 철학자 (인물세계사, 표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