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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오디세이] 세상은 변화하는가-자연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작성자 철** 작성일 2020-02-03 조회수 266

헤라클레이토스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에페소스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는 철학자’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세상에 대해 매우 염세적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친구 헤르모도로스(Hermodoros, ?~?)가 추방을 당하자 세상을 싫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자가 될 만한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투표로 추방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 도편추방제와 비슷한 제도가 에페소스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헤르모도로스를 추방한 에페소스의 시민들에게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악담을 퍼부었다.

에페소스의 성인들은 모두 스스로 목매 죽고, 도시는 애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인간인 헤르모도로스를 추방했다. 자기들 중 그 누구도 최고여서는 안 되며, 그래도 최고가 있다면 그자는 다른 곳에 다른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말이다.1)

그는 법률을 만들어달라는 에페소스 사람들의 청을 거절하고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퇴거해 그곳에서 아이들과 주사위 놀이를 하고 지냈다. 이를 구경하러 온 이들에게는 “뭘 봐, 바보들아. 너희와 정치를 하느니 이게 더 낫지 않느냐?”라고 쏘아붙였단다.

인간 혐오자가 된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 식물과 약초를 뜯어 먹으며 살았다. 그렇게 살다 수종()에 걸려 도시로 내려온 그는 의사를 만나 “홍수가 가뭄으로 변할 수 있느냐?”라는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진다. 의사가 대답을 못하자 그는 외양간으로 가 제 몸에 똥거름을 묻혔다고 한다. 똥거름의 열로 몸속의 수분을 빼내려 한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병을 고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60세의 나이로 쇠똥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사망했다.

대중을 혐오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였다. “가장 탁월한 사람은 만 사람과 맞먹는다.”라고 굳게 믿었기에, 그는 우중()에 의한 민주주의보다는 소수의 현인들에 의한 통치를 선호했다. 우매한 자들은 “민중의 시인을 믿으며, 대중을 스승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대중을 경멸했고, 시인을 믿지 않았다.

교만과 경멸의 태도로 그를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대중이나 시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당시의 저명한 철학자들까지도 그의 비판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많이 안다고 이해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헤시오도스 · 피타고라스 · 크세노파네스에게도 이해력이 있었을 게다. 모든 것을 관장하는 지식(gnome)을 파악하는 것만이 지혜다.”

만물은 흘러간다

초기의 철학자들처럼 그는 여전히 감각을 선호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나는 선호한다.” 하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감각은 오직 이성적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과 귀는 그것들이 야만인의 영혼을 가졌다면, 인간에게는 나쁜 증인이다.” 바로 여기서 철학사상 최초로 감각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의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아가 그는 진리가 시대 · 장소 ·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 · 어디서 ·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보편적 이성(logos)과 같은 것이라 믿었다. 다만 자기 외에 다른 이들은 그 ‘말씀(logos)’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 말씀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영원히 이해를 못하는 듯하다. 그것을 듣기 전에도, 들은 후에도 말이다. …… 다른 이들은 마치 잠잘 때 하는 일을 잊어버리듯이 자신이 깨어서 하는 일도 알지 못한다.2)

그가 썼다고 하는 ‘자연에 대하여(On Nature)’는 우주론 · 정치학 · 신학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 책을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맡겼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전해지지는 않는다. 책의 내용 중 ‘정치학’ 부분이 눈에 띄는데, 이렇게 철학의 관심을 우주에서 사회로 옮겨놓은 것 역시 그의 업적 중 하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이 젊은 시절에는 아무것도 몰랐으나 늙어서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크세노파네스의 제자였다는 말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혼자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레투스 근처의 에페소스에서 나고 자란 그가 밀레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으리라. 그의 아르케는 ‘불’이었다. “이 세계 질서는 신들이 만든 것도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라, 항상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살아 있는 불이다.”

아르케로서 불

아르케로서 불

물론 그가 밀레투스의 철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아낙시만드로스는 ‘아르케’가 특정한 원소일 수 없음을 보여준 바 있지 않은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불’은 물리적 질료라기보다는 차라리 변환의 원리, 혹은 교환의 척도(metron)에 가까웠다.

물건들을 황금으로 바꾸고 황금을 상품들로 바꾸듯이, 모든 것은 불로 바꿀 수 있고 불은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고, 모든 것은 금을 받고 팔 수 있다. 이 교환 속에서 변함없이 동일한 것은 그 물건의 (화폐로 표기할 수도 있을) 가치일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불’은 원소들의 상호 변환 속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는 이 척도 자체를 상징한다.3) 후대의 연금술은 아마도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불을 통해 모든 것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우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동시에 ‘어두운 자(이해할 수 없는 자)’라고도 불렸다. 그가 그렇게 불린 것은 역설 · 반어 · 유비() 등 다양한 말놀이로 메시지를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놓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델피에서 신탁을 주시는 그분은 누설하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고 그저 암시를 주실 뿐이다.” 본디 ‘암시’라는 것은 누설하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그는 사용하는 어법에서까지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자신의 명제에 충실했던 셈이다. 앞에서 그가 “사람들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했던 그 “말씀”이 바로 이 명제, 즉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원리다.

활과 칠현금을 든 아폴론

활과 칠현금을 든 아폴론

스스로 분열하고 대립하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합치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활이나 칠현금에서와 같은 상호 반전적 조화다.

활시위는 서로 대립되는 두 힘이 있어야만 제 기능을 한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낮과 밤,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전쟁과 평화, 고생과 안락 등 대립물의 통일로 이루어진다.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대립물의 투쟁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전쟁을 ‘만물의 왕이자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했다. 전쟁이 “어떤 이는 신으로, 어떤 이는 인간으로 드러내고, 어떤 이는 노예로, 어떤 이는 자유인으로 만들어준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아예 우주의 보편적 원리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전쟁이 보편적이고, 투쟁이 정의이며, 모든 것이 투쟁과 필연에 따라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만물유전(panta rhei)’의 사상을 떠올릴 게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끝없이 흘러간다. 동일한 강에 들어가더라도 우리 몸에 와 부딪히는 물의 입자는 매번 다르다. 따라서 “인간이 동일한 강에 두 번 몸을 담글 수는 없다.”라는 것이 만물유전 사상이다.

이 말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간에 널리 퍼진 해석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다가 그만 사물의 동일성(정체성, identity)마저 부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사실 이 주제에 관해 전해지는 단편들 중 후대의 간접 인용을 제외하고 헤라클레이토스 본인의 입에서 나온 직접 인용으로 보이는 것은 다음뿐이다.

만물유전

만물유전

동일하게 머무는 강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로 계속해서 다른 물이 흐른다.

앞의 문장과는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같은 강에 들어가더라도 그 속의 물은 매번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물은 끝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를 통해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을 생각해보라. 우리 몸 안에서는 신진대사를 통해 낡은 세포들이 끝없이 새 세포로 교체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몸이 다른 이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려 몸은 그 변화를 통해 자신을 유지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바로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차이와 동일성은 서로 배척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은 외려 차이를 통해 동일성을 유지한다. 결국 여기에도 다시 한 번 ‘대립물의 통일’ 원칙이 작용하는 셈이다.

세상에 변화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에페소스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라 주장할 때, 지중해 건너 이탈리아 반도에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15?~?)라는 이가 나타나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이른바 ‘엘레아학파’의 창시자로, 흔히 ‘형이상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밀레투스의 자연철학은 감각으로 지각하는 자연(physis)의 본질을 묻는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엘레아학파의 형이상학(metaphysics)은 철학의 관심을 감각 세계 너머의 초(meta)자연(physis)의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이처럼 형이상학을 창시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는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지속될 서구 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그를 ‘우리의 아버지’라 부른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게다.4)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단 한 권의 책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론(On Nature)’이라 불리는 이 책은 6보격의 운문으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는 단편들만 전해질 뿐이다. 책은 서문(proem) · 실재(aletheia) · 가상(doxa)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은 파르메니데스 자신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태양의 딸 헬리아데스들이 모는 불붙은 바퀴의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밤과 낮이 교차하는 곳으로, 그곳에서 그는 한 여신에게 지혜의 말을 듣는다. 시의 나머지 부분은 이 신의 입에서 나오는 계시로 이루어진다. 신이 말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있다오. 확실한 실재(진리)의 확고한 가슴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가멸자들의 가상(속견)까지.

이어지는 2부에서는 실재, 즉 세계의 참모습이 다루어진다. 신은 청년에게 실재를 탐구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존재하는 것을 탐구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길이다.

신은 첫 번째 길을 택하고, 두 번째는 피하라고 권한다. 세상에는 오직 유()만 존재할 뿐, 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니까. 이것이 그 유명한 파르메니데스의 역리다. 그에게 존재는 곧 사유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도, 언급할 수도 없다.

이 선험적 · 연역적 논증을 통해 신은 비()존재를 아예 머리에서 지우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면 세계는 우리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계는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을 것도 아니고, 그냥 한꺼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신의 눈에 비친 세계는 무시간적 · 비시간적이다. 거기서 시간은 과거 · 현재 · 미래의 구별 없이 통째로, 하나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는 허상이고,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다. 그러니 생성도 소멸도 있을 수 없다. 생성은 없던 것이 생기는 것이고, 소멸은 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무가 없다면, 그로부터 뭔가가 생겨날 수도 없고 뭔가가 그리로 사라질 수도 없다. 고로 그 세계에서는 시간이 흐를 수가 없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과 소멸이 일어날 수도 없다. 여기서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을 것도 아니고, 그냥 한꺼번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 세계 질서는 신들이 만든 것도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있어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살아 있는 불이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대한 반박으로 보인다.

파르메니데스는 세계는 ‘시간적’으로만 통째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통째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상에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무가 없다면 빈틈도 없고, 따라서 세계 또한 빈틈없이 연속된 하나가 된다. 그 하나는 움직일 수도 없다. 움직일 틈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안에서 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 운동이 일어나려면 빈틈()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세계는 필연적으로 부동의 일자(immovable one)일 수밖에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이처럼 시간적 · 공간적으로 나눌 수 없는 거대한 연속체로 “완전하고, 움직일 수 없으며, 끝이 없다.”

이것이 신이 가르쳐주신 세계의 참모습(aletheia)이다. 물론 가멸자의 눈에는 세계가 탄생 · 변화 · 운동 · 소멸하는 것으로 보일 게다. 하지만 불멸하는 신의 눈으로 본 세계는 생성도 소멸도 변화도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부동의 일자

부동의 일자

이어서 3부에서는 가상, 즉 가멸자들의 눈에 비친 세계가 다루어진다. 그 세계는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그 안의 모든 것은 끝없이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화하고 운동한다. 물론 이는 가멸자인 인간의 눈에 비친 허상에 불과하나, 신은 청년에게 이 “가멸자들의 가상(속견)까지”도 “알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필연적 진리(aletheia)와 달리 “신뢰할 수 없는” 개연적 속견(doxa)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나, 그 또한 사는 데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이라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이 허상은 비()존재가 존재한다는 가멸자의 근본적 착각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경험적 세계의 다양성과 변화란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근본적 착각이 빚어낸 허상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가멸자들은 두 개의 형태에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원래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밝음/어둠, 무거움/가벼움 등 두 개의 상반되는 형태를 상정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한다. 그 대표자가 바로 세계가 대립물의 통일로 이루어졌다고 본 헤라클레이토스였으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 하나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어 둘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가멸자들은 실제로는 ‘하나’인 실재에 두 개의 이름을 붙이고는, 그 둘의 대립에서 뭔가가 발생하는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존재뿐이다. 그런데 가멸자들은 실재에 ‘비존재’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는 이 두 가지, 즉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 속에서 생성이나 소멸이 발생한다고 믿게 된다.

인간의 견해에 따르면, 사물들은 생성되어 지금 존재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고 소멸한다. 그 각 단계의 것들에 인간들은 고정된 이름을 부여해왔다.

그 결과 존재하는 것은 부동의 일자 ‘하나’뿐인데도, 이 세계에 마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다양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3부에는 가상의 세계, 즉 감각에 비친 경험 세계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것은 원작의 십 분의 일에 불과하나, 주요한 내용들은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론일 것이다. 거기에 따르면, 이 우주는 빛과 어둠이라는 두 요소의 혼합으로 태어났다고 한다.(물론 파르메니데스는 이를 진리가 아니라 속견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우주론에는 지구는 구형()이고, 달빛은 태양 빛의 반사에 불과하며,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같은 별이라는 올바른 관찰이 포함되어 있어 놀라움을 준다.

파르메니데스는 예지계(aletheia)와 현상계(doxa)를 구별한다. 자연철학자들이 설명해온 세계는 이 중 현상계에 해당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설파한 ‘만물유전’도 파르메니데스에게는 그저 속견으로 간주될 뿐이다. 이렇게 철학을 경험 세계를 탐구하는 자연학을 넘어 초월적 세계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린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업적이다.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등 그는 그 후 수천 년 동안 지속될 서구 철학의 원형을 제시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서양 철학의 역사는 결국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를 ‘우리의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리라.

제논의 역리

엘레아의 제논

엘레아의 제논

엘레아학파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n ho Elea, 기원전 495?~430?)이다. 사실 세계가 생성 · 소멸 · 변화 · 운동하지 않는 ‘하나’라는 주장은 우리의 상식과 직관에 현저히 위배된다. 세간의 비판에 맞서 스승의 가르침을 옹호하기 위해, 그는 이 세상에는 운동도, 공간도, 다양성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증명을 제시하려 했다.

그가 제시한 여러 증명은 오늘날 ‘제논의 역리’라 불린다. 제논의 역리는 운동을 부정하는 네 개의 역리, 다수를 부정하는 두 개의 역리, 그리고 공간을 부정하는 하나의 역리 등 모두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운동을 부정하는 역리들일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다.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거북이가 100m 앞에서 출발할 경우,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열 배 빨라도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아킬레스가 열심히 달려 거북이가 있던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거기서 10m 더 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킬레스가 다시 10m를 달려 그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또다시 거기서 1m 앞에 가 있을 것이다. 다시 1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다시 거기서 10cm 앞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무한히 반복한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없다. 고로 우리 눈에는 운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제논의 역리 중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제논의 역리 중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이와 비슷한 것이 ‘절반 거리의 역리’다. 어떤 거리에 도달하려면, 일단 그 절반의 거리에 도달해야 한다. 그 절반의 거리에 도달하려면, 다시 그 절반의 거리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게 무한히 소급하다 보면 유한한 시간 내에 특정한 거리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고로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논의 역리 중 ‘절반 거리’

제논의 역리 중 ‘절반 거리’

누가 봐도 궤변임에 틀림없지만 반박하기는 매우 까다롭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함으로써 이 두 역리를 해결한다. 즉, 모든 종류의 연속체는 ‘길이’에서 무한하든지 ‘분할’에서 무한하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이 중 ‘길이’에서 무한한 거리는 유한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없다. 반면 ‘분할’에서 무한한 거리는 유한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5)

그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날아가는 화살의 역리’다. 날아가는 화살이 있다고 하자. 그 화살은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지점을 통과할 것이다. 그런데 화살이 날아가는 시간은 무한히 많은 순간으로 쪼갤 수 있다. 날아가는 화살은 그 무한한 순간을 통과할 것이며, 그 하나하나마다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결국 화살은 무한히 많은 순간마다 다 멈춰 있으니 결코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 제논의 주장이다.

제논의 역리 중 ‘날아가는 화살’

제논의 역리 중 ‘날아가는 화살’

앞의 예에서는 공간을 무한히 많은 ‘선분’으로 분할했다면, 여기서는 시간을 무한히 많은 ‘점’으로 분할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경우든 제논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분명하다. 우리 눈에는 운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공간의 역리’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파르메니데스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스승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제논은 또다시 교묘한 궤변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공간이 존재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간 안에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공간이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 역시 다른 공간 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공간 역시 또 다른 공간 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공간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무한 소급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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