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10-04 | 조회수 | 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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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 필리스젊은 여인이 늙은 사내의 등에 올라타 있다. 사내의 입에는 재갈, 여인의 손에는 채찍이 들린 모습이 영락없이 기수(騎手)가 말을 다루는 모습이다. 맘껏 사내를 농락하는 저 여인은 누구일까? 그녀의 이름은 필리스(Phyllis),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재위 기원전 359~기원전 336)의 애인이다. 그럼 저 가련한 사내는 누구일까? 위대한 철학자, 철학의 대명사, 그리하여 중세에는 아예 '철학자'라는 보통명사로 불린 사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두 남녀의 등 뒤로 담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이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두 남자가 보인다. 한 사람은 아직 어려 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인다. 누구일까? 아마 긴 수염을 가진 이는 필리포스 2세, 매끈한 턱을 가진 이는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년)일 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필리포스 왕에게는 필리스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의 아름다움은 왕자인 알렉산드로스마저 사로잡을 정도였다. 왕자가 연인까지 넘보자 필리포스는 가정교사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올바로 훈육하라고 명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자를 꾸짖으며 큰 인물이 되려면 육욕을 억제하라고 훈계한다. 필리스의 눈에는 당연히 자신을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곱게 보일 리 없다. 앙심을 품은 그녀는 은밀히 복수를 계획한다. 치명적 매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홀린 후 고명하신 철학자가 벌건 대낮에 저런 민망한 꼴을 연출하게 한 것이다. 물론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가 그 장면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을까? 사실을 말하면 이런 일은 없었다. 중세 말 유럽에는 '여성의 권능'이라는 주제로 남성을 지배하는 여성의 치명적 매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널리 유행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필리스〉는 그렇게 떠돌던 이야기들 중 하나로,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1220년 이전으로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고대의 실화가 아니라 중세의 허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이 중세의 제재(題材)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니체는 당대의 팜 파탈(femme fatale) 루 살로메와 기념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이때 살로메를 마부로, 자신과 친구를 말로 연출한 바 있다. 아테네의 마케도니아인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작은 식민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코마코스(Nicomachus)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조부인 아민타스 3세(Amyntas III, 재위 기원전 393, 기원전 392~기원전 370)의 전의(典醫)였다고 한다. 비록 마케도니아 출신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의 나이로 아테네로 이주해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학업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20년간 그곳에서 플라톤의 제자이자 동료로서 활동하다가, 기원전 347년 플라톤의 죽음을 전후하여 정치적인 이유로 아테네를 떠나게 된다. 당시 아테네와 마케도니아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아테네를 떠난 그는 아소스와 레스보스에 머물다가 기원전 342~3년경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로부터 당시 13세였던 왕자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성인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5년 테베를 함락시키자 마케도니아에 대한 아테네 내의 반감도 한풀 꺾이게 된다. 이 틈을 타 다시 아네테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북동부의 체육시설 뤼케이온에 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로써 그의 '2차 아테네 체류'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다분히 인종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어서 출정하는 제자에게 "헬라스인은 동료로 대하고 이방인들은 동물이나 식물로 취급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이방인 여인과 결혼하고 부하들에게도 이를 권장하는 등 인종 융합 정책을 펼치자, 한때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23년 정복전쟁을 떠났던 알렉산드로스가 현지에서 병사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아테네에는 반 마케도니아 정서가 고조된다. 사실 그때쯤에는 알렉산드로스와의 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그에게 반역의 혐의까지 받던 처지였지만, 그런 그도 아테네에서는 어차피 마케도니아인일 뿐이었다.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인들에게 '불경죄'로 고소를 당할 위험에 처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두 번씩이나 철학적 범죄를 저지르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긴 채 또다시 아테네를 떠난다. 아테네에서 어머니의 집이 있던 에비아섬의 칼키스로 거처를 옮겼지만, 그는 그곳에서 바로 병에 걸려 이듬해인 322년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이 여정에 따라 한 연구자는 그의 사상의 발전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아카데미아 시절로, 스승처럼 대화편을 쓰며 스승의 초월적 철학을 신봉하던 시기다. 2단계는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와 레스보스를 거쳐 왕자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기 위해 마케도니아에 머물던 시기로, 이즈음 그는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사상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형이상학 · 윤리학 · 정치학의 초본과 자연학 · 우주론의 기초가 만들어진다. 3단계는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에서 가르치던 시기로, 이 시기에 그는 158개 국가의 헌법을 수집하는 등 경험적 연구 방법을 확립한다. 그의 형이상학은 이제 관심을 초월자에서 완전히 돌려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개별 대상들에 주목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초기에 플라톤주의자였으나 후기에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경험주의자로 진화해나간 것이 된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시간적 발전'을 주장하는 역사주의적 해석이라면, 그의 사상의 '내적 통일성과 체계적 완전성'을 강조하는 구조주의적 해석도 있다. 거기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주의자에서 경험주의자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플라톤주의자이자 경험주의자였다는 것이다.1) 사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 언급한 이데아론에 대한 반론('제3의 인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면, 이 시절에 그는 스승의 초월론 철학을 수용하기는커녕 벌써 거기에 근본적 회의를 제기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게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플라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스승과 보편자(=형상)의 실재성에 대한 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개별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보편자가 없다면 개별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이게 해주는 공통성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의 개별자로 존재하되 '개'가 아니라 하필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어떤 것을 그 무엇이게 해주는 그 보편자. 플라톤은 그것이 감각적 세계 너머의 초월적 세계에 있다고 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감각적 세계 안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별자들 안에 구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스승을 따라 보편자가 개별자에 앞선다고 보았다.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
이데아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그의 저서 곳곳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비판을 시작하기 전에 "이데아론은 우리의 훌륭한 친구들이 도입한 것이라 반대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나, 철학자라면 친구와의 우정보다 진리를 더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후기의 《분석론 후서》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스승의 이데아론이 '황당무계한 거짓말'이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한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 언급한 그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 논증은 '제3의 인간(tripos anthropos)'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아에 관하여》, 《형이상학》, 《소피스트적 논박》 등 그의 저서 여러 곳에 살짝 모습만 바꾼 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데아론의 문제는 감각 세계의 개별자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개별자들이 서로 '참여(methexis)'의 관계를 갖는다고 말하나,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하는 실체가 어떻게 감각적 대상들의 '본(paradeigmata)'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대상들이 '본'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게 된다는 플라톤의 말은 '공허한 말', 한갓 '시적 비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보편자와 개별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 이데아론으로 감각 세계에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이데아가 어떻게 물리적 세계의 운동과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데아론의 존재론적 문제라면, 이데아론에 따르는 인식론적 문제도 있다. 즉, 이데아론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개별 사물에 관한 지식에 도달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플라톤에게 '개'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개의 '이데아'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보편자에 관한 지식을 더한다고 개별자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정작 설명해야 할 것은 제쳐두고, 그저 그 자리에 같은 수의 새로운 실재(=이데아)를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구체적인 개에 대한 인식을 개-성(性)에 대한 인식으로 대체하는 꼴인데, 이는 사과의 개수를 세면서 상자 안에 계속 사과를 새로 집어넣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천상에서 자연으로이 모든 비판은 결국 '플라톤의 이론이 감각 세계의 대상이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완벽하게 무력하다'는 데로 모아진다. 플라톤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먼저 관념(=이데아)의 세계에 있지 않았던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인식이란 곧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데아 세계에서 본 것들의 '회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사람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사적 관념들 중에서 먼저 감각으로 지각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플라톤이 말하는 생득관념, 즉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관념 따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인식,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관념은 언젠가 감각 세계로부터 감관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한 경험주의자다. 자연을 연구할 때 주로 신성한 천체에 몰두한 기존의 철학자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하필 존재의 위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를 차지하는 동물의 연구에 몰두했다. "우리는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모든 종류의 동물을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 각각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2) 이를 위해 그는 해면동물을 찔러보고 굼벵이의 부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 경험과학자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스승의 사변적 경향과 대립되는 그의 경험적 태도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있다. 벌들의 생식 과정에 대해 논하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관찰에서 이론으로 나아가고, 관찰과 이론이 충돌할 때에 이론보다 관찰을 우선시하는 것은 과학자의 태도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근대적' 의미의 경험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근대의 경험주의자들은 보편자의 실재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편자를 텅 빈 '이름'으로 여기는 유명론자(nominalist)였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을 따라 보편자의 실재성을 굳게 믿는다. 예를 들어 도토리가 먼저 있고 거기서 우연히 상수리나무가 생기는 게 아니다. 한 알의 도토리 안에는 그것을 상수리나무로 만들어줄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한 알의 도토리에 들어 있는 그 보편자, 즉 상수리나무-성(性)이 개개의 도토리나 개개의 상수리나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자연철학은 목적론적이다. 그 점에서 그의 이론은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과학과도 명확히 구별된다. 학문의 체계와 방법론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주제로 글을 썼다'고 말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과 학문의 체계를 만든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학문을 제작적 · 실천적 · 이론적 학문의 세 분야로 구분한다. 제작적 학문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실용적 기술에 관한 학으로, 건축학 · 전쟁론 · 시학 · 수사학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분야에서 그는 《시학》과 《수사학》을 남겼다. 실천적 학문이란 윤리학이나 정치학처럼 처세를 위한 도덕적 기술에 관한 학을 가리킨다. 이 분야에서 그는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 몇몇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이론적 학문은 그 어떤 실용적 · 실천적 목적도 없는 순수 관조(theoria)의 학문으로, 자연학 · 수학 · 신학 등이 여기에 속한다. 수술을 하는 데에 도구가 필요하듯이 학문을 하는 데에도 수단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안드로니코스(Andronikos, 기원전 125~68)가 한데 묶어 '기관(organon)'이라 부른 일련의 저작을 통해 학문의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범주론》 · 《명제론》 · 《변증론》 · 《분석론 전서》 · 《분석론 후서》 · 《소피스트적 반박》이 거기에 속하는데, 이들 저서에서는 모든 문장의 바탕에 깔린 열 개의 근본 범주, 그 범주들로 만들어지는 문장의 종류, 그 문장들의 올바른 연역의 방법 등이 다루어진다. 17세기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귀납법에 기초한 새로운 과학을 위해 《신기관(NovumOrganum)》(1620)을 썼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Organum)》을 겨냥한 책인데, 이는 역으로 근대까지 그의 권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이론적 학문의 목록에는 중요한 분과가 빠져 있다. 모든 분과 학문의 위에 있는 학문, 바로 형이상학이다. 사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용어가 아니다. 그는 그 분야를 '제1철학'이라 불렀다. '형이상학(Metaphysica)'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세기경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정리하던 중 제1철학을 자연학(physica) 다음에(meta) 배치한 데서 유래한다. 그때만 해도 '메타피지카'는 그저 '자연학 다음에'라는 뜻만 갖고 있었다. 그 용어를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재해석한 것은 로마의 저자 심플리키오스(Simplikios, 480?~550?). 그 이후에 메타피지카는 '모든 학문의 상위 학문', 나아가 '자연 너머의 초감각적 세계에 관한 학문'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형이상학자연학에 속하는 분과들은 각자 고유의 영역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동물학은 동물, 식물학은 식물, 인간학은 인간, 천문학은 천체 등 각 학문은 특수한 영역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반면 형이상학은 개개의 '특수한' 대상들의 바탕에 깔린 보편성을 탐구한다. 다양한 대상 모두에 공통된 것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존재'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물이든 공기든 흙이든, 해이든 달이든 별이든, 이 모든 상이한 대상들 사이에서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리라. 형이상학은 이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탐구한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형이상학, 즉 제1철학의 근본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ousia) 개념의 여러 가지 의미를 살핀 후 '실체란 형상(eidos)과 질료(hyle)의 결합'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질료'란 어떤 것을 이루는 재료를 가리키고, '형상'이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화분이 있다고 할 때 화분의 재료인 흙은 질료, 식물을 심기 좋게 생긴 화분의 형태는 그것의 형상이다. 플라톤은 형상들이 질료에서 분리되어 영원불변하는 초월적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질료와 분리되지 않은 채 감각 세계의 개별 사물들 안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모든 사물은 그 자체 안에 형상과 질료를 결합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을 그저 형태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형상'이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알아보게 해주는 특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물 · 불 · 공기 · 흙 같은 무정형(無定型)한 재료도―우리가 그것을 물 · 불 · 공기 · 흙으로 알아보는 한―그 안에 형상을 가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 없는 질료'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질료 없는 형상'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질료와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일 게다. (다만, 인식론적 과정에서는 그 둘이 분리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질료 없이' 형상을 받아들인다. 그에게 지각이란 질료에서 형상을 떼어내어 머리에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질료형상론의 장점은 명확하다. 형상이 이미 사물 속에 들어 있다면 조물주든 천체의 신들이든 형상과 질료를 결합시켜줄 신화적 주체를 따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또 예지계와 현상계 사이를 매개하는 제3항으로서 '코라(khora)'처럼 설명하기 힘든 개념을 도입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대상은 기존의 사물을 질료로 취하는 형상의 실현이자 또 다른 형상의 잠재적 질료다. 예를 들어, 벽돌은 흙을 재료로 한 형상의 실현이나 동시에 건물의 잠재적 질료다. 이렇게 한 형상이 다른 형상의 질료가 됨으로써, 가령 흙에서 벽돌이, 거기서 다시 건물이 생겨나고, 이를 뒤집으면 건물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변화에는 크게 네 가지 원인(aitia)이 있다. 질료인(hyle), 형상인(eidos), 작용인(kinoun), 목적인(telos)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장인이 신상을 조각한다고 하자. 그때 대리석은 신상의 질료인이요, 신상의 모양은 형상인이요, 장인의 노동은 작용인이요, 신상의 숭배는 그것의 목적인이다. 여기서는 인공물의 예를 들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도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흙의 최상의 목적은 지구 중심부에 이르는 것이고, 불의 최상의 목적은 중심부로부터 멀어지는 것"5)이라고 한다. 목적이 있기에 "자연은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6) 개구리 발에 갈퀴가 달린 것은 헤엄을 잘 치기 위함이요, 민들레 꽃씨가 낙하산을 닮은 것은 멀리 퍼져나가기 위해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이데아론에 대한 반론에서 질료형상론까지 (철학 오디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