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커다란 짐승’인가 ‘생각하는 육체’인가? | |||||
작성자 | 철** | 작성일 | 2018-07-16 | 조회수 | 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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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파와 제퍼슨파의 갈등
1789년 초기 몇 달 동안 미국 헌법 아래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의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 초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826)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재무장관엔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 국무장관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 임명됐다. 1789년 4월 30일 워싱턴은 뉴욕 월스트리트와 브로드 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뉴욕 시티홀의 2층 발코니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 조지 워싱턴 동상 뒤에서 바라본 미 국회의사당의 돔 내부(Capital routunda). 고조되는 연방파와 공화파의 갈등하원의 의석수를 결정하기 위해 만든 인구조사법에 따라 1790년 8월에 시행된 제1회 인구조사의 결과 미국의 총인구는 392만9천625명이었다. 흑인인구는 노예가 69만7천624명, 자유 흑인 5만9천557명이었다. 대도시 인구는 필라델피아 4만2천명, 뉴욕 3만3천명을 기록했으며, 인구가 가장 많은 주는 버지니아로 82만명이었다. ‘이민자(immigrant)’란 말이 미국의 영어 속에 들어와 기존의 개척자 또는 정착민(settler)과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된 건 1780년대부터였는데, 1790년에 제정된 미국 최초의 귀화법은 “자유의 몸이 된 백인만이 미국 시민이 될 자격이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인구 조사에서 인종은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백인 남성, 백인 여성, 노예(흑인), 기타(인디언)였다. 이는 백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1) 가장 중요한 인종·영토 문제를 비롯하여 미국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 어떤 철학으로 임할 것이냐 하는 해묵은 갈등은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앙집권화 주창자들은 ‘연방파(Federalists)’로 해밀턴이 이끌었다. 한때 해밀턴과 동맹관계를 맺었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해밀턴과 그의 지지자들을 위험하게 보기 시작했다. 연방파가 위협적이고 억압적인 권력구조를 조장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응해 제퍼슨과 매디슨과의 지도 아래 새로운 정치조직이 등장했으며, 스스로 자칭 ‘공화파(Republicans)’라고 했다(이 공화파는 1850년대에 출현한 현대의 공화당과는 관련이 없다.) 제퍼슨은 상업행위를 경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토지에서 자급자족하는 농본주의적 공화국의 비전을 제시했다. 미국이 지나치게 도시화되거나 산업화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의부터 달랐다. 해밀턴은 “인간은 커다란 짐승”이라고 생각한 반면, 제퍼슨은 “인간은 생각하는 육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밀턴은 강력한 정부를 주장한 것이고, 제퍼슨은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연방파와 공화파의 시각 차이는 워낙 커서 헌법 제정 이후 12년간은 특이한 독설 정치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철학적 차이와 더불어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탓이었다. 연방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단으로 강력한 연방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미국의 사명이 중앙집권적 권위, 정교한 산업경제, 세계문제에 적극 대처하는 능력을 가진 진정한 국민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온건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구상했던 집단은 미국이 고도로 상업화하거나 도시화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2) 연방파와 공화파는 프랑스 혁명을 보는 시각에서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제퍼슨은 처음부터 프랑스 대혁명을 긴 세월에 걸친 불의를 바로 잡으려는 합법적 시도로 보고 찬양했다. 그는 혁명이 발발한 1789년 8월 프랑스에서 쓴 편지에서 “나는 인간의 양식과 인간의 자치 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이성이 자신의 힘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두려움이 전혀 없다”며 “프랑스에서 모든 일이 훌륭하게 결말을 맺지 않는다면 나는 거짓 예언자로 돌팔매를 맞아도 좋다. 또 혁명은 프랑스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혁명은 유럽 자유의 역사에서 다만 그 첫 장일 뿐이다.”고 했다. 그는 1793년까지도 “프랑스 혁명의 실패를 목격하느니 나는 차라리 지구의 절반이 황량한 황야로 변화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과격한 표현을 쓰는 것은 오히려 그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불안감이 강했다는 걸 시사한다. 1793년 이후로 혁명이 더욱 급진적이고 폭력적 성향을 띠게 되자 많은 미국인들은 대혁명이 정당한 한계를 벗어났다고 간주했다. 특히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1793년 1월 미국혁명에서 미국이 승리하도록 도와주었던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실시하자 미국의 보수파들은 프랑스 혁명파를 문명의 파괴자로 보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어 온건 지롱드파에 대한 급진 자코뱅파의 승리, 그리고 그 절정인 로베스피에르(Maximillan Robespierre, 1758-1794)의 공포정치에 화가 난 미국의 비판자들은 대혁명을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 프랑스 혁명(1789) 당시 지롱드파가 교수대에 끌려가는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 연방파가 이런 비난을 주도했다. 연방파는 공화파에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연방파에게는 자코뱅파와 마찬가지인 공화파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하는 의도가 강했다. 해밀턴은 로베스피에르 등이 저지른 ‘무시무시하고도 구역질나는 광경들’ 즉 암살, 내부반란, 일체의 사회적 도덕적 연대감의 실종 현상을 비난하면서 프랑스에서 “자유의 참된 대의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은 대혁명 덕에 연방파가 진정한 자유의 벗인 공화파를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개탄했지만, 그 역시 연방파의 주장에 점점 더 근접하고 있었다. 훗날 그는 프랑스 대혁명과 그 혁명의 후유증은 ‘공포’, ‘광기’, ‘범죄’, ‘인간적 참상’, ‘치명적 오류’에 뒤덮인 개탄할 만한 인류사의 한 시대였다고 회고했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의 자유를 궁극적으로 짓밟은 것은 ‘원칙은 없고 유혈만 낭자한 로베스피에르의 폭정과 이에 못지않게 무원칙하고 광기어린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독재’였다.3)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건 단지 생각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외교문제로 다가왔다. 루이 16세가 처형된지 11일 후인 1793년 2월 1일 프랑스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자 미국은 난처해졌다. 프랑스와의 동맹조약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령 서인도제도를 영원히 보호함으로써 프랑스를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퍼슨과 해밀턴 사이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친프랑스계인 제퍼슨파는 프랑스를 위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친영국계인 해밀턴파는 프랑스 대혁명의 폭력성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쳤다고 비판하고 무질서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는 영국을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워싱턴은 이런 당파적 갈등을 개탄하면서 내키진 않지만 해밀턴의 연방파에 가담해 1793년 4월 22일 중립을 선언했다. 중립선언 발표 후 에드몽 쥬네(Edmond Charles Genet, 1763-1834)가 주미특사로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상륙했다. 쥬네는 미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원조도 얻을 수 없음을 확인하자 미국 대통령을 제쳐놓고 미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워싱턴이 참수당하는 모습이 그려진 판화를 출간했으며, 아메리카 도처에 급진적인 자코뱅 클럽을 조직하고 미군의 퇴역장교를 고용하는 등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 필라델피아의 대통령 사저 앞에서 조지 워싱턴과 에드몽 쥬네가 마추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William L. Breton).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그의 소환을 요청했다. 1794년 프랑스 정부가 이 요청을 받아들임에 따라 후임자 조셉 포쉐(Joseph Fauchet, 1763-1834)가 쥬네를 체포해 프랑스에서 심문하도록 송환하는 임무를 띠고 미국에 도착했다. 워싱턴은 쥬네의 생명만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의 인도는 거부했다. 쥬네는 미국에 귀화하여 뉴욕 지사의 딸과 결혼했으나 상처하였고, 우정장관 오스굿의 딸과 재혼해서 허드슨 강변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살다가 1834년 사망했다.4) 전쟁터를 방불케한 연방의회와 주의회1796년 가을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쳐가는 워싱턴은 고별사를 발표했다. 직접 연설은 하지 않고 1796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내용이 발표되었다.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미국의 지역주의와 당파 싸움에 지쳐왔음을 한탄하고 미국은 하루 빨리 북부와 남부, 그리고 동부와 서부간의 지역적인 편견과 파별을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그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영원한 동맹’을 맺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우호와 정의를 나누어야 하지만 특정 국가에 대한 ‘습관적인 미움이나 습관적인 우호 감정’을 피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향후 미국 외교의 주요 원칙이 되었다.5) 워싱턴의 고별사는 지난 8년간 공화파와 연방파간 누적된 당파적인 적대관계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아 주었던 최후의 방파제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워싱턴은 그간 강력한 연방정부를 추구했지만, 정치논쟁엔 초연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조짐은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1796년 대선에서 부통령 존 애덤스가 연방파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해밀턴과 남부 연방파는 애덤스의 후보 지명에 불만을 터뜨리며 토마스 핑크니(Thomas Pinckney, 1750-1828)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애덤스는 가까스로나마 공화파의 토머스 제퍼슨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제퍼슨은 선거에서 차석을 차지하였으므로 부통령이 되었다. 헌법에 권리장전이 추가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1798년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른바 외국인규제법과 선동금지법(Alien and Sedition Acts)이다. 외국인규제법은 이민을 차단하고 이미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로 하여금 미국을 떠나도록 하였다. 특히 프랑스 이민자들은 그들의 고국에서 일어난 혁명에 동정적이며 미국사회에 혁명적 사고를 퍼뜨리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이들에 대한 공포는 히스테리로까지 발전하였다.6) 선동금지법은 연방정부에 대한 “그릇되고, 수치스럽고, 악의적인” 말을 범죄로 취급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프랑스와의 갈등으로 1798년 연방의회에서 더 많은 의식을 확보해 다수당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 연방파가 공화파의 반대를 원천봉쇄하겠다는 목적이 컸다. 당시 공화파 신문들의 공격이 무자비할 정도로 극심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법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 1798년 의회를 통과한 외국인규제법(왼쪽)과 선동금지법(오른쪽). 애덤스 행정부는 선동금지법을 이용하여 10명을 체포하고 기소하였는데, 대부분 친공화파 신문편집인들이었다. 이에 공화파는 1798년과 1799년 두 개의 결의안에서 연방 제정법의 무효화에 대한 주의 권한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다. 하나는 제퍼슨이 익명으로 작성한 것으로 켄터키 주 의회에서 채택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매디슨이 초안 작성한 것으로 버지니아 주 의회가 승인했다. 제퍼슨은 ‘켄터키 결의안’에서 “자유정부는 질투 속에서 설립되는 것이지 신뢰 속에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7) ‘버지니아와 켄터키 결의안’으로 알려진 이 결의안은 존 로크의 이론과 헌법수정조항 제10조를 원용한 것으로, 연방정부는 주들의 ‘계약(compact)’에 의하여 수립되었으며 위임된 일정한 권한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공화파는 연방제정법의 무효화라는 관념에 대하여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진 못했으나, 연방파와 논쟁을 거듭하여 국가 위기의 수준으로까지 상황을 비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미국 전체가 열정적으로 정치화되었으며, 연방의회와 주의회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1800년의 대통령 선거는 선동금지법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 속에서 치러졌다. 대통령 후보는 4년 전과 동일했다. 제퍼슨이 현직 대통령 애덤스에게 재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연방주의자인 애덤스는 워싱턴, 해밀턴과 더불어 중앙정부의 권력강화에 중점을 둔 연방당(Federalist Party)을 대표했다. 반면 제퍼슨은 매디슨과 더불어 중앙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주 정부와 지방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둔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을 대표했다. 이 선거는 ‘1800년의 혁명’ 또는 ‘제2차 미국혁명’으로 불리는데, 최초로 정당 간 정권교체가 일어났으며 두 정치적 관점이 전례없이 첨예한 경쟁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 선거에서 승리한 제퍼슨이 취임사에서 “우리는 다 연방파이며 우리는 다 공화파이다”라고 말한 건 당시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하겠다.8) 제퍼슨과 해밀턴의 경쟁, 누가 이겼나?이처럼 미국 건국의 초기 역사를 지배했던 해밀턴파와 제퍼슨파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돼 미국 정치를 지배하는 기본 갈등 전선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런 갈등의 당사자들을 연방 중심이냐 주의 독립된 권한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해밀턴파(Hamiltonian) 또는 제퍼슨파(Jeffersonian)로 부른다. 이 갈등은 세월이 흐르면서 진보-보수의 이분법으론 포착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런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제퍼슨과 해밀턴의 경쟁에서 누가 이겼을까? 이름은 제퍼슨이 훨씬 더 빛났는지 모르지만, 최종 결과를 보자면 해밀턴의 손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제퍼슨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일하는 데 붙어사는 너무 많은 기생충들”이라고 할 정도로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등 거대한 중앙집권체제를 혐오하였지만, 제퍼슨 시대에도 강력한 중앙정부를 전제로 한 해밀턴식 미국 정치체제는 지속되었다. 1803년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도 해밀턴식 행위가 아닌가. 게다가 루이지애나 매입은 제퍼슨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반대한 해밀턴의 국립은행 창설 제의로 발행된 미국 채권으로 이루어졌지 않은가. 사실상 해밀턴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오늘날 제퍼슨은 미국적 ‘평등’의 설계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워싱턴에 있는 제퍼슨 기념관의 돌 위에 새겨져 있는 제퍼슨의 다음과 같은 글은 우리 인간이 영원히 지켜야 할 금언이라는 걸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나는 인간의 정신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압제에 대해서도 영원히 적대할 것임을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말이지만, 미국이 압제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보다는 압제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미국은 다른 국가와 민족들의 ‘압제에 대한 영원한 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인간이 ‘커다란 짐승’이냐 ‘생각하는 육체’냐 하는 판단을 국경을 중심으로 한 이중 기준에 맡겨야만 하는가? 이는 이후 미국의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한번도 제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강준만 교수의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주제가 있는 미국사] 도서 출간!! [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은 ‘커다란 짐승’인가 ‘생각하는 육체’인가? - 해밀턴파와 제퍼슨파의 갈등 (주제가 있는 미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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