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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와 인상주의
작성자 철** 작성일 2021-10-06 조회수 293


 물의 요정

 모네의 작품, <모네의 정원>을 보라. 모네가 그린 것은 연꽃인가가까이 다가서면 꽃은 거친 물감 자국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수련은 무엇인가?

 거친 터치로 벽에 발라진 두꺼운 물감 자국에 불과할지 몰라도, 물러서서 본다면 무정형의 물감 덩어리 속에 꽃들의 현상이 보인다수련의 허깨비, 캔버스에 아른아른 증발하는 수련의 신기루이다

모네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수련의 현상은 화가의 붓끝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서 완성된다.

 르네상스 화가, 브뤼겔이 수련을 그린다면 가까이서 보나 멀이에서 보나 변함없이 수련일 것이다. 그때 그림은 자연의 모방, 꽃의 복제였다.

 그럼 모네는 무엇을 그렸을까?

 모네가 그린 수련은 꽃이 아니다. 꽃의 시각적인 인상이다. 르네상스 화가와는 달리 현실에 존재하는 꽃을 복제하지 않았다.

 우리의 눈에 복제된 꽃의 인상을 또 다시 복제했을 뿐이다.  모네가 그린 수련은 반영의 반영, 복제의 복제인 셈이다.

 

 현대인의 눈

 수련을 그린 모네의 눈은 현대인의 눈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말이 되는가? 연못의 목가적임이 어디 도시의 분주함이 있고 번잡한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눈이 있단 말인가?

 대도시의 모습은 뚜렷한 윤곽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색덩이로 다가온다. 이것이 도시적 지각이다. 인상주의는 이 도시적 지각의 구현이다.

 과거의 화가들은 달리는 마차의 바큇살을 또렷이 그려넣었다. 마치 달리는 마차도 그 자리에 멈춰선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눈에는 이처럼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바퀴살을 또렷이 그리지 않고, 바큇살 부분을 슬쩍 흐릴 것이다. 그럼 마차는 실제로 달리는양 속도감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인상주의는 이런 도시적 속도의 구현이다.

 즉, 과거의 화가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지향, ‘대상을 그리고자 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 ‘주관지향. 현대인의 시각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린 것은 모던의 지각이다.

 

 루앙 성당 앞에서

 모네는 <수련>을 그리기 전에, <루앙 성당>을 그렸다. 그것도 한 번만 그린 것이 아니라 같은 건물을 반복해서 그렸다. 왜 이런 것인가?

 인상주의에게 이란 반사된 빛이다. 빛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네는 성당의 제 색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달라지는 빛을 쫓아 여러번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점심,저녁의 성당을 그렸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성당을 그렸다.

 과거에도 계열적인 작업을 한 화가들은 가장 적확확 표현을 얻기 위해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려 그림이 여러 개의 버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러개의 버전 중에서도 대상을 제일 적절하게 표현한 그림 하나가 특권을 누려, 모종의 위계질서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 하나의 그림이 화가의 대표작이 되어 '원작' 행세를 한다.

 하지만 모네의 <루앙 성당>에는 위계가 없다. 왜 그런가?

 모네의 그림에는 고유색이 없기 때문이다. 사물에 고유색이 있다면, 여러 버전 중에서 성당의 색조에 가장 가까운 것을 하나 고를 수 있는데, 모네의 그림에는 고유색이 없어 어느 그림이 루앙 성당의 색조에 가장 가까운지 말할 근거도 사라지게 된다.

 루앙 성당의 진면목은 하나의 그림 안에 남김없이 이를 모두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차이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며 끝없이 이어지는 계열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현실의 사라짐

 그림을 인쇄하기 위해선, 빨강, 파랑, 노랑 그리고 검정의 네 장의 필름으로 분해되어 이것을 인쇄기에 걸어놓고 순차적으로 네 번 인쇄하면 된다.

 루앙 성당의 각각의 작품은 거의 단색에 가깝다. 한 장의 사진을 앞처럼 색 분해를 통해 얻은 필름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성당의 고유색은 여러 개의 단색 필름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림 속에서 견고한 물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성당은 물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그것은 성당이 아닌 성당의 인상이다. 물 자체가 아니라 화가의 눈에 맺힌 인상일 뿐이다.

 원본은 사라졌다. 그리고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의 놀이가 들어선다. 세계는 더 이상 단 하나의 그림 안에 한꺼번에 재현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은 사라졌다. 이제 세계는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무한히 이어지는 시뮬라크의 놀이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모습을 드러낸다. 이게 현실이며, 현대인의 자각이다.

 모네는 이 현대인의 눈을 가지고 시뮬라크르이 놀이 속으로 현실의 견고함을 사라지게 한 최초의 화가이다.

 

 

출저 : < 미학 오디세이 3>, 진중권, Humanist,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