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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비밀에 접근하는 정신분석 - 자크 라캉
작성자 철** 작성일 2020-02-20 조회수 450

주체의 비밀에 접근하는 정신분석

자크 라캉

[ Jacques Lacan ]

출생 - 사망 1901.4.13. ~ 1981.9.9.

정신분석사가인 루디네스코(E. Roudinesco)는 “프로이트주의에 훌륭한 철학적 구조를 제공한 세계 유일의 것”이라고 자크 라캉(J. Lacan, 1901~1981)의 사상을 평가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철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라캉은 철학적 진리 추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철학적 진리 추구의 활동을 하게끔 하는 마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고자 했다. 그 결과 철학적 탐구심을 이끄는 ‘욕망(desir)’과 ‘주체’의 비밀이, 그리고 보다 넓게는 우리 삶의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철학자는 어떤 욕망 때문에 탐구를 시작하는 걸까? 가령 소크라테스는 ‘다이모니온의 목소리’에 이끌려 철학을, 또는 진리 찾기를 수행했다고 고백한다. 라캉은 이 점에 대해 그의 사상의 골격을 보여주는 [세미나]11권(맹정현/이수련 옮김)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를 생각해봅시다. 소크라테스의 타협할 줄 모르는 순수성과 ‘어디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특성’은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것입니다. 거기에 매 순간 다이모니온의 목소리가 끼어듭니다. 소크라테스를 이끌고 있는 그 목소리가 소크라테스 자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를 현실의 어떤 고정된 지식의 자리에도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저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면의 어디서부터 목소리는 들려오는 것일까? 혹시 그것은 ‘무의식 안에서 추구되는 대상’(라캉은 이를 ‘대상a’라 칭했다)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철학의 역사가 무의식이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인 ‘환청’에 이끌려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마침내 죽음으로까지 이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방황 불가능한 실재의 목소리를 찾아서

 

타자(Autre)’를 대표하는 것이 언어라는 상징이다. <출처 : NGD>

우리가 의식하는 현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Autre)’가 지배하고 있다. 이 타자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상징이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우리는 언어를 창안할 수는 없고 타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질서에 복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언어적 질서란 문맹자와 같은 처음 태어난 아기에겐 ‘의미(시니피에)’를 갖지 않는 음향적 외관, 즉 ‘시니피앙’의 질서이다.(이렇게 라캉에게서 언어(시니피앙), 상징계, 타자라는 개념은 서로 상관적이며, 때로 교환 가능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무의식으로부터 들려오는 저 목소리를 타자의 언어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추구하려 할 때 막상 주어지는 것은 목소리 자체가 아니라 목소리를 대체하는 어떤 시니피앙일 것이다. 이미 있던 시니피앙을 껍데기로 뒤집어 쓰고서 만 목소리는 등장한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방황한다. 마치 오디오광에게 오디오기기들이란 추구하는 소리의 불만족스러운 대체물일 뿐이며, 그의 인생은 한 기계에서 다른 기계로 소리를 찾아 계속 방황해야 하는 운명인 것처럼 말이다.

철학자의 방황은, 현실 안의 어떤 학파가 내놓는 진리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학설에서 다른 학설로 참된 목소리를 찾아 옮겨 다닌다. 저 목소리 자체는 현실에서 조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불가능한 것’, 현실에서 늘 ‘결여’된 것이다. 바로 이 불가능한 ‘실재’에 이끌리는 것이 철학을 움직이는 욕망이며, 보다 넓게는 어떤 식으로든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삶 자체를 움직이는 욕망이다.


욕망의 탄생에 대한 역학적(dynamique) 설명 리비도, 충동들, 욕망

 

내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내가 진정으로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체물에 불과하며, 우리의 욕망은 대체물에서 다른 대체물로 옮겨갈 뿐이다. <출처 : NGD>

이렇게 욕망은 상징계 안에 ‘빈 구멍처럼 결여된 실재’ 때문에 생긴다. 이런 욕망의 주체가 발생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라캉은 ‘리비도’ 개념에서부터 출발한다. 리비도란 “삶의 순수한 본능(pur instinct de vie)”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생식, 즉 양성()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것이며, 인간이 “유성 생식의 주기를 따름으로 인해 상실하게 되는 부분”이다. 즉 남, 여는 상징계 안의 기호로서만 유효할 뿐 애초에 리비도는 성이 없는 것이며, 이렇게 보자면 우리의 성적 정체성 역시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이 리비도는 인간 신체의 어떤 분화된 기관도 애초에 가지지 않으므로, 마치 아메바처럼, 또는 깨어진 계란처럼 흘러 다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은 우리 몸의 구멍에 달라붙어 ‘충동(pulsion)’을 형성한다. 이렇게 해서 눈, 입, 귀, 항문 등 성감대를 이루는 우리 몸의 구멍들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충동들’과 ‘대상a들’을 가지게 된다. 가령 시각적 충동은 대상a로서 응시(시선)를, 청각적 충동은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이 충동들이, 애초에 설립되어 있는 질서의 세계, 상징계, 즉 “문화의 장”에 들어설 때 대상a는 상징계 안에 ‘잃어버린 대상’으로 기입된다. 그리고 상징계 안에 생긴 대상a의 결여를 메우려는 힘으로서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이 모든 과정은 마치 ‘신화’처럼, 시간적 추이를 따르는 이야기처럼 쓰여졌지만, 시간적 형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의 문제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보았던 목소리라는 청각의 영역뿐 아니라, ‘응시’라는 시각적인 영역에서도 욕망은 결여된 것을 메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랑에 빠진 내가 응시를 요구할 때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항상 결여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너는 절대로 내가 너를 보고 있는 곳에서 나를 응시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역으로, ‘내가 바라보는 것은 결코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내가 진정으로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체물에 불과하며, 우리의 욕망은 대체물에서 다른 대체물로 옮겨갈 뿐이다. 잃어버린 대상의 빈 구멍을 메우는 대체물은 그저 대체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만족을 모르는 까닭이다. 가령 보려는 욕망을 지닌 눈이 근본적으로 탐욕적임을 지적하며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사악한 눈의 기능이 보편적인 반면 선한 눈, 은혜를 베푸는 눈에 대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라캉은 심지어 [성서]에서도 선한 눈은 단 한군데서도 찾을 수 없었으며, 사악한 눈만이 있었다고 한다. 베푸는 눈 또는 선한 눈의 사례는 없는지 찾아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가령 임철우의 소설 [아버지의 땅](1984)에 나오는 “눈매가 고운” 아버지의 눈은 어떤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비판

 

코기토가 담긴 데카르트의 주요 저작 [방법서설] <출처 : Wikipedia>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정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계 자체가 타자의 영역이므로, 상징계 안의 욕망은 타자가 지정해 주는 것에 대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라. 선호하는 직업, 선호하는 배우자 등등은 모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들이 욕망의 대상으로 지정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욕망의 “주체는 타자의 장에 종속된 상태로서만 주체일 수 있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발명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지정 받는다. 그리고 이 점은 [정신현상학](1807)에서 헤겔이 이미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던 바였다. “사실상 욕망의 본질은 자기의식이 아닌 타자에게 안겨지는 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의식에게 욕망의 진상이 밝혀진다.” 이렇기에 라캉은 ‘오늘날의 헤겔’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울러 ‘주체’가 ‘타자의 장’에 귀속한다면, 데카르트코기토같은 주체,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같은, 반성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주체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반성’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자신을 대상화하는 이자적 관계이다. 그리고 반성하는 자는 반성된 형태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즉 생각하는 자는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생각함과 존재함이 일치하는 동일성을 지닌 이 주체의 지위는 ‘상상된 자아’, ‘상상을 통해 오인된 자아’이다. 왜냐하면 주체의 사유란 타자의 장인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주체는 내가 아닌 곳, 즉 타자의 땅에서 생각하고 타자의 땅인 이 상징계에서 소외된 무의식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라캉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식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철학에 대한 라캉의 기여는 자기반성이라는 이자적 관계(나와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데카르트적 자아가 상상적인 것임을 보이고, 주체의 참다운 위치는, 제삼자에 해당하는 객관적인 질서(언어적 질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소외와 분리 환상의 보호 속에 사는 주체

 

상징계 안에서 욕망의 주체는 ‘소외’와 ‘분리’라는 근본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욕망이 상징계 안에서 잃어버린 것의 대체물만을 움켜쥐고 불만스러워하는 까닭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면, 욕망은 늘 ‘교집합을 가지는 양자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 받기 때문이다. 가령 ‘자유냐, 목숨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해보자. 노예와 같은 인간은 목숨을 선택할 텐데, 이 때 목숨은 교집합에 해당하는 자유를 상실한 목숨이 된다. 즉 욕망은 자유로부터 소외된 목숨을 성취할 뿐이다. 주인은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자유의 성취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알려주듯, 이 선택에서 주인의 욕망은 ‘목숨(교집합)이 떨어져 나간자유’를 얻을 것이다. 즉, 그는 자유인으로서 죽는다. (라캉에게 끼친 헤겔의 영감은 매우 풍부한 것인데, 그는 이런 소외의 논리 역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정신현상학]의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 착안하고 있다. “공동체의 자유가 이루어낼 유일한 작업과 행위란 ‘죽음’에서나 찾아질 수 있다.”)

공주병에 걸린 이의 환상은, 남자들의 눈에서 결여된 공백을 발견하고 그 결여를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채워 넣는 데서 완성된다. <출처 : NGD>

이처럼 소외를 겪는 욕망의 주체는 상징계를 지배하는 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 분리는 주체가 자신 뿐 아니라 타자에게도 결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타자의 영역인 상징계는 언어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언어는 주체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해올 것이다. 그런데 주체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타자의 언어에 대해 ‘왜?’라고 질문한다. 엄마가 원하는 게 뭐야, 라는 질문에서부터 애인이 원하는 것에 대한 의혹을 거쳐 심지어 경전의 언어를 앞에 두고 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혹에 빠진다. 상징계가 완벽했다면, 즉 타자가 만들어낸 언어적 질서가 완벽했다면 우리는 결코 의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의혹을 가질 새 없이 타자의 언어가 답을 마련해놓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사태를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오가 의혹에 빠지는 것은 매트릭스가 만든 세계 안에 종종 결함이 드러나기 때문이 아닌가? (모르피우스의 말을 상기하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지. 그게 뭔지 모르지만.”)

우리의 ‘왜’라는 의혹은 결국 타자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냐 또는 타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의혹이다. 타자의 이 결여란 ‘본질적인 것’이다. 가령 신앙인이 신의 뜻에 대해 의혹에 휩싸이는 것이, 경전의 수정 가능한 결함 때문인가? 오히려 애초에 경전은 그런 의혹을 허락하는 결여를 본성상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징계 또는 타자의 결여 역시 그런 것이기에 그 결여는 주체가 어떤 ‘실재물’을 제공해서 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본래적 결여는 오히려 ‘주체가 갈망하는 것’으로 채워지는데 이를 ‘환상(fantasme)’이라 한다. 예를 들어 공주병에 걸린 이의 환상은, 남자들의 눈에서 결여된 공백을 발견하고 그 결여를 자신이 갈망하는 것, 즉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채워 넣는 데서 완성된다. 이렇게 보자면 환상이란 주체의 욕망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는 항상 이런 환상의 보호 속에 살고 있다.


주이상스, 충동의 자리에 주체가 자리 잡아야 한다

 

이처럼 라캉의 사상은 잃어버린 원초적 대상(대상a)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어떻게 인간의 욕망이 탄생하는지를 해명한다. 잃어버린 이데아를 찾아 헤매는 일로 현세의 삶을 이해한 플라톤 이래, 삶의 과정을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본 것은 서양 철학이 가진 한 근본적 경향이었으며, 라캉 역시 이 경향의 넓은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말년인 1970년대 라캉은 상징계 안에서 결여를 겪는 욕망 보다는, 상징계 안에선 출현이 불가능한 ‘실재’와 어떻게 조우해서 즐거움(주이상스, jouissance)을 얻을 수 있는지에 몰두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에서 말한 정신분석 식 계몽의 표어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Wo es war, soll Ich werden)’를 라캉이 오랜 성찰을 거쳐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충동이 있는 실재계의 차원에 주체가 자리 잡아야 한다.” 즉 타자의 질서인 상징적 질서내지 문화의 질서 안에서 욕망을 길들이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교화되지 않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의 즐거움을 주체에게 찾아주는 것이 정신분석의 사명이 된다. 그 ‘즐거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문화의 교화 바깥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질서 속에서 누리는 통상적 즐거움 이상의 ‘전복성’을 지닌 보물일지도 모르며, 어쩌면 시인 황동규가 묘사한, 사마귀가 성교 도중 잡아 먹히면서 느끼는 ‘죽음’으로 수렴되는 쾌감, “머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 쾌감”([풍장 30]에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체의 비밀에 접근하는 정신분석 [Jacques Lacan] - 자크 라캉 (생활 속의 철학, 서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