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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작성자 철** 작성일 2020-02-26 조회수 545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파르마콘

 

소크라테스의 새끼 백조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7?)은 아테네 출신으로 그곳의 전설적 입법자 솔론(Solon, 기원전 640?~560?)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재주가 많아 젊은 시절에는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고, 심지어 레슬링 경기에 나가기도 했다. 청년 플라톤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위해 디오니소스 신께 바치는 합창시에서 서정시와 비극시로 점차 시작()의 영역을 넓혀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해엔가 비극 경연에 참가할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고는 시인의 꿈을 접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그의 저서가 대화편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게다. 한때 시인이었기에 철학적 성찰을 극시()의 형식에 담는 것이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여겨졌으리라.

플라톤

플라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만남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새끼 백조 한 마리가 무릎 위로 올라오는 꿈을 꾼다. 그런데 그놈의 몸에서 깃털이 곧바로 자라더니 금방 다 자라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다음 날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라는 청년이 찾아왔고, 그 청년이 꿈에서 본 그 새끼 백조임을 그는 바로 알아차렸단다.

그렇게 제자가 된 플라톤의 과제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업적을 계승하는 데에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대부분 플라톤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들이다. 하지만 과연 그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어도 될지는 모르겠다. 디오게네스의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이 '뤼시스'를 읽는 것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단다. "헤라클레스에게 맹세코, 이 아이가 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그가 소크라테스가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1)

이렇게 그는 종종 스승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썼고, 그 때문에 그의 대화편에서 어디까지가 스승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그 자신의 생각인지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초기의 대화편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던 그가 중기부터 스승의 입을 빌려 제 얘기를 하기 시작해, 후기의 대화편에서 스승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사유 체계를 완성했다는 데에 학자 대부분이 동의한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중 부분, 1509~1599년경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중 부분, 1509~1599년경

소크라테스에 대한 오해

초기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주로 '질문자'로 등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실제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는 자신이 비록 지혜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산파였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지혜를 낳게 할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을 안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을 만나면 그는 집요한 질문으로 그들에게서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백을 받아내곤 했다. 이는 '무지의 지'야말로 모든 지혜의 출발이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초기의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끝없는 질문으로 상대의 논리를 무장 해제시키고, 그와 더불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와 덕을 함께 모색하려 했다.

트라시마코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

트라시마코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

중기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주로 '교육자'로 나타난다. 이제 그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에 상대를 앞에 놓고 다소 장황하게 자신의 이론을 가르치려 든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초기 대화편에는 없던 '이데아론'이 등장한다는 것이리라. 그의 이데아론은 소크라테스가 던졌으나 답하지 못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의 상대들 역시 지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아무도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면, 소피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리의 상대주의 ·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를 피하려면 객관적 · 보편적 지혜가 존재한다고 해야 하나, 소크라테스는 아직 그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이데아론이다. 누구도 진리를 갖지 않았다면, 그것은 개개인의 머리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객관적 · 보편적 진리로서 '이데아'라는 초월적 대상들의 세계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제 생각을 얘기하는 데에 스승의 입을 빌린다. 아마도 그는 그것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묵시적으로 함축했던 주장이라 믿었을 게다.

중기의 플라톤은 이렇게 제 생각을 얘기하는 데에 스승의 권위를 빌리나, 후기로 갈수록 그는 점점 더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온전히 저만의 사유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후기의 대화편에서는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가 미미한 역할의 '주변인'으로 밀려난다.2)

소크라테스 시대에 그리스 사회는 크게 세 가지 위협을 받고 있었다.3) 자연철학과 소피스트와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자연철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신들, 즉 인간을 닮은(anthropomorphic) 신들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소나 말에게도 손이 있다면 자기들의 신을 소나 말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크세노파네스의 말을 생각해보라.

소피스트들은 도시국가의 법률이 신성한 근원이 아니라 인간적 근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신성한 법률도 도시 밖으로 나가는 순간 곧바로 그 절대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한편, 오르페우스 교도들은 종교란 개인의 영혼에 관한 것이지 국가를 향한 의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국가 통합의 원리로서 종교를 사적인 문제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 불안감이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몬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그는 아테네의 신들을 모독한 죄로 기소를 당했다. 신들을 전통과는 완전히 다르게 표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질투하고 거짓말하고 강 간하는 호메로스의 신들과 달리 진정한 신이라면 도덕적으로 완전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 다른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끝없이 질문을 던져 젊은이들의 신념 체계를 뒤흔들어놓곤 했는데, 그런 행위가 세인들의 눈에는 소피스트들의 요설과 달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당시의 신비주의자들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너 자신의 영혼을 배려하라."라고 가르치고 다녔다. 이 모두가 세인들의 눈에는 위태로워 보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일생' 중 법정의 소크라테스, 1760년경

'소크라테스의 일생' 중 법정의 소크라테스, 1760년경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을 닮은 신들의 얘기가 이미 유치한 허구로 여겨지던 상황에서 그는 도덕을 모르는 '신화적 신'들을 새로이 도덕적 모범이 될 '신학적 신'들로 끌어올리려 했을 뿐이다. 그가 소피스트들처럼 객관적 가치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그는 외려 그들에 맞서 사유와 실천의 절대적 · 보편적 기준을 옹호했다.

나아가 그가 사람들을 신비주의에 빠뜨려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철수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영혼을 지적-도덕적 기능의 보금자리로 보아 그것을 몸보다 더 소중히 배려하라고 가르쳤지만, 그에게 개인의 영혼을 다스리라는 실천은 국가 공동체를 다스리는 문제와 늘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소크라테스를 오해했다.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플라톤의 철학적 글쓰기에는 크게 두 가지 동기가 있었다. 하나는 철학의 순교자가 된 스승 소크라테스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중단한 지점에서 출발해 그가 이루지 못한 과업을 대신 완성하고, 그 과정에서 제기될 온갖 반론에 대답함으로써 스승의 가르침을 적극 옹호하려 했다.

다른 하나는 다분히 공적인 성격의 것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의 패배 이후 위기에 처한 조국을 몰락에서 구해낼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플라톤은 스승에게 씌운 오해를 벗겨내 그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스승의 가르침이 조국 아테네에 독(pharmakon)이 아니라 실은 약(pharmakon)이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파르마콘 - 소크라테스의 독배4)

플라톤의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를 살펴보자. 글쓰기의 본질을 논하는 이 유명한 텍스트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 이름을 준 청년, 즉 파이드로스와 대화를 나눈다. 도시의 더위를 피해 시원한 야외로 나간 두 사람은 산책을 하다가 일리소스라는 곳에 이른다.

파이드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이 아테네의 왕녀 오레이티이아가 북풍의 신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닙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라고 대꾸하며 납치될 당시에 그녀가 '파르마키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노라고 덧붙인다. 조금 이상하다. 그는 왜 별로 말할 가치도 없는 이 사소한 사실을 굳이 언급한 걸까?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밖'에 있지만 '안'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액자(parergon)처럼 내용과 무관해 보이는 이 부분이 실은 대화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암시한다. 마침 일리소스에는 치유의 효능을 가진 샘이 있는데, 그 샘은 예로부터 '파르마키아(pharmakia)'라 불렸다. 이 때문일까? 오늘날 약국의 문에는 'pharmacy'라 적혀 있다. 치유의 효능을 가진 그 샘물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아득한 고대부터 '파르마키아'는 약을 조제하는 기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시절 약을 조제하는 것은 종종 주술사의 일로 여겨졌기에, 파르마키아는 '사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약국

약국

한편, '파르마키아'는 그와 아무 관계없는 '파르마코스(Pharmakos)'라는 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스에서는 기근이나 흉년과 같은 재앙이 있는 해에는 몇몇 사람을 폴리스 밖으로 끌어내 들판에서 돌로 쳐 죽이는 정화 의식을 행했다. '파르마코스'는 그 의식의 희생양을 말한다. 파르마코스는 재앙의 원인이 된 이질적 요소를 폴리스 밖에서 안으로 끌어들인 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파르마코스가 폴리스 밖으로 추방당하려면 먼저 폴리스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파르마코스는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자,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다.

파르마코스

파르마코스

'파르마코스'라는 말 자체에도 이중성이 있다. 물론 플라톤은 희생양이라는 뜻의 '파르마코스'라는 말을 직접 사용한 적이 없다. 그가 사용한 것은 그저 '파르마키아(제약술)-파르마콘(약물)-파르마키우스(주술사)'라는 말뿐이다. 하지만 이 낱말들의 연쇄가 청각 연상에 따라 머릿속에 자연스레 '파르마코스'를 떠올린다.

그로써 앞에서 말한 액자처럼 텍스트 '밖'의 파르마코스가 텍스트 '안'에 은밀히 간섭하게 된다. 아무리 자기 완결적인 텍스트라도 이렇게 해석은 밖을 향해 열려 있게 마련이다. '파이드로스'에서는 '파르마코스'라는 말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파레르곤(parergon)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말의 중의성이다. 그것은 이미 '파르마키아'가 가진 이중적 의미('제약'과 '사술') 속에 예고되어 있다. 즉, 그리스어에서 '파르마콘'은 '치유'와 '독약'이라는 상반된 뜻을 갖는다. 번역자들은 문맥에 따라 이 말을 때로는 '치유'로, 때로는 '독약'으로 번역하곤 한다.

이 중첩이 어디 언어적 우연에 불과하겠는가? 누구나 알다시피 약물은 제대로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곧바로 독이 된다. '파르마콘'이라는 낱말이 동시에 긍정적 의미('약')와 부정적 의미('독')로 사용되는 것은 결국 약물 자체가 가진 이중성에서 비롯된 현상인 셈이다.

'파이드로스'에서 '파르마콘'은 글쓰기의 은유로 사용된다. 소크라테스가 소개하는 이집트의 신화에서 문자의 발명자 토트 신이 파라오 타무스 앞에서 문자의 효능을 자랑한다. "내 발명품은 기억과 지혜의 처방전(=파르마콘)입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이 새로운 발명품에 기뻐하기는커녕 외려 문자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것이라 나무란다.

"그것은 기억의 치료가 아니라 이미 발견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해. 지혜에 관한 한, 그것으로 제자들에게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가상(=억견)만 심어주게 될 걸세." 여기서 글쓰기는 지성의 파르마콘으로 나타난다. 즉, 토트 신은 그것을 약으로 권하지만, 파라오는 그것을 독이라 거부한다.

파라오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보여주는 토트 신

파라오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보여주는 토트 신

플라톤은 가짜와 진짜를 가르고 진짜들 중에서 가짜를 골라 솎아내려 한다. 하지만 파르마콘의 이중성이 암시하듯이,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신화적 사유(mythos)를 이성적 사유(logos)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는 그 자신도 결정적인 지점에서는 이집트의 신화를 논거로 끌어들이지 않던가. 신화를 독으로 보는 그도 필요한 대목에서는 그것을 약으로 활용한 셈이다.

그뿐인가?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국가 공동체의 약으로 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가차 없이 공동체의 독으로 묘사했다.

이는 극적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은 폴리스에서 한갓 말재주로 정치인 흉내를 내는 가짜들을 솎아내고, 국가의 통치를 진정한 정치인, 즉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맡기려 했다. 하지만 정작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자를 파르마키우스(pharmakeus), 즉 사술을 펼치는 술사로 여겼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공동체 '안'에 해악을 들이는 자, 따라서 '밖'으로 추방되어야 할 자, 즉 파르마코스(희생양)가 되고 만다(텍스트 밖에 있던 '파르마코스'가 어느새 텍스트 안에 들어와 있음에 주목하라). 그리고 이 대목에서 마침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파르마콘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독배!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중 부분, 1787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중 부분, 1787

소크라테스는 폴리스를 위해 약(진리)을 조제했지만, 불행히도 동료 시민들은 그것을 폴리스를 병들게 하는 독(선동)으로 여겼다. 결국 그 자신이 조제한 파르마콘(약)이 글자 그대로 그가 살아서 든 마지막 잔을 채운 파르마콘(독)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파르마코스, 자기 철학의 순교자였던 셈이다.5)

[네이버 지식백과]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 파르마콘 (철학 오디세이, 진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