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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仁祖, 인조반정 仁祖反正
작성자 철** 작성일 2019-11-19 조회수 195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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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출생-사망 1595 ~ 1649
재위기간 1623년 ~ 1649년
가족관계 왕비 인열왕후(), 장렬왕후(), 아버지 원종(), 어머니 인헌왕후(),

자 화백(). 호 송창(). 휘 종().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으로 ), 어머니는 인헌왕후()이다. 비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 계비()는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에 봉해졌다가 후에 능양군()으로 진봉되었다.

1623년 김류(?김자점()·이귀(이괄() 등 서인(西)의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으므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형제의 의()를 맺었는데,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이 은연중 친명적() 태도를 취하게 되자,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에 항복, 군신()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외침으로 국가의 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었는데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西)·청서(西)로 분열되어 싸웠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이(이원익()이 주장한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대인 중강()·회령()·경흥() 등지에 개시()하여 그들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였다.

1628년 벨테브레이(Weltevree:) 등의 표착()으로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또 정두원()과 소현세자를 통하여 서양의 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1634년 양전(:토지조사)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시정하였으며, 연등9분()의 법을 정비하여 세제()를 합리화하였다. 1645년 볼모생활에서 들아온 소현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으며,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하였다. 한편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송준길(김육(김집()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능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이다.

인조 본문 이미지 1

[네이버 지식백과] 인조 [仁祖] (두산백과)

 

 

조선 후기의 기점, 인조반정

 

 

세검정의 현재 모습

세검정의 현재 모습인조반정 때 반정에 참여한 이괄, 이귀, 김자점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 칼을 씻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소재.

인조반정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여 일으킨 정변으로서 역성 혁명이 아닌 ‘반정’(성리학적 기준에서, 옳은 정치로 돌이킨다는 뜻)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출범한 광해군대의 북인() 정권(1608~1623년)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의병 활동으로 왜군 격퇴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정권을 잡을 수 있었으나 그 성향이 순수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정치 노선이었고, 학문적 다양성으로 인해 정권의 결집력도 취약했다. 전쟁의 폐허를 복구해야 하는 일과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민생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짓눌려 있는데다, 임란을 틈타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과의 외교 관계도 버거운 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북인 정권의 짐은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영창대군은 선조의 적자()로서 광해군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이 걸림돌의 제거가 북인 정권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서궁(西)1)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귀양 보낸 뒤에 죽여 버린 것이다. 강상윤리()를 폐기하는 폐모살제()2)의 죄는 성리학적 입장이 아니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결과는 1623년의 인조반정이었다.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서궁(경운궁)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서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소재.

인조반정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서인(西)이 주도하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남인()이 동조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이 정변을 통해서 집권한 사림 정권에게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타락한 윤리와 기강을 바로잡고 도덕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성리학적 이념을 국가 사회에 구현하여 문화 국가를 이룩해야 하는 것이다. 서인의 조종인 율곡 이이는 이미 16세기 후반에 경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구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한 바 있었다. 이러한 서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에서 조선 후기 사회의 방향은 예견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혁명의 과업을 이룩하기도 전에 조선 사회는 또 한 번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1636년의 병자호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후기의 기점, 인조반정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정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