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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 - 좋은 삶을 위한 두 가지 학문
작성자 철** 작성일 2020-01-29 조회수 1203

선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크게 이론적 학문과 실천적 학문, 제작적 학문의 세 분야로 구분한다. 이제까지 다룬 것이 형이상학 · 자연학 · 영혼론 등 그의 이론적 학문이었다면, 이제 실천적 학문으로서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살펴볼 차례다. (참고로 그는 제작적 학문으로 시학과 수사학을 남겼다.)

이론적 학문과 실천적 학문은 다르다. 이론적 학문이 ‘참된’ 지식의 회득을 목표로 한다면, 실천적 학문의 목적은 ‘좋은’ 삶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둘은 엄밀성에서도 차이가 난다. 이론적 인식과 달리 윤리적 결정은 어떤 보편적 전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엄밀한 진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그저 대강의 윤곽을 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3분법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3분법1)

이 탐구(=윤리학)는 지식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의 목표는 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유덕하게 되는 것이다.

윤리학의 대상은 ‘선()’이다. 고대에 ‘선’의 의미는 오늘날과는 조금 달랐다. 오늘날 우리는 선을 ‘착함’으로 이해하지만, 고대에 그것은 ‘좋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리스인들의 윤리적 목표는 착한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사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삶인가? 목적론적 관념에 따르면 당연히 목적에 부합하는 삶이리라.

모든 활동에는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의 목적은 승리요, 장사의 목적은 이윤이다. 그러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은 다른 목적들과 달리 완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완전한 목적은 굳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목적이자 다른 모든 목적의 목적, 즉 궁극이고 최종적인 목적이어야 한다.

그 자체를 위해 욕구되는 대상이 다른 목적을 위해 욕구되는 것보다 더 완벽한 법. …… 고로 완전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해 바람직하지 자기 밖의 다른 것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 아니리라. 사실을 말하자면 행복이 바로 그런 부류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을, 그 어떤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를 위해 선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들에는 그것들이 노리는 몇 가지 목적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들 중 몇몇―가령 재산, 피리, 혹은 도구 일반?을 다른 뭔가를 위한 수단으로 택할 경우, 그것들 모두가 최종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반면 최고의 선은 뭔가 최종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저 홀로 최종 목적인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 우리가 찾는 선일 것이다. …… 항상 목적으로 선택될 뿐 결코 수단으로 선택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절대적으로 최종적이라 부른다. 다른 모든 것 중에서 행복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으로 보인다.(NE 1097a15-b21)2)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으려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eudaimonia)’은 기쁘거나 즐거운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행복’ 역시 고대에는 그 의미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고대인들에게 행복은 뭔가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데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의 완성’으로 보았다. 행복이란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가장 탁월한 모드로 활동하는 상태’다. 즉 인간은 동물에게는 없는, 오직 자신에게만 있는 고귀한 능력들을 온전히 발휘하며 살아갈 때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의 윤리학은 오늘날과 달리 도덕적 의무감이 아니라, 인간의 유적() 본성을 구성하는 능력들의 실현과 완성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덕’이라는 말 역시 그 시대에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사용됐다. 오늘날 ‘덕(arete)’이라고 하면 대개 선량함 · 관대함 · 정의로움과 같은 도덕적 자질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어떤 것이 자신에게 내재된 고유의 능력을 충분히 발현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덕’이라 불렀다. 그것의 의미는 차라리 탁월함 · 우수함 · 훌륭함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덕의 반대인 ‘악덕’ 역시 그들에게는 사악함과 같은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재된 고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고 잠재워두는 상태로 여겨졌다.

여기서 다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구절로 돌아가 보자. “이데아론은 우리의 훌륭한 친구들이 도입한 것이라 반대하는 것이 매우 곤란하나 철학자라면 친구와의 우정보다 진리를 더 존중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대안은 ‘형상은 오직 질료와의 결합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이었다.

이 형이상학의 차이가 윤리학에도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가령 플라톤은 윤리적 실천의 보편적 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선의 이데아’를 상정했다. 하지만 이데아론을 부정하는 이상 이제 그는 똑같은 일을, 그런 초월적 실체를 요청하지 않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선의 이데아 없이 윤리적 실천의 원칙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의 이데아’를 보는 것이다. 일단 선의 이데아, ‘좋음’ 그 자체를 인식하면 모든 개별적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은지 저절로 알게 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선의 이데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세상에는 단 하나의 ‘좋음’이 아니라 다양한 목적에 따라 수많은 ‘좋음들’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지는 그때그때 경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윤리학은 실천적 학문이 된다. 윤리학은 ‘관조(theoria)’가 아니다. 윤리학은 이론적(theoretical)이 아니라 실천적(practical) 목적을 갖는다. 즉, 그것의 목적은 “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유덕하게 되는 것”에 있다.

윤리학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려면 연구의 대상은 불변적이어야 하고, 연구의 결과는 필연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윤리학은 불변적 대상에 관한 필연적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의 과제는 우연적 세계에서 경험을 통해 행동에 도움을 주는 실천적 규칙들을 제공하는 데에 있다. 이렇게 철학적 관조(theoria)와 윤리적 실천(praxis)을 서로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그의 윤리학은 소크라테스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행동이 지()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즉,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무지() 때문이지, 그 짓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안다면 악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보다 훨씬 현실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따라 도덕적 악이 행동의 본성이나 결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달리 우리 인간들은 나쁜 짓인지 빤히 알면서도 하고, 좋은 일인지 빤히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인 동시에 동물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가능태(dynamis)라는 면에서는 선하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 안에 잠재적으로는 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신체 안에 들어 있어, 때로 동물적 욕구에 지배당하기도 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이 되려면 그 동물적 욕구를 다스려 잠자는 상태에 있는 덕을 현실태(energeia)로 전환해야 한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참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이란 이처럼 덕(arete)의 활동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제 안에 내재된 유적 본성을 최대한 발동시키며 살아갈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유덕해질 수 있는가? 가능태의 덕을 현실태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본성을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통해서, 그리고 행운을 통해서. 이 중 마지막 둘은 제외된다. 딱히 행운이나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방법, 즉 ‘본성을 통해서’는 특별히 좋은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이마저 제외하면 결국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은 학습과 훈련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하나의 ‘상태’로 이해한다. 한두 번의 올바른 행위가 한 사람을 유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유덕하다’고 불리려면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삶 전체를 통해서.’ “왜냐하면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부르지 못하며, 단 하루의 따뜻함으로 봄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918a18)

덕은 유덕한 상태로부터 나오는 행위다. 그러한 상태에 이르는 방법은 올바른 행위의 반복된 실행을 통해 ‘성격’을 형성시키는 것밖에 없다. 덕은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운동선수들이 훈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에 비유한다. 이 과정에서 슬기로운 사람들, 즉 ‘본성을 통해서’ 유덕한 사람들의 충고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덕은 성격의 상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태인가? 한마디로 실천적 지혜를 가진 이들(ho phronimos)이 권하는 이성적 원칙(logo)에 따라 신중한 선택(prohairetik?)으로 늘 ‘중용(mesot?s)’을 취하는 마음의 상태다.

덕은 행동과 감정의 선택을 결정하는 정신의 안정된 상태로, 우리에게 관련된 중용을 지키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이는 신중한 사람들이 결정하는 이성적 원칙에 따라야 한다. 그 원칙은 지나침과 모자람이라는 두 개의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나아가 그것이 중용의 상태라는 것은, 악덕들의 경우 감정과 행동에서 옳은 것이 모자라거나 지나친 반면에, 미덕들은 두 극단의 중간을 확인하고 채택한다는 뜻이다.(NE 1106b36- 1107a2)

왜 중용일까? 간단하다. 유덕한 성격을 형성하려면 당연히 악덕들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 악덕들은 대개 ‘활동에 대한 과도한 탐닉이나 과도한 억제’로 특징지어진다. 고로 유덕한 성격을 가지려면 과도함과 부족함을 모두 피해 중용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덕목들은 실제로 중용의 특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간, 관용은 낭비와 인색의 중간, 진리는 자만과 자괴의 중간, 절제는 방종과 무감의 중간이라는 것이다.

중용은 물론 산술적 중간이 아니다. 용기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라 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과 용기의 차이가 만용과 용기의 차이보다 크다고 보았다. 나아가 중용의 덕이 언제나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악의 · 파렴치 · 질투와 같은 감정, 간통 · 절도 · 살인과 같은 행위는 지나침과 모자람을 따질 것 없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다.

한편 오감의 경우에는 다소 복잡하다. 예를 들어, 오감 중에서 시각 · 청각 · 후각은 절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림이나 음악, 꽃향기에 아무리 탐닉한들 그것을 방종하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식욕이나 성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미각과 촉각의 경우 절제의 대상이 된다. 이 두 감각에 관련된 쾌락에는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이었을까? 그는 흔히 좋은 삶이라 여겨지는 세 가지 삶의 형태를 검토한다. 세속적 쾌락에 바친 삶, 명성과 명예를 위한 삶, 관조에 바친 삶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쾌락에 바친 삶은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이 택하는 길, 명성과 명예를 위한 삶은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택하는 길, 그리고 영원불변한 것에 대한 관조에 바친 삶은 철학자들이 택하는 길일 것이다.

이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높이 친 것은 관조의 삶이었다. 왜? 여기서 그는 이른바 ‘기능적 논증’을 동원한다. 인간이 가진 기능 중 섭생 · 생식 · 감각 등은 동물과 공유하는 것이나, 이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허용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의 삶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의 삶

우주에서 신성한 것은 오직 정신(nous)뿐이다. 오직 그것만이 신에 속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 신적 속성의 일부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인간은 육체적 쾌락에 탐닉할수록 동물에 가까워지고, 정신적 관조에 몰두할수록 신에 가까워진다. 정신은 인간의 기능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므로, 그 가능성(dynamis)을 최대한 발휘(energeia)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인간에게 허용된 최고의 행복이다.

〈영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 중에서 정신의 능동적 부분은 불멸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그 능동적 부분의 사용을 통해 인간은 신에 가까워진다. 시인들은 신들과 경쟁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과 반대로 ‘되도록 신적으로 되라.’고 가르친다.

국가란 무엇인가

오늘날 윤리학과 정치학은 완전히 다른 분과에 속하게 되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둘을 ‘실천적 학문’으로 분류했다. 똑같이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학문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둘 중에서 정치학이 윤리학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한 개인이 좋은 삶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면, 하물며 한 도시나 국가 전체가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그보다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정치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 윤리학의 목적은 인간의 유적 본질의 실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 오직 도시국가(polis) 속에서만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본성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폴리스, 아테네

폴리스, 아테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인간을 통치하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인이 노예를 다스리는 ‘전제적’ 통치, 둘째는 가부장이 자식과 아내를 다스리는 ‘가부장적’ 통치, 셋째는 동등한 자질을 갖춘 시민들 사이의 ‘정치적’ 통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가 정당하다고 믿었다.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이성이 결여된 선천적 노예들이 있다. 주인은 저 자신의 주인이 될 능력이 없는 노예들을 인도해주고, 그런 주인에게 노예들이 노동으로 보답한다. 이렇게 주인과 노예 쌍방에게 이익이 되므로 노예제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런 그도 포로를 노예로 만드는 관행에는 비판적이었다. 그 관행이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이들까지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주인과 노예를 표현한 모자이크, 튀니지 바르도 국립박물관 소장, 2세기경

주인과 노예를 표현한 모자이크, 튀니지 바르도 국립박물관 소장, 2세기경

위의 세 가지 통치 중 처음 두 가지는 관계의 불평들을 전제로 한다. 가정 안에서 가부장 남성은 노예에 대한 자유인의 규율, 여성에 대한 남성의 규율, 미성년에 대한 성인의 규율을 행사한다. 왜? 규율을 하는 데에 필요한 이성적 능력을 가진 것은 오직 성인 남성 자유민뿐이기 때문이다.

노예에게는 애초에 이성적 능력이 없다. 여성에게는 그 능력이 있으나 권위가 없다(akuron).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남성의 이성은 본성적으로 여성의 것보다 우월하므로, 여성들은 자신의 덕(=이성)을 발휘할 때에도 조용히 순종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는 아직 이성의 능력이 채 발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덕(=이성)을 온전히 갖춘 가부장에게 복종하는 것은 적절하다는 것이다.

전제적 통치와 가부장적 통치는 사실 가정관리술(oikonomia)에 속하고, 《정치학(politke)》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통치의 마지막 유형, 즉 동등한 자질을 갖춘 시민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정치적’ 통치이리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정의론에 기초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정의’는 ‘합법적’이며 ‘공정한’ 것으로, “오직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상호관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노예와 아이에 대한 관계에는 정의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정의가 부분적으로만 적용된다. 온전한 의미에서 ‘정의’는 통치에서 동등한 자격을 갖고 동등한 역할을 하는 자유 시민들 사이에서만 온전히 이야기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적 통치란 결국 ‘국가’를 조직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4원인설()을 빌려 대답하자면 먼저 국가의 질료인()은 시민(polites)일 것이다. 여기서 ‘시민’이란 온전한 이성을 갖고 국사에 자문역이나 배심원으로 참여할 권리(exousia)를 가진 이들이다. 이 ‘시민’의 범주에 노예 · 여성 · 아이는 포함되지 않고, 성인 남성이라도 노인은 배제된다. 외국인도 당연히 제외된다.

시민들이 국가의 질료라면 국가의 형상인()은 무엇인가? 바로 헌법(politeia)이다. 형상이 질료를 조직하는 원리라면 헌법은 “국가의 거주민들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국가의 작용인()은 아테네의 솔론이나 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와 같은 통치자 · 입법자(nomothetes)이리라.

아테네의 솔론

아테네의 솔론

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

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

 
 

그렇다면 국가의 목적인()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가는 일종의 공동체이고, 공동체는 어떤 좋음() 때문에 만들어지므로 …… 모든 공동체는 뭔가 좋음()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공동체 중 가장 권위 있고 나머지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국가)가 가장 권위 있는 좋음(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분명하다.(P.1252a1?7)3)

여기서 ‘가장 권위 있는 좋음’이 무엇일까? 대답은 이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나와 있다. 최고의 선,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도시국가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성원들에게 좋은 삶, 혹은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도시국가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어서 본성상 남들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하며, 더불어 사는 게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유리하다. 폴리스는 인간이 만든 궁극적이며 완전한 조직으로, 인간은 오직 그 안에서만 최상의 좋음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 즉 폴리스의 동물이다. 폴리스 안에는 ‘인간’이 있고, 그 밖에는 ‘신’ 아니면 ‘동물’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만 진정으로 인간다울 수 있다.

《정치학》에서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제는 이데아를 상정하지 않고 좋은 국가의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형상’은 헌법이고, ‘좋은’ 국가란 결국 좋은 헌법을 가진 국가다. 그럼 좋은 헌법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170개 도시국가의 헌법을 수집하여 분석했다고 한다. 이 경험적 접근 방식이 그를 사변적 방식을 좋아하는 플라톤과 명확히 구별시켜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 내재한 위험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스승의 이상 국가가 과도하게 정치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은 철인이 통치하는 군주정을 이상국으로 상정하고, 이 이상국을 지탱하는 네 덕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차례로 타락한 정체들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가령 통치자가 ‘지혜’의 덕을 잃어버리면, 그때는 철인 대신에 전사들이 통치하는 명예정이 등장한다. 이 군사정권이 ‘용기’라는 군사적 덕목마저 잃어버리면 과두정이 나타난다. 이 돈 많은 소수들의 통치에는 ‘절제’의 덕이라도 있는데, 그마저도 사라지면 이제 다수 인민이 통치하는 민주정이 탄생한다.

하지만 민주정 하의 방종은 필연적으로 전제정을 부르기 마련인데, 이 최악의 정체에서는 ‘정의’ 자체가 사라져 오직 불의만 남는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이상국을 기준으로 다양한 정체 사이에 수직적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 국가’라는 개념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고, 시민들의 수준도 다르기에 단 하나의 이상적 정체()란 있을 수 없다. 그저 이 나라에는 군주정이, 저 나라에는 귀족정이, 또 다른 나라에는 민주정이 적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정체와 나쁜 정체를 가르는 기준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그의 기준은 공익과의 합치 여부다. 어떤 헌법이든지 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옳으며 정의롭다. 반면 통치자의 사익만을 지향하는 헌법은 그르며 정의롭지 못하다. 사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려다 보면 결국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전제적 통치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P.1279a17?21)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작용인, 즉 통치자의 수에 따라 정체를 1인의 통치, 소수의 통치, 다수의 통치로 구분한다. 이 세 유형은 다시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느냐에 따라 각각 올바른 형태와 그릇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결국 도시국가가 채택할 정체는 올바른 형태 셋과 그릇된 형태 셋, 모두 여섯 가지인 셈이다.

예를 들어, 1인의 통치가 공동선을 따를 경우 ‘군주제’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군주 개인의 사익을 따를 때에는 ‘참주제’로 변질된다. 소수의 통치가 공공선을 지향할 경우 ‘귀족제’가 되나, 사사로워질 경우에는 ‘과두제’로 전락한다. 다수의 통치는 사려 깊은 중산층이 행할 경우에는 ‘폴리테이아제’가 되나, 무지한 빈민층이 주도할 경우에는 ‘민중제’로 타락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1인 통치, 소수 통치, 다수 통치의 차이는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통치가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것, 즉 공공선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선호하는 정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폴리테이아제’를 선호했다. 그게 이상적이어서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많은 나라가 택할 만한 정체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중산층이 두터울수록 나라가 건강하다. 부자들은 자라면서 복종을 배우지 않았고, 빈자들은 무지하고 비열한 반면, 중산층은 지성적으로 법률에 복종할 줄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다수의 중산층이 통치하는 ‘폴리테이아제’를 과두제(부자의 통치)와 민중제(빈자의 통치)라는 두 극단 사이의 중용이라고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 - 좋은 삶을 위한 두 가지 학문 (철학 오디세이, 진중권)